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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인 광한루원 서문의 경외상가에서 공설시장까지는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지만 아직껏 오일장을 여유있게 돌아본 기억이 없다. 지난 토요일은 마침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격주 토요 당번이라 혼자 근무를 해야 하는 날임에도 '장 구경', 특히 시골 전통 오일장의 유혹은 '참기 싫은' 것이어서 이날은 작정하고 나서기로 했다.

'잠시외출중' 걸어놓고 오일장에 가다

남원시 근교의 농촌은 물론, 인근 곡성, 구례 등지에서도 농사 지은 작믈을 지고 와 난전에 합류한다.
 남원시 근교의 농촌은 물론, 인근 곡성, 구례 등지에서도 농사 지은 작믈을 지고 와 난전에 합류한다.
ⓒ 김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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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출근해서 매장 문을 열자마자 출입문에 '잠시외출중' 푯말을 걸어놓고 과감히 근무지를 이탈하여 장터로 내쏘고 말았다.

지난 장날, 우연히 들렀다가 짠지를 사다 먹은 뒤 깊은 감회에 빠졌던 경험을 간직한 나는 오후에 늦게 갈 경우 혹시라도 짠지는 물론, 오일장에서 살 수 있는 각별한 물품들을 놓치게 될까 적잖이 걱정스러웠다. 달뜬 마음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이 지역에 살면서 이렇게 아침 무렵부터 장에 간 적은 처음인데, 갓 잡아 올린 물고기의 펄떡임과도 같은, 생생한 아침 장터의 충만한 기운을 내심 욕망했는지도 모른다.

과연 물건들을 푸지게 늘어놓고 판을 벌여놓아 사람들이 꼬이기 시작한 장터의 분위기는 기대했던 것처럼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포만감에 들떠서는 다소 흥분한 상태로 장터의 곳곳을 빠짐없이 둘러보기 시작했다.

전라북도 남원의 오일장(4일, 9일)
원래 남원시 천거동의 광한루원 주차장과 정문 일대에 조선시대부터 운영된 '성밖시장'이라는 큰 시장이었는데 1970년 시장에 화재가 나고 또 광한루원을 확장함에 따라 남원시 금동 262-1번지에 있는 상설 재래시장인 공설시장에서 열린다.

이는 남원 지역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으로, 전국 재래시장의 평균 면적보다 약 4배가 큰 규모인 대지면적 1만 7,463㎡, 건축 총면적 7,747㎡, 매장면적 5,259㎡에 이르며 8동의 건물에 점포 약 370개가 입주해 있다. 2002년 일부 건물을 재건축하는 등 시설 현대화 작업을 진행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 '남원공설시장'에서 인용)

남원공설시장의 유명한 먹을거리인 전통 순대국밥 말고도 의류·잡화·식품 등 거의 모든 품목을 취급하며, 지리산 약초·식도·목기류 등 남원의 특산품 등도 거래되는 남원의 오일장.

이곳에서 내 관심과 눈길과 발길을 잡아끄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시골 노인들이 직접 농사지어서 이고지고 나온 갖은 종류의 싱싱한 푸성귀들로 벌여놓은 좁디좁은 난전판이다.

배추와 열무, 호박, 가지, 오이, 고구마순, 호박잎, 쪽파, 토란줄기 외에 이맘때 시골 장 아니면 좀체로 보기 힘든 귀하신 몸, 양애(양하)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마트나 대형 수퍼 등에 가보면 요즘 채소가격이 얼마나 올랐는지 알 것이다.

잦은 비와 태풍의 영향으로 농산물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가벼운 지갑으로는 배추 한 포기 마음 놓고 사기도 버겁기만 하다. 그러나 남원 오일장의 물가는 채소 거래의 최소 단위인 한 단이나 한 묶음에 1천원, 2천원을 넘지 않는 '착한 가격' 그 자체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거래하는 매우 단순한 유통구조에 기인하지 않을까 짐작한다.

지역에서 농사지어 내온 푸성귀들 말고도 나의 애착은 시골 곳곳에서 유구히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의 재래 먹을거리나 전통식품에 거의 편집증에 가까운 애착을 갖고 있기도 하다.

