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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깎이 중문학도가 이제서야 고전에 재미를 붙여갑니다. 어쭙잖은 실력이지만 맹자를 읽어가면서 느끼는 이것저것들을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연재해 볼 생각입니다. 틈틈이 아주 의미심장한 부분은 원문을 문법적으로 이해해나가면서 고전을 읽는 재미를 같이 느껴 보고자 합니다. <기자 주>

공손 추(公孫丑)란 사람 이름이고 맹자(孟子)의 제자이며 제(齊)나라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스승인 맹자 앞에서 살짝, 삐딱선이다(그래서 성씨가 공손씨? ^^). 선생의 말 한마디에 자지러지던 공자(孔子)의 제자들과는 사뭇 다른 태도, 공손 추 하편의 첫 장을 보라.

공손 추는 맹자에게 대뜸 "선생님이 제(齊)나라에서 요직에 오르신다면 관중(管仲)과 안자(晏子) 정도는 가능하시겠지요?" 라며 관중을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정도로 생각하려 애쓰시는 스승의 염장을 제대로 질러드린다. 세상에 이런 제자라니, 이것은 제자의 자세로 보기 어렵다. 인사 청문회장에 나와 앉은 패널이나 가능함 직한 삐딱한 자세. 맹자의 화가 치민다. 분을 삭이며 에둘러 제자를 비난한다. 탄식하듯, 子誠齊人也.

子誠齊人也
子는 2인칭 대명사이며 주어 그대는, 誠은 부사, 진실로, 의역해서 영락없이. 齊는 산동에 있던 나라이름, 人과 합쳐서 제나라 사람. (참고로 제나라는 묘한 지방색을 드러내는 지방이었는지 가끔 이 말은 모종의 분위기를 가리키기도 한다.) 也는 판단문에 쓰이는 종결어미, ~이다, 해석순서는 앞에서 뒤로 그냥 쭉 읽어 내리면 된다. 일반적이지 않은 형태이긴 하지만 간혹 이런 어순이 보이는데 이럴 때의 한문은 한국어 어순과 동일하다. 감정을 실어서 의역하자면 "아아, 그대는 영락없는 제나라 사람이구나." 어떤 사람들은 고대한문어법의 어순은 지금과 매우 달랐고 현재 한국어의 어순과 동일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公孫丑 章句 上)

이 탄식에는 많은 의미가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자의 천박한 시대인식 혹은 가치관, 자신에 대한 얄팍한 기대에 스승은 당연히 발끈 하셨것다. 하지만 맹자, 그가 누군가? 반구저기(反求諸己)의 맹자가 아니던가? 한 템포를 죽이며 속으로 가만 헤아려 보았으리.

그렇군, 이게 어디 이 사람만의 생각이겠는가? 이게 어디 제나라 사람들만의 생각이겠는가? 제자의 마음에 천박한 세속이 몰래 숨어든 일이겠지. 스승의 눈에는 그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스승인 것이다.

제자와 스승의 기준이 선명하게 엇갈리는 상황일 뿐이지만 그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단순한 견해 차이로 인한 슬픔이라기보다는 완전히 미쳤으되 스스로 막장으로 치닫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세상, 전국(戰國)의 한 복판으로 질주하던 당시(當時)를 향한 맹자의 한탄이 아닐까? 물론 맹자는 현란한 수사(修辭)와 치밀한 논리로 제자의 천견(淺見)을 친절하게 부셔주긴 하지만.

그런데 그런 제자가 공손 추 하나만은 아니었던지, 여기 7장에 또 한 명의 제자가 등장한다. 이번은 전과 다르다. 저어하는 태도, 사뭇 공손한 듯, 하지만 역시나다. 그 역시 스승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제대로 후벼드린다. 그런 제자 충우(充虞)가 7장에 등장한다.

맹자 일행이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로 널리 알려진 맹자의 모친상을 마치고 제나라로 돌아오던 중, 일행은 제나라 영(嬴)이라는 마을에서 잠시 쉰다. 충우는 스승의 안색을 살핀 뒤, 조심스럽게 묻는다. "前日不知虞之不肖, 使虞敦匠事. 嚴, 虞不敢請. 今願竊有請也, 木若以美然."

