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로 두 정거장, 민둥산역이나 사북역이나 다 정선군 소재니 지척이다. 십 분도 안 걸려 사북역에 내린다.
사북역에서 강원랜드까지는 차로 5분 정도 거리지만 보행자 도로가 없고 워낙 산꼭대기에 위치해 있어 걸어가는 건 무리다. 역에서 조금 내려가면 보이는 랜드모텔 앞 버스정류장에서 한 시간에 한 번 운행하는 셔틀버스가 있다. 열차 시간에 얼추 맞춰 운행하는 모양이다. 그걸 타기로 한다.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드대출' '○○ 전당사' '차 맡아 드립니다' '신속 대출' '명품 고가 매입'…. 아무리 알록달록한 간판과 전광판 불빛들이 번쩍거려도 을씨년스런 공기를 가리지 못한다.
'카드대출'이라 함은 '카드깡'이 아닌가? 그럼 불법이 아닌가? 그런데 저렇게 버젓이 간판을 내걸어도 되나? 이 동네에선 괜찮은 건가? 어수선한 생각들을 눌러 담으며 셔틀버스에 올랐다.
'카드깡 해드립니다' 버젓이 간판 내걸고 영업?마침내 카지노가 있는 강원랜드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입구에는 은행들이 여럿, 영업 중이다. 고객들이 편리하게 돈을 찾아 얼마든지 베팅할 수 있게 한 배려(?)가 눈물겹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내국인이 출입할 수 있는 카지노인 강원랜드. 이곳에 대해서 워낙 많은 말들이 있었던 터라 몸가짐이 조심스럽다. 광산이 문을 닫고 할 일이 없는 지역민들이 도박에 중독돼 집을 날리는 일이 허다하댔다. 그러고는 다른 데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라 이 일대에서 노숙을 하다 돈만 생기면 다시 도박을 한다. 끝없이 '잭팟'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외지인이라고 늘 돈을 따는 건 아닐 터. 사북역에서 근무하다 민둥산역으로 온 지 얼마 안 되셨다는 역무원께 기가 막힌 사연들을 전해 들었다.
돈을 다 날렸다며 집에 가는 기차표를 그냥 달라고 생떼 쓰는 사람, 칩을 가져와서 돈으로 바꿔 달라는 사람("이거 만 원짜리 칩인데, 9천 원만 줘"), 무작정 돈 좀 달라는 사람, 괜한 화풀이를 죄 없는 역무원들에게 해대는 사람. 사북역에 발령받는 여직원들은 꼭 한 번씩 눈물을 빼고 만단다.
어찌됐든 강원랜드는 내 상상처럼 칙칙하진 않았다. 고급 리조트 호텔답게 깔끔하게 정비된 시설과 환히 밝힌 불빛. 여러 언론사에서 르포했던 것과 같은 어둠은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로 개장한 지 8년이 지난 지금 강원랜드의 부작용은 전처럼 심하지 않다. 지역주민은 매월 넷째주 화요일, 한 달에 한 번만 출입할 수 있도록 한 규제책 덕분이기도 하고 이제 많은 이들이 카지노에 무뎌지고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끈적하게 잔존하는 어두움에 대해서, 나는 아마 두려움에 고개를 돌려 버렸는지도 모른다.
분수쇼를 먼저 보러 갔다. 8월 말까지 매일 오후 8시 30분과 9시 30분에 호수공원에서 멀티미디어 음악분수쇼를 한다. 호수공원에 가려면 호텔 입구로 들어가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야 한다. 화려한 카지노 호텔 내관을 두리번거리며 이동했다.
"분수쇼? 그래봤자 물이지, 별 거 있겠어?"애초에 분수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민둥산역 역무원 분들은 "8시 반에 하는 음악분수쇼를 보고, 입장료 5천 원을 내고 카지노 영업장에 들어가 구경을 한 다음 무료로 제공되는 음료수를 5천 원어치 먹고 나오라"고 추천해 주었지만, 나는 반드시 게임을 해보리라 작정한 참이다.
