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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제자 만장(萬章)이 스승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을 광사(狂士)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스승은 질문을 미리 예상하고 기다린 듯싶고 제자는 스승이 의도하는 대로 질문해가며 문답을 이어간다(아무래도 이 대목에서는 스승과 제자가 미리 짜고 치는 듯한 냄새가 난다. 좋게 말하자면 약속대련, 느낌 그대로 말하자면 짜고 치는 고스톱). 스승은 예상하고 기다린 만큼 주저 없이 광사(狂士)라고 분류할 수 있는 인물들의 실명(實名)을 콕콕 집어가며 까발려버린다. 금장(琴張), 증석(曾晳), 그리고 목피(牧皮).

 

우선 목피(牧皮)란 인물은 미상(未詳), 누군지 자세하지 않다는 것이다. 금장(琴張)은 자장(子張). 이 인물은 알다시피 『논어』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 앞에서 살펴본 대로 공자 이후를 기획하려했던 인물 중 하나이고, 『논어』에 자장(子張)편이 따로 있을 정도로 비중이 만만찮은 인물이다.

 

증석(曾晳)? 이미 설명한대로 증자(曾子)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그다지 볼륨감이 없던 사람이다. 『논어』 <선진先進>에서 살펴본 대로 어느 순간 갑자기 등장하여 다짜고짜 고원(高遠)한 경지로 스승 공자의 감탄을 자아내고는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인물. 그리고 다시 『맹자』에서 전혀 다른 이미지로 아주 잠깐 등장하였다가 전과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인물(이렇기에 불순한 편집을 의심해 볼만하다고 지적하였었다. 누군가 이 부분을 나중에 살짝 끼워 넣은 것이 아닌지. 왜? 유가(儒家)의 종통(宗統)인 증자(曾子)의 아버지가 되므로).

 

거북한 내용이면 에둘러 돌아가는 것이 이 바닥의 생리(生理)이건만 맹자는 광사(狂士)라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을 일일이 실명으로 지목해버렸다. 단단히 별렀던 모양이다. 그러자 이제 다급해지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정통(正統)의 훼손을 방기(放棄)할 수 없는 사람들. 공문(孔門)의 후예들은 이 부분에서 진땀깨나 뺏나보다. 곳곳에 당혹감이 묻어난다.

 

자, 이제 어쩔 것인가? 방법은 우선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딱 잡아떼거나 아니면 순순히 과오를 인정하는 것. 우선 첫 째는 이미 불가능하다. 자장(子張)의 경우 『장자』에, 증석(曾晳)의 경우 『예기』 <단궁>편에 상갓집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있어서 잡아떼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 그렇다고 과오를 그대로 인정해버린다? 그러나 그는 증자(曾子)의 아버지. 상갓집에서 노래를 불러 젖히든 무슨 더한 짓을 했던지 간에 그의 아들이 증자(曾子)라는 사실은 어쩔 것인가?

 

맹자의 거침없는 융단폭격에 고립된 증자(曾子)의 아버지,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증석(曾晳)을 구해내야만 한다. 영민한 공문의 후예들은 이 대목에서 머리를 맞대고 목하(目下) 숙의 중. 물론 작전명은 '증석(曾晳)일병 구하기'가 되겠다. 난상토론 끝에 나온 결론 두 가지. 첫째, 본질을 최대한 흐려놓는다. 두 번째 차별화.

 

본질을 흐려놓으려는 이유는 딱 하나, 문제되는 사안이 최대한 주목받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본질 흐리기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가. 우선 맹자가 증석(曾晳)을 광사(狂士)라고 선언한 부분에 대한 주석(註釋)에 이런 대목을 달았다. "비록 다 그렇지는 않다고 해도 요컨대 반드시 비슷한 것이 있다(雖未必盡然,要必有近似者)." 이건 무슨 말인가? 문장 앞뒤를 살펴보아도 이 말은 앞뒤 맥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마치 누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억지로 이 짧은 문장을 끼워 넣은 것 같다는 추론까지 가능하다. 이런 생뚱맞은 문장이 의도하는 바? 당연히 본질 흐리기가 되겠다. 얼마 전, 대한민국에서도 이와 똑같은 시도가 행해진 바가 있었는데 기억하시겠는가?

 

비록 다 그렇지는 않다고 해도 요컨대 반드시 비슷한 것이 있다. Vs 위조지폐임이 분명하나 화폐로서의 효력은 없다고 할 수 없다.