前日不知虞之不肖, 使虞敦匠事
前日은 앞전에, 不知는 알지 못하다, 우는 충우의 이름으로 스승에 대한 겸칭, 之는 주격조사로 충우(제)가 不肖는 불초자식이라고 말하는 그 불초이므로 그대로 읽어준다. 사는 부리다, 여는 저를, 돈은 감독하다, 장사는 관을 만드는 일, 의역하면 "앞전에 (선생께서는) 제가 불초함을 아시지 못하시고 저에게 관을 만드는 일을 감독하게 하시었는데."

嚴, 虞不敢請. 今願竊有請也, 엄은 촉박하여 우는 충우(저가) 불감청은 감희 여쭙지 못하다, 금은 지금, 원은 원하다, 절은 조심스러운 태도, 유청은 물어볼 것이 있다, 야는 종결어미. 木若以美然. 목은 나무로 짠 관이고 若~然은 ~인 것 같다. 以는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여기서는 매우, 또는 지나치다 정도, 미는 아름답다, 또는 화려하다의 뜻이다. 의역하면 "(그때는 시간이) 촉박하여 저가 감히 여쭙지 못하였고 지금 조심스럽게 여쭙을 것이 있습니다. 관이 너무 화려한 것 같았습니다." (公孫丑 章句 下)



질문하는 태도는 충분히 공손하지만 그 질문의 무게가 예사롭지 않아 정말 묵직하다. 그래서 그 질문은 맹자의 가슴에 턱 걸려버린다. 아마도 충우는 맹자가 깊게 신임하던 인물이었듯 싶다. 그래서 그에게 장례에 관한 일을 총괄하게 하였을 터. 지금도 그렇듯이 장례위원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차기 권력자를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누가 최고 권력자의 장례를 주관하는지만 보면 된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그런 중임(重任)을 맡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스스로 불초(不肖)하다는 표현을 쓴 것이다.

그런데 그런 중임을 맡은 그가 말끝에 아주 예리한 한마디를 달았다. 제자가 진작 여쭙고 싶던 것.

"장례에 쓰신 관이 지나치게 화려한 것 같았습니다."

질문의 밑바탕에 깔린 전제(前提)에서 살짝 묵가(墨家)를 의식한 냄새가 풍기긴 하지만, 아, 맹자는 아프다. 맹자와 그 어머니. 맹자에게 어머니란 어떤 존재였던가? 2000년을 훌쩍 넘어 현재에 사는 우리들도 맹자의 어머니를 아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제자가 스승의 그런 모친에 대한 애틋함을 몰랐다는 말인가?

빌어먹다시피 천하를 돌아다니다(참고로 중국에서의 유세(遊說)의 전통은 특별하다. 오죽하였으면 한비자(韓非子)는 아예 "유세하기의 어려움(說難)"이라는 논변을 지었다. 서양 철학자로 유명했던 플라톤 역시 유세를 다니긴 하였다. 플라톤 역시 공자나 맹자의 경우와 다르지 않았으며 결과도 다르지 않았다. 현대의 유세는 기술에 불과하지만 과거의 유세는 정신이고 신념이었던 듯) 이제 겨우 유세하던 어려운 시절이 걷히고 이제 막 강대한 제나라에서 한자리를 따내 살만해졌는데, 그래서 자나 깨나 늘 죄송스럽고 애틋했던 어머니, 그 장례를 죄송스런 마음에 좀 호사스럽게 치렀거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알 만한 사람이 이런 질문이라니?

나는 이 부분에서 제자됨이라는 생각 하나를 가지고 한참을 서성거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이것이 스승의 권위에 위압됨 없이 거침없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맹자사단(孟子師團)의 기풍(氣風). 구차하지만 정직한 다분히 맹자다운 정면 돌파. 참으로 인상적인 대목이다.(맹자의 변명이 어떠했는가는 직접 한 번 읽어보시길)

예전에 모 방송국에서 해주었던 검도대회 중계를 본 적이 있다. 실력이 비등한 고수끼리의 경기를 볼 때, 해설자의 설명이 없으면 도대체가 재미가 없었다. 그런데 실력차이가 조금 나는 선수끼리 맞붙는 예선전을 보자 해설자의 설명이 없어도 흥미롭기 그지없었다. 어떤 기술들이 들어가는지가 내 눈에도 보이기 때문이다. 두 선수간의 간격 혹은 격차가 현저하였던 탓이다.