준비한 판돈은 삼만 원. '타짜'들에게는 우스운 금액이지만 가난한 여행자에겐 크다. 점당 백 원씩 걸고 식구들끼리 고스톱을 쳐도 별로 따지 못하는 나이기에 '대박'을 노린 건 아니었지만 신선하고 새로운 경험이 된다면 그 정도 투자는 해볼 수 있지 싶었다.
'악마의 성'으로, 어른·아이 모두 유혹하는 음악분수쇼
음악분수쇼는 생각 외로 정말 화려했다. 그 규모도 상당해서 똑딱이 카메라로는 한 화면에 다 잡히지 않는 지경이다. 자세히 들어보니 무슨 스토리가 있는 모양이라, 번쩍이는 물줄기 위로 악마의 얼굴이 그려졌다 사라지고, 또다른 홀로그램이 보였다가 사라지곤 한다. 형형색색의 물줄기가 웅장한 음악소리와 함께 번쩍번쩍 한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연신 탄성을 질러 댄다. 캠프를 왔는지 단체복 조끼를 입고 있는 어린 아이들은 아예 물에 발을 담그고 첨벙거리며 논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에 머리가 다 젖어도 마냥 신난다고 방방 뛴다.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니 '강원랜드=카지노=어른들만의 공간'이라는 내 머릿속 공식이 와장창 깨어진다.
철저한 검문검색, 나 지금 비행기 타?한 여름밤의 꿈만 같은 분수쇼가 끝나고, 우리 일행은 "진짜 신기하다!"를 연발 조잘대며 헤 벌어진 입으로 카지노로 향했다. 신분증을 내고 입장권을 끊었다. 술집이나 영화관에서 하는 형식적인 '민증 검사'가 아니라 입장권에 주민등록번호가 인쇄되어 나올 정도로 신분 확인이 철저하다. 누군가 나의 신분증을 자세히 들여다볼 때면 늘 지은 죄 없이 주눅이 든다. 입장료 5천 원은 전액 세금으로 납부된다
(개별소비세 3500원/교육세 1050원/부가세 450원).
카지노 객장에 들어갈 때는 더했다. 공항에나 있는, 공항 외에는 수능시험 고사장에서나 만나 봤던 금속탐지기가 있었다. 모자, 선글라스도 착용할 수 없다. 물이나 음료수도 가지고 들어가면 안 된다. 카메라는 지급해주는 비닐에 밀봉하고 절대로 꺼내면 안 된다. 각각 사기도박, 마약 반입, 고객신변보호를 위한 조치임을 이해하기 때문에 순순히 지시에 따랐다. 그나저나 고객신변보호라는 말은, 카지노 게이밍이 뭔가 음습하다는 느낌을 반증하는 표현인지라 좀 우습다.
시간을 잊는 곳 강원랜드, 밤새도록 베팅! 또 베팅!영화 <퍼시잭슨과 번개도둑>에서 퍼시 일행은 지하의 신 하데스를 만나기 위한 구슬을 찾아 라스베이거스에 이르게 된다. 한시가 급한 과업이지만 금세 카지노 게이밍에 빠져버린 퍼시는 밤과 낮을 잊고 도박에 매달린다. 퍼시가 정신을 차리게 된 계기는 어느 도박 중독자와의 대화. "지금? 당연히 1977년이지"라는 소년의 말에 정신이 번뜩 든 퍼시는 친구들을 데리고 카지노를 빠져 나온다. 잠깐 꿈을 꾼 듯한데 순식간에 일주일이 지나가 있었다.