이 대목의 앞뒤를 살펴보면 우선 자장이 상갓집 안으로 들어가서 노래하였고 이 일은 장자에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는 바로 위의 알쏭달쏭한 대목이 나오고, 바로 이어서 증석이 상갓집에 간 일이 나온다. 앞뒤가 모두 사실에 대한 기록인데, 이 부분만 누군가의 주관이 개입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을 보면, 사실에 대한 표현이 모호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광사(狂士)의 기질이 있긴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한동안 나라를 온통 뒤집어 놓았던 판결 하나에 대한 조롱 중에 이런 패러디가 있었다.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 "위조지폐임이 분명하나 화폐로서의 효력은 없다고 할 수 없다." 이하는 진중권씨의 패러디. "강간은 했지만 임신은 유효하다.", "시험은 대리지만 합격은 유효하다.", "오프사이트지만, 골은 유효하다.",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 뭐 그런 말이지 않나 싶다.

 

테스크포스팀은 일단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문제의 본질은 살짝 흐려졌다고 판단한다. 이제 두 번째 단계, 차별화. 차별화에는 비교대상이 필요하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인물인 자장(子張) 역시 공문(孔門)에서 보면 아까운 인물이다. 그러나 이제 증석(曾晳)을 구하기 위해 자장(子張)은 눈물을 머금고 포기하기로 한다. 사실 『논어』에서 자장(子張)의 말을 가만히 읽다보면 약간 관념적인 언사(言辭)를 즐겨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따라서 차별화에 적당한 인물이 되는 것이다.

 

자장(子張)은 친구의 상(喪)에 임(臨)해서 노래를 했다고 했으니 상갓집 안으로 들어간 모양이고 증석(曾晳)은 상갓집에 가긴 갔지만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만 문밖에서 기대어 노래를 한 것(琴張臨其喪而歌 曾晳倚其門而歌)이다. 머리를 싸맸던 공문(孔門)의 후예들은 이런 두 사람의 기록에서 미세하지만 아주 현저한(?) 차이를 발견하고는 무릎을 탁 친다.

 

琴張臨其喪而歌/曾晳倚其門而歌
이 두 문장을 다시 세밀하게 쪼개보자. 금장은 임(臨)했다. 어디에? 그 상(喪)에. 동사의 연결을 나타내는 이(而)가 있으므로 임해서 뭘 하였나? 노래를 했다. 마찬가지로 증석은 기대었다. 어디에? 그 문에. 동사의 연결을 나타내는 이(而)가 있으므로 기대서 무엇을 하였나? 노래를 하였다. 품사별로 쪼개보면 琴張 臨 其喪 而 歌, 그리고 曾晳 倚 其門 而 歌. 완전히 같은 문장이다. 참고로 말 이을 이(而)자는 한문문장에서 그 쓰임새가 무궁무진하다. 이(而)가 쓰이면 일단 순접(順接)인지 역접(逆接)인지를 살피고 주의할 것은 이(而)가 나오면 경험상 문장 앞뒤로 댓구가 숨어있는 경우가 매우 많다는 것이다. 참고로 써 이(以)가 가끔 말 이을 이(而)자와 같이 쓰이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도.

 

주석(註釋), 아니 영민한 공문(孔門)의 후예들은 차별화를 통해 자장(子張)을 버리고 증자(曾子)의 아버지를 구해내기로 한다. 말하자면 자장(子張)이라는 인물은 아무런 개념 없이 상갓집 안으로 들어가 노래를 한 것이고, 증자(曾子)의 아버지는 그래도 저어하는 그 무엇이 있어서 문밖, 문에 기대서 노래를 한 것이니, 두 사람 모두 상갓집에서 노래를 한 것은 맞지만 그나마 증석(曾晳)이 자장(子張)에 비해 좀 낫다는 것이다. 이러면 아주 현저한(?) 차이가 되지 않는가? 그 바람에 『논어』에서 제법 한칼 하던 자장(子張)이 여기 『맹자』 주석(註釋)에서는 형편없이 내팽개쳐지고 마는 것이다(역시 아들은 잘 두고 볼일인가?).

 

이런 방식, 원문(原文)에 보충해서 주석(註釋)을 달았는데 보충이 어쩐지 원문(原文)을 넘어 억측(臆測)이나 예단(豫斷) 등이 돼 버릴 때 느껴지는 당혹감 때문에 주석(註釋)은 읽지 말라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주석까지 하나하나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더 많은 상상과 재미는 원문과 주석의 격차가 크면 클수록 쉽기 눈에 띄기 때문이다.

 

각설(却說)하고, 이 부분에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상상 한 토막. 만약에, 정말 만약에 한 성질 하시던 맹자가 누구는 집안으로 들어갔고 누구는 문에 기대섰을 뿐이니 하는 이런 한심한 후대의 주석(註釋)을 보았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힌트? 『맹자』 양혜왕 상편 첫 번째 장을 보시라.


태그:#증석 , #맹자, #진보신당 노회찬, #진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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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아들이며 누구들의 아빠. 학생이면서 가르치는 사람. 걷다가 생각하고 다시 걷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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