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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개표방송이 그 어떤 쇼 프로그램보다 재미있고, 그 무슨 스포츠 경기보다 박진감 넘치는 한 편의 드라마인가를 보여주었다. 개표가 시작된 후 밤을 꼬박 새우고 환하게 동이 튼 아침까지 결과를 예측하지 못해 '유력'이라는 표현조차 아낀 선거는 내 생애 처음이다.

 

민심은 언론사들마다 선거 직전까지 떠들어댄 여론조사 결과를 철저히 조롱했고, 정치인은 물론 여론조사 전문가들조차 뜨악하게 만들 정도로 이변이 속출했다. '당 공천만 받으면 작대기를 꽂아도 당선'이라는 지역구도가 흔들리고, '폐족'으로 내몰린 친노 세력이 당당하게 부활한 것은 분명 역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이변이라면, 진보 성향의 무명 신인들이 현직 교육감을 밀어내고 대거 당선된 이번 교육감 선거의 결과는 차라리 '기적'이다. 교육행정의 성격상 보수적인 성향이 보편적인데다, 지방자치단체장의 경우에 견줘 현직 프리미엄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수시로 언론에 노출되는 것은 기본이고, 가정통신문 등을 통해 수많은 학부모, 곧 유권자들과 만날 수 있고, 관내 모든 교육기관에 배포되는 홍보물을 통해 근황과 업적이 실리는 건 현직의 엄청난 특혜다. 보름도 채 안 되는 선거운동 기간에 공약과 함께 얼굴과 이름을 알려야 하는 다급한 도전자들에게는 결코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으로 여겨질 정도다.

 

어떻든 이번 선거 결과는 경쟁지상주의에 매몰된 우리 교육 현실에 대해 불만이 얼마나 큰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더욱이 광주광역시와 강원도에서는 전교조 지부장 출신임을 약력에 당당히 밝힌 후보가 적지 않은 표차로 교육감에 당선된 것은 현 정부의 교육 정책에 대한 사망 선고와 다름 아니다. 기실 현 정부와 기존의 보수적인 교육계는 지금껏 전교조를 '빨갱이'로 낙인찍어 왔으니, 그들을 선택한 민심을 향해서도 그렇게 매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진보 성향 교육감의 대거 등장을 통해 보듯, 우리 국민들은 현 정부의 교육제도를 '빨갱이'보다 훨씬 더 무서워했던 것이다. 세간의 예측대로 무한경쟁의 줄 세우기로 대표되는 현행 교육제도에 적지 않은 변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선거 전부터 상당 부분 공감대가 형성된 무상급식 문제는 그렇다 해도, 당장 전교조 교사의 무더기 파면, 해임 사태부터 전국 단위 일제고사 실시, 학교별 성적 공개 등 현 정부의 교육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할 부분이 한둘 아니다.

 

또, 공약에도 밝혔듯이 고교평준화 체제의 유지, 혁신학교를 통한 학교 개혁 등을 무리 없이 추진하기 위해 반대 세력을 설득해야 할 과제도 만만치 않고, 이번 선거 결과를 두고 자칫 양극단으로 치달을지도 모르는 교육 현장의 갈등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일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그러자면 냉정해져야 한다. 누구 말마따나 '진보 교육감은 당선이 최고의 업적'이라는 승리의 환호를 접고, 바로 지금부터 공약을 실천할 치밀한 전략을 짜야 한다. 실천을 통해 지지해준 유권자들의 가슴에 깊이 와 닿아야 비로소 공약일 수 있다. 그들에게 끝 모를 경쟁과 고통을 안겨준 우리 교육이 희망일 수 있다는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번 선거 결과는 분명 '기적'이지만, 거칠게 말해서 고작 지역 교육계의 수장만 교체되었을 뿐이다. 불과 선거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기존의 교육정책을 직간접적으로 옹호하고 앞 다퉈 홍보했던 '영혼 없는' 교육 관료들은 그대로 남았다. 그들은 지금껏 그래왔듯 아무렇지도 않게 새로운 '주군'을 모시며 전가의 보도처럼 우리 교육을 개혁하자며 떠들어 댈 것이다.

 

그들은 우리 교육을 실질적으로 좌지우지해온 관료집단이다. 주지하다시피 특성상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그들을 두고 우리 사회가 '교육 마피아'라고 악평해온 것도 그래서다. 교육감 한 명이 아무리 개혁적이라고 한들 그들의 광범위한 인맥과 농익은 경륜을 이겨내지 못하면 당선 자체가 진보라는 이름을 더럽히는 부메랑이 될 게 뻔하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포위될까 두렵다.

 

그렇다고 현 정부가 보여준 방식대로, 살생부 펼쳐놓고 인사권을 이용해 막무가내로 잘라내는 건 치졸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영혼 없는 그들을 설득해 변화와 개혁에 동참하도록 설득하는 것이야말로 교육계 전체의 수장이기에 앞서 한 조직의 리더로서 우선 필요한 자질이기 때문이다.

 

거리로만 나돌던 진보 성향의 인사들이 드디어 교육감이 됐다. 실천할 힘이 없어 목민'심(心)'서만 써내려가야 했던 백면서생과 거리의 투사가 끝내 권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오매불망하던 자리에 올랐으니 과연 그들이 꿈꾸는 개혁이 완수될 수 있을까. 일단 뽑아줬으니 우리는 할 일 다 했다며 그날이 오길 기다리만 하면 되는 것일까.

 

소중한 한 표를 주었다고 해서 그들에게 교육개혁을 완수할 책임을 온전히 떠안겨서는 안 된다. 기실 투표라는 행위는 그들과 가치를 공유한다는 뜻이며, 나아가 공동운명체라는 인식으로 그들이 공약을 실천하는 데에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의사 표시이다.

 

그러하기에 그들을 지지한 유권자라면 마땅히 임기 중 공약 이행 과정을 눈 부릅뜨고 감시해야 하고 엇나갈 때는 가차 없이 비판해야 하며, 무턱대고 반대만 일삼는 일부 세력들의 퇴행적인 공격에는 앞장서서 방패가 돼주어야 한다. 만약 투표만으로 할 일 다 했다며 '평론'만 늘어놓는 사람이라면 단언컨대 지지자의 자격이 없다.

 

사족 하나. 이번 교육감 선거 결과는 전교조가 비판을 위한 비판만 한다거나 학교를 이념교육의 장으로 변질시킨다는 세간의 평가를 보란 듯이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기실 그러한 악평은 기득권 세력이 눈엣가시인 '아웃사이더'에게 줄기차게 덮어씌운 레퍼토리이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주장을 관철시켜 볼 기회조차 없었던 '거리의 교육자'들이 판을 새롭게 짤 수 있는 권력을 얻은 것이다. 현 정부의 탄압과 일부 여론의 뭇매가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 언론에 의해 왜곡된 것이라는 사실을 임기 내에 증명해 보여야 한다. 험한 풍파 견뎌온 '참교육'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또렷하게 보여줘야 한다.

 

어쩌면 이번 선거는 지난 1999년 전교조가 합법화됐을 때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사적인 순간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http://blog.naver.com/myhb0211)에도 실었습니다.


태그:#6.2지방선거, #교육감선거, #진보교육감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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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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