강원랜드는 정말 신기한 곳이다. 직접 카지노에 와보니 시간을 잊었던 퍼시 잭슨의 마음도, 사람들이 왜 도박을 하는지도 이해가 된다. 구경만 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겠는데, 직접 게임을 하면 오죽 할까. 밤 9시경에 입장한 내 입장권에 찍힌 번호는 7168. 사람들은 계속해서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강원랜드는 아침 10시에 문을 열고 새벽 6시에 닫는데, 적어도 하루에 1만 명 이상은 입장한다는 짐작이 가능하다. 5천 원에 1만 명, 하룻밤에 내는 세금만 5천 만 원이 넘는다는 얘기다.
카지노의 게임은 딜러가 진행하는 테이블 게임과 기계에 돈을 넣고 하는 머신 게임으로 구분된다. 테이블 게임은 블랙잭, 바카라, 포커, 룰렛 등이 있고 머신 게임에는 다양한 종류의 슬롯 머신들이 있다.
입장하기 전에 입구의 포토존에서 게임 설명을 들었다. 그런데 의외로, 게임들이 하나같이 단순하다. 블랙잭이나 바카라는 카드를 사용하고 영어로 된 표현을 쓰니까 좀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어려울 것이 없고, 게임판 위에 칩을 올려놓기만 하면 베팅이 되는 룰렛의 경우는 '짤짤이'나 '홀짝'과 다를 게 뭐냐는 생각마저 든다.
플레이어는 숫자나 홀짝 여부, 색깔 등에 칩을 베팅하고 딜러가 룰렛을 돌려 공이 멈춘 자리의 숫자에 따라서 칩을 배당받는다. 손 안의 동전을 흔들어서 앞면인지 뒷면인지 맞추는 놀이와 기본 원리는 똑같은 것이다. 하기사, 가장 단순한 게임이 가장 유혹적이라는 것은 진리다. 아이온이나 스타크래프트도 재미있지만 진짜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건 테트리스다.
오만원권 수십 장이 플라스틱으로 변하는 순간여러 테이블을 기웃거려봤지만 도저히 게임에 참여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룰에 따르면 1천 원부터 베팅이 가능하지만 그런 좀생이 게임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최대 베팅 액수가 큰 테이블에 사람이 더 많았다.
만원짜리도 잘 안 보이고 거의 다 오만원권 지폐들이다. 한 중년 아줌마가 오만원 권 수십 장을 테이블 위에 던지며 딜러에게 환전을 요구한다. 규칙상 손에서 손으로 돈을 주고받으면 안 되고 반드시 테이블 위에서 거래가 이루어져야 한단다. 딜러는 한 손을 들고 '머니 체인지'라고 말한 뒤 테이블 위에 난 지폐구멍에 돈을 깊이 찔러넣고 칩을 한 무더기 세어 준다. 수백 만 원에 달하는 현찰이 얄팍한 플라스틱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돈을 가지고 있다고 다 게임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평일임에도 테이블은 모두 꽉 차 있어서 파고들 여지조차 없다. 다음날 낮에 다시 와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테이블 예약도 받는 모양인데 대기자가 수백 명씩 된다. 최대 베팅 액수가 가장 큰 테이블은 더 이상 예약도 안 들어갈 지경이다.
객장 안에 공지된 규정에 의하면 바카라는 두 시간에 십 분, 블랙잭은 셔플 시작 후 십 분 동안만 휴식을 취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테이블을 포기한 걸로 간주한다. 게임 참여가 이렇게 어려우니 다들 폐인이 될 수 밖에. 잠깐 일어나서 화장실 가고, 담배 한 대 피고는 재빨리 테이블로 돌아온다. 요즘은 규제가 심하고 어느 정도 카지노 이용문화라는 게 정착해서 덜하지만 강원랜드 개장 초기에는 좌석 거래도 횡행했다고 한다.
직접 게임에 참여하지 못 하는 사람도 베팅은 할 수 있다. 어떤 아저씨의 패에 다른 아주머니가 칩을 거는 걸 보고 처음엔 부부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테이블에 베팅하다가, 다리 아프면 여기 와서 하는 거예요." 내 옆자리에서 최대 베팅으로 연신 슬롯 머신 릴을 당겨 대던 아주머니의 말이다.