길들여진 입맛, 익숙한 먹을거리로 확인하는 민족 정체성!

무짠지 네 개에 2천원을 주고 떨이했다.
 무짠지 네 개에 2천원을 주고 떨이했다.
ⓒ 김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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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조선사람, 한국사람인 나는 간혹 운 좋게(정말 운 좋게) 시골에서 만들어 나온 각종 발효식품이나 저장식품 등, 가공식품류를 만나기라도 하면 무조건 지갑을 열고 그것들을 사곤 한다.

가게 문까지 잠가 놓고 일찌감치 오일장엘 간 보람은 확실히 있었다. '월리'를 찾듯, 숨은그림찾기 하듯, 꼼꼼히 뒤진 끝에 장 구석 딱 두 군데에서 짠지장수와 오이지장수 할머니를 발굴(!)할 수 있었다.

짠지를 갖고 나온 할머니는 저온저장고에 보관했던 짠지를 아침에 나올 때 열댓 개쯤 갖고 왔는데, 펴놓자마자 다 팔리고 작은 것 네 개가 남았다며 떨이로 2천원에 전부 갖고 가라며 내 앞으로 봉지를 내밀었다.

나는 봉지에 짠지를 담으며 할머니 댁에 짠지가 얼마나 더 남았는지 여쭈었다. 다음 달 9일, 부안에서 열리는 천도교 환경운동 실천단체인 '한울살림연대' 모임에 갖고 갈 수 있을까 해서였다. 지난 번 짠지에 관한 나의 글을 본 한울살림연대 회원들이 자신들도 짠지가 먹고 싶다는 반응을 보인지라 갖고 가서 나누어 먹기 위해서이다.

다행히 할머니댁의 저온저장고에는 앞으로도 한동안 내다 팔 수 있는 만큼의 충분한 짠지가 남아있음을 확인하고 안심하였다.

짠지 말고도 같은 염장 발효음식인 오이지를 만날 수 있었다. 여름철 밥반찬으로 이 오이지 만한 것도 없다. 소금물을 팔팔 끓여 생오이에 그대로 붓고 독에 꼭꼭 눌러 담아 저장해야 하는데, 간단한 방법처럼 여겨지지만 실패없이 만들기가 그리 쉽지 않다.

소금의 농도를 잘 맞추지 않으면 오이가 뜨고 무르고 맛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매우 숙달된 선생님을 통해 비법을 전수 받거나 오랜 시간 시행착오를 각오하고 내공을 쌓아야만 짭쪼름하면서도 꼬들꼬들 맛있는 오이지의 달인이 될 수 있다. 

원래 오이지는 여름 장마철이 되기 전 장만하는 계절 절임음식이다. 입추가 지난 지 한 달이 다 되고 처서까지 지났건만 기상이변으로 여전히 늦더위가 수그러들 줄 모르는 지금, 더위에 지친 입맛을 달래기에도 적당하긴 하다. 짠지와 오이지를 사고 느긋한 마음으로 장을  둘러보면서 추가로 몇 가지 물품들을 더 샀다.

옥수수 수염. 역시 시골의 할머니가 직접 말려서 내온 것인데, 이물질이나 티끌 하나 없이 깔끔히 잘 말린 듯해 보이기에 현재 투병 중이신, 우리 시대의 어떤 양심 있는 지식인이며 실천가이신 선생님을 생각하며 선뜻 샀다. 개인적으로는 그 분을 잘 모르지만 우연히 옥수수 수염을 구하고 계신 사정을 알게 되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해서이다.

말린 도토리묵
 말린 도토리묵
ⓒ 김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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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진짜 시골에서만 구할 수 있는 귀한 식품인 말린 도토리묵도 한 봉지 샀다. 이름만 알았지,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것이라 아주머니께 요리법을 물었더니, 물에 불렸다가 기름 두른 팬에 넣고 장도 치고 물엿도 넣고 깨소금도 넣어 들들 볶아먹으면 된다고 해서 도전정신과 개척정신이 발동해서 5천원이나 하는 거금을 들여 샀다.