공자가 제자들의 질문을 받으면 질문하는 제자의 그릇을 헤아려, 그릇마다 달리 가르쳐 주었다. 그건 간격 혹은 격차라는 것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다른 사람을 가르쳐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짐작하겠지만 지식이나 연륜의 차이가 현저했을 때, 가르침에 여유가 묻어나오게 되는 법이다. 공자가 제자를 다루는 방식에도 그런 간격 혹은 격차는 현저하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맹자는 어땠을까? 맹자는 제자의 질문조차 마치 칼을 마주 겨눈 적을 대하듯이 엄격하고 봐주는 법이 없다. 맹자가 낮다는 말이 아니라 공자가 너무 고원한 탓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가 수염을 잡고 재미있어하는 어여쁜 손자를 안고 헐헐거리는 할아버지 같다면 맹자는 사사건건 따지고 드는 동네 삼촌이나 엄격한 큰 형님 같다.

그래서일까? 공자가 죽자 삼년상을 치르고도 부족해서 제자 중, 공자를 닮은 사람(有子)을 골라 선생님이 살아계실 때처럼 모시자는 말까지 서슴없이 논의된다. 이 부분은 이해할 수 있다. 공자라는 대체불가능한 중심이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조직의 선택은 한정되어진다. 이대로 맥없이 각자의 고향으로 뿔뿔이 흩어져버릴 것인가? 아니면 다시 중심을 만들어야 하는가?

여기 두 갈래 선택에는 하나씩 고려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흩어진다면 그간 쌓아올린 명성은 곧 허물어져 버릴 것이다. 공문(孔門)이라는 졸업장 역시 값이 후려쳐질 터이다. 그렇다고 다시 중심을 세운다? 이건 정신(精神)과 종교(宗敎)와의 갈림길인 것이다. 

昔者孔子沒, 三年之外, 門人治任將歸, 入揖於子貢相嚮而哭, 皆失聲然後歸. 子貢反築室於場 獨居三年然後歸. 他日子夏子張子游 以有若似聖人 欲以所事孔子事之 彊曾子, 曾子 曰; 不可. 江漢以濯之, 秋陽以暴之. 皜皜乎不可尙己.
예전에 공자께서 돌아가시니 3 년 후에 문인이 맡은 일을 다스리고 돌아가려 할 때에 (중략) 다른 날에 자하와 자장과 자유가 유약이 스승의 모습과 비슷하니 스승을 섬기던 것과 같이 그를 섬기고자하여 증자에게 강권하니, 증자가 '불가하다. 스승님이 풍모는 마치 양자강과 한수의 물로 깨끗이 씻어 가을볕에 말린 것처럼 희디희니 거기에다 무엇을 더하겠는가?'라고 했다. (公孫丑 章句 下)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왜 공자 다음에 증자(曾子)가 되는지 의아했었다. 江漢以濯之, 秋陽以暴之, 皜皜乎不可尙己(가을 햇볕 좋은 날, 흰 빨래를 널어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이불이라도 널어본 적이 있는가. 그 상쾌함을 아는가?) 그 무엇으로도 스승의 풍모를 대신할 수는 없다는 이 대목에서, 증자가 그런 분분한 논의들을 단숨에 잠재워버리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가 왜 공자 다음인지 이해가 되었다. 아 증자의 제자됨이여.

증자는 이 학문(斯文)은 종교(宗敎)가 아니라 정신(精神)이 되어야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것이 스승의 뜻이었음을 제자는 심득(心得)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연유에서일까? 이런 절절한 그리움과 스승의 부재의 허망함을 불러일으키는 공자와 달리 맹자의 뒤에는 기억나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스승 되기 어려움이여. 제자 되기 어려움이여.   


태그:#공자, #맹자, #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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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아들이며 누구들의 아빠. 학생이면서 가르치는 사람. 걷다가 생각하고 다시 걷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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