밤낮의 구분 없이 장시간 일해야 하는 딜러들의 표정도 피곤해 보인다. 불필요한 말은 아예 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카드를 늘어놓고 칩을 바꾸어 준다. 딜러도 플레이어도, 별다른 표정이 없다. 순식간에 천만 원을 잃어도 무덤덤하고 그만큼을 따고도 기쁜 내색을 하지 않는다. 포커 페이스란 이런 것인가? 별로 재미있어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슬롯 머신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들 귀찮다는 듯 '반복 베팅' 버튼만 눌러 댄다. 괴로운 노동인 양 지속하는 이걸 레저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 역시 머신 게임을 해 보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게임 설명을 읽던 기분은 곧 사라지고 무심하게 반복 베팅만 눌러대는 자신을 발견했다.
만 원을 넣고 한 번에 백 원씩 베팅해서 만 오천 원까지도 땄었지만, 손가락도 아프고 귀찮아서 1800원을 한꺼번에 베팅해 버렸더니 몇 번 만에 돈이 다 없어졌다. 머신 게임에서는 현금 외에 바우처를 이용하는데, 일부러 백 원을 남겨서 바우처를 기념으로 가져왔다.
레저와 도박의 기로에 선 카지노
2003년 정식 개장한 강원랜드 호텔 카지노는 '폐광지역 개발 지원에 관한 특별법', 약칭 폐광법에 의해 유치·설립된 것이다. 사북 탄광이 문을 닫고 경제적으로 낙후하자 폐광지역 발전을 위해 정부와 강원도가 주도해 벌인 대규모 사업이다.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에서 도박은 불법이지만 법 제11조항에 의거 이 지역에 한해서만 카지노업을 허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 폐광법은 2015년부로 시한이 종료된다. 그간 두 차례 기한이 연장되어 왔는데 또다시 연장될 수 있을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폐광법의 시효가 끝나면 폐광지역 외에 다른 시·도에도 내국인을 위한 카지노 개설이 가능해진다. 수도권에서 주말마다 카지노로 나들이가는 일이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카지노가 아예 일상화되어 건전한 레저의 하나로 자리잡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빠져들지만 않는다면, 조금 비싼 오락이긴 하지만 나쁠 것 없지 않겠나. 실제로 하이원리조트에 가족, 연인과 함께 휴가를 왔다가 겸사겸사 이곳에 들르는 이들도 있다. 그들의 표정은 '타짜'들과 달리 밝다. 그들에게는 분수쇼나 슬롯머신이나 똑같이 신기한 일상의 탈출일 뿐, 여기에 인생을 걸지 않기 때문이다. 휴가가 끝나면 그들은 호텔에서 체크아웃하고 본래의 삶터로 되돌아간다.
요즘 호주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일하러 가는 젊은이가 많다. 그런데 의외로 그곳에서 카지노에 빠져 힘들게 일해 번 돈을 다 날려 빚까지 지고 도망쳐 오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일본의 파친코처럼, 호주인들에게 카지노는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는 오락의 하나일 뿐. 돈을 벌든 잃든 어느 정도 즐기고 나면 그곳을 나온다. 그러나 아직 한국인에게 카지노는 도박. '한탕'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카지노에 대해서 우리는 좀 '쿨'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곳 정선 사람들은 강원랜드를 '악마의 성'이라고 부른다. 그 뜻은 중의적이다. 동화속에 나오는 악마가 사는 성처럼 워낙 산꼭대기에 위치해서 그렇게 부르는 것도 있고, 또 하나는…. 반짝이는 불빛 장식이 사그러든, 한낮의 루미나리에는 아름답지 않았다. 유혹하는 악마의 손가락 같은, 투박한 골조 덩어리에 불과하다.
덧붙이는 글 | 2010년 7월 22일과 23일에 여행한 기록입니다. 더 많은 사진과 정보는 기자의 블로그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