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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진(晉)나라에 양설씨 형제가 어느 날 반역의 누명을 쓰고 죽을 위험에 처했다가 옥에서 풀려났습니다. 석방됐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사면돼서 전의 벼슬도 다시 찾았습니다.

 

알고 보니 기해라고 하는 명망 높은 노대신이 그들의 억울함을 임금에게 설득한 때문이었습니다. 형은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감사 인사를 드리러 나섰지만 동생이 말렸습니다.

 

"그는 나라를 위해 우리 형제를 살린 것이지, 우리 형제를 위해 애쓴 것이 아닙니다. 뭣을 감사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형은 사람의 도리가 그렇지 않다고 여기고 기해의 집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노대신은 없고 아들만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임금을 뵈온 뒤 즉시 고향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이 집엔 들르지도 않으셨습니다."

 

형은 이 말을 듣고 자신의 지혜가 동생만 못함을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매정할 정도로 사적인 감정을 무시하는 기해의 인품에 탄복했습니다.

 

이렇게 공사의 구별이 엄격한 기해 옹이 조정에서 물러날 때 일입니다. 임금과 기해가 나눈 대화입니다.

 

"그럼 지금까지 경이 맡아보던 자리를 누구에게 맡겨야 하나."

"해호가 가장 적임자입니다."

"해호는 경의 원수가 아닌가. 경은 어째서 자기 원수를 과인에게 천거하는가."

"전하께서는 신에게 적임자를 물으셨을 뿐이지 신의 원수를 묻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해호가 기해의 후임자가 됐습니다. 그러나 해호는 얼마가지 않아 죽고 그 자리가 다시 공석이 됐습니다. 임금이 다시 기해에게 후임자에 대한 자문을 구했습니다.

 

"해호가 죽었으니 또 다른 사람은 없는가."

"이제 그 자리를 맡을 사람은 기오 밖에 없습니다."

"기오는 바로 경의 아들이 아닌가."

"전하께서는 신에게 적임자를 물으셨을 뿐이지 신의 자식에 대해선 묻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기오가 아버지 기해의 후임자가 됐습니다.

 

이 대화를 나눈 임금이 진도공으로, 춘추시대 최강대국 진나라의 마지막 영특한 임금으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진도공 시대 진나라는 인재를 능력 위주로 등용한 덕택에 예전의 패업을 중흥시킬 수 있었습니다.

 

만약, 기해가 원수의 아들과 자신의 아들 둘을 놓고, 임금에게 추천하는 순서를 바꿨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임금은 자기 아들부터 추천하는 말을 뿌리치고 보란 듯이 원수의 아들을 임명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설령 원수의 아들이 일찍 죽었어도 기해의 아들은 두 번 다시 기회를 잡지 못했을 겁니다.

 

신뢰의 힘이 이와 같습니다. 임금이 알 정도로 소문난 자신의 원수라고 해도 나라 일을 앞세우는 인품이 먼저 증명됐기 때문에 자기 아들을 감히 추천할 수 있는 힘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뢰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식들을 좋은 자리에 쓰려고 할 때 생깁니다. 같이 일할 아랫사람들의 신망을 얻지도 못하고 윗사람이 어떤 절차로 데려다 쓴 거냐고 추궁했을 때 할 말이 없으면 생각을 접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려서 안 되는 일을 억지로 하려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절차를 편법으로 속이는 것뿐입니다.

 

앞의 고사에서는 기해가 원수의 아들과 자신의 아들을 추천할 때 쓴 논리가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추천할 때라고 해서 구차한 말 몇 마디 덧붙인 것이 없습니다.

 

혹시 지금 자기 아들딸들을 추천하려는 분들, 남의 자식 추천할 때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이라도 남의 자식 추천할 때 안 쓰던 미사여구가 한 줄이라도 들어가 있다면, 그것은 내 자식이 사실 함량이 안 된다는 사실이 무의식으로 표출된 것일 수 있습니다.


태그:#기해, #춘추시대, #진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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