"고구마순 갖다 김치 담가 보가니? 내가 껍질 죄 깠당게로"
껍질을 말끔히 벗겨낸 고구마잎 줄기
 껍질을 말끔히 벗겨낸 고구마잎 줄기
ⓒ 김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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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장에도 역시 채소 난전판의 아주머니, 할머니들은 짠듯이 고구마순의 줄기를 까고 계셨다. 보통 가정에서 한 끼를 먹기 위해 고구마순 한 단 정도를 장만한다고 할 때, 그 정도를 일일이 손으로 까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건만 시장의 장사꾼들은 산더미만 하진 않더라도, 보통사람 같으면 충분히 질리고도 남을 만한 어마어마한 양의 고구마순 줄기를 저렇게들 종일 구부리고 앉아 까고 있는 걸 볼 때면 경이로운 기분까지 들곤 한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손놀림을 유심히 쳐다보자니 혀를 내두를 정도로 기술이 뛰어나다. 줄기의 끝을 한 손으로 잡고 다른 한 손의 엄지손톱을 이용해 껍질을 일거에 벗겨내는 솜씨 역시 달인의 경지에 이를 만하다. 게다가 그 빠른 손놀림으로 줄기 하나 벗겨내는데 3초도 안 걸리지 싶다.

세상에나, 지금이 어느 시댄데 비녀를 꽂아 쪽진 머리를 하고 앉아 고구마순 까기에 여념이 없던 한 할머니가 구경만 하는 나를 흘깃 올려다보며, "애기 어머이, 고구마순 갖다 김치 담가 보가니? 내가 껍질 죄 깠당게로" 하고 은근한 종용을 하자, 또 다시 홀린 듯 지갑을 열고 말았다.

매끈한 가래떡처럼 말끔하게 껍질을 깐 고구마순 한 단을 2천원에 샀다. 가격에 비해 단도 푸짐하고 내가 좋아하는 짚끈으로 묶은 점이 또한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근무시간을 도둑질해서 나온 장구경이 마냥 재미있기만 한 나는 이 정도 쯤에서 그만 발걸음을 돌려도 되겠다, 여기고는 서둘러 시장을 빠져나와 일터가 있는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떠나는 내 발목 또 잡은 아... 떡장수 아줌마!

쑥개피떡. 손으로 빚은 쫄깃한 맛의 오리지날 바람떡
 쑥개피떡. 손으로 빚은 쫄깃한 맛의 오리지날 바람떡
ⓒ 김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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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앗간의 기계로 뽑은 '영혼 없는 '떡'이 아닌 진짜 손으로 반죽을 치대고 주물러 꼼꼼히 빚은, 그야말로 옛날식 오리지널 떡장수의 손떡 앞에서 또 한 번 눈길, 발길을 뺏기고 말았다. 

내가 좋아하는 개피떡, 일명 바람떡이라고도 한다. 잔뜩 부푼 겉의 떡살을 한 입 베어물면 막상 속에는 팥앙금이 조금만 들어있어 피식, 바람이 새어나오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먹을 거리가 귀하던 어린 시절, 어머니 따라 장에 나가면 으레 어머니를 졸라 얻어먹곤 하던 떡장수의 손맛과 혼이 배인 진기 가득한 진짜 개피떡.

자기가 만든 넉넉한 떡살처럼 푸짐한 볼 살을 늘어뜨린 아주머니가 목판에 떡 반죽 그릇과 삶은 팥 새알심이 가득 담긴 그릇을 올려놓고 개피떡을 만들고 있었다. 적당한 크기로 반죽을 떼어 손으로 치대고 주물러 손바닥 같이 넓적하게 펴서는 대추알 크기만큼 새알심을 만든 삶은 팥을 속으로 넣고 주전자 뚜껑으로 모양을 찍어내자, 마술처럼 개피떡이 만들어졌다.

쑥을 넣은 쑥개피떡과 멥쌀로만 빚은 흰 개피떡은 참기름까지 발라 윤기가 자르르 했다. 두툼한 떡살에 찍힌 뚜껑 자국은 투박하면서도 고집스런 정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 요즘 방앗간에서 만들어낸 떡과는 감히 비교를 하지 말아야 하겠다.

손으로 치댄 떡반죽이 쫄깃쫄깃한 식감을 자랑함은 물론이요, 통팥을 직접 삶아 대충 으깨 살짝 설탕과 버무려 만든 속알심이 달큰하고 구수한 맛을 뽐낸다. 방앗간이나 시중에서 판매되는 떡들의 팥앙금이란 전부가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들어 깡통에 담겨 나온 것들이다. 이렇게 나온 팥앙금이 찐빵이나 찹쌀떡, 도너츠 등 각종 먹을거리에 무차별적으로 쓰이고 있다.

이를 두고 '손으로 직접 만드는 정성' 운운하며 한가롭게 고상을 떠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치가 되겠다. 유해한 각종 화학첨가물 가득한 '깡통의 비밀'을 생각하면 한없이 아찔해진다.

태생이 촌에서 나고 자란 촌사람이라 촌스럽게 생긴 데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사는 것도 촌스러운 것들만 좋아하며, 앞으로도 어찌하면 더욱 더 촌스럽게(사실 인류의 미래는 이 촌스런 삶에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살까를 화두처럼 고민하는 '촌스러움 지상주의자'인 내가, 촌에서 살며 촌에서 만나는 오일장에 구경 갔다가 촌스런 물건들을 잔뜩 샀길래, 사진으로라도 구경들 한 번 하시라 이렇게 글을 올린다.

참 고맙고 기특한 오일장으로 오세요

요란한 포장지와 바코드가 없는 시골 오일장의 물품들.
 요란한 포장지와 바코드가 없는 시골 오일장의 물품들.
ⓒ 김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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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 푸드란?
로컬 푸드란 장거리 운송을 거치지 않은 지역 농산물을 말하며, 흔히 반경 50㎞ 이내에서 생산된 것을 가리키는데, 농산물이 이동한 총거리를 따져야 한다.

목적지에 도착해 음식의 에너지로 제공되는 것보다 운송과정에서 수십 배나 더 많은 화석에너지를 소모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수익은 농산물을 재배하는 농민이 아니라 유통과 판매를 하는 이들에게 더 많이 집중된다.

로컬 푸드 운동

튀넨의 고립국이론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운송비는 거리가 멀수록 비싸진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이동거리를 가능한 한 줄임으로써 영양 및 신선도를 극대화하고자 하는 취지를 갖고 출발한 운동이 바로 '로컬푸드'(local food) 운동"이다.

한 마디로 로컬 푸드는 장거리 운송을 거치지 않은 "지역 농산물"을 말한다.

남원 오일장에서 내가 산 물품들이야말로
'자본이 찍은 낙인'과도 같은 바코드가 없는, 순결한 물품이며, 이 지역의 경제를 살리고, 지속가능한 순환경제를 구현하는 지산지소(地産地消), 진정한 '로컬푸드'가 아닐까 생각한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지구의 대양과 대륙을 건너오느라 버려진 연료와 에너지의 소비로부터도 절대 자유로운, 또 다른 의미에서 '친환경' 물품이며, 무엇보다 우리 조상 대대로 해 먹고 살아온 음식문화의 고유한 내력과 인간미 넘치고 정겹기 그지없는 탈 디지털 아날로그 세상의 문화 전통이 살아 숨 쉼을 확인시켜주는 참 고맙고 기특한 문화유산이 바로 오일장이 아닐까 한다.

남원에 오시면 광한루만 한바퀴 휘 둘러보고 가지 말고 걸어서 5분 이내 가까운 거리의 공설시장 오일장에 가 볼 것을 권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 카페<한울살림연대>와 <밝은마을>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남원오일장, #로컬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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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간에서 우리 시대의 삶에 공감하며 세상과 소통하고자 한다. 문화, 예술 분야에 특히 관심이 많고 미디어 컨텐츠의 창작에도 많은 관심 가지고 있다. 몇 군데 사회단체에서 우리 사는 세상이 더 살맛 나는 세상이 되게 하는 일에 조금씩 힘을 보태며 어울리며 나누며 살려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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