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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절 많고 파란만장했던 3년간의 망명수용소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방랑자 되어 이리저리 노닐다가 천우신조(?)로 독일 남부의 자그마한 강변도시에 가까스로 정착했다.
갈 곳 없는 국제나그네! 정착은 하였지만 사랑하는 어머니도,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며 어찌 살아갈 것인가. 독일은 합법적으로 체류허가가 난 사람에게는 직업이 없더라도 최소한의 생계비는 보장해 주는 나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까지 출소 직후 딱 한 번 700마르크(유로화 되기 전의 독일 화폐, 대략 1마르크는 0.4유로)를 사회보장청으로부터 받았을 뿐이다. 내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를 각오하고 독일정부의 도움(?)을 사양한 이유는 이렇다.
나는 망명여부를 결정짓는 최종 재판에서 독일검찰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재판장에게 정식으로 망명철회를 요청하고 한국으로의 송환절차를 즉시 밟아줄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몇 번의 산회 끝에 재판장은 나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묵살(?)하고 강제하다시피 나에게 망명허가 판결을 내려 버렸다.(자세한 내용은 오래 전에 열린사회희망연대 의장이었던 마산의 김영만 선생이 <말>지 신준영 기자에게 전해준 나의 수기 '기차타고 신의주 찍고 자갈치까지, 그리고 한라산'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빵 한 조각 사먹을 돈이 없어 망설이고 망설인 끝에 사회보장청에 도움을 요청하러 간 첫 날, 외국인담당 공무원의 냉담한 반응과 업신여기는 듯한 눈초리, '흥, 우리 독일사람 도와주기도 벅찬데 어디서 거지발싸게 같은 동양놈이 공짜로 거져 먹을려구?' 라는 빛이 역력했다.
비참하고 참담했었다. 나는 독일에 망명을 신청했지만 다시 결사적으로 철회를 요청했던 사람이다. 나는 당신들에게 그런 업신여김을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다시는 도움을 요청하지 않겠다. 비록 굶어서 뱃가죽이 등 뒤에 닿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도 그렇지만 그리운 어머니 얼굴이 무시로 어른거려 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 남들은 내가 강인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나는 살갗이 벌게 지도록 나를 깨문 개미새끼 한 마리도 불쌍해서 못 죽이는 사람이다.
전형적인 프랑켄과 한판 붙다
내가 방랑을 끝내고 정착을 한 곳은 독일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바이에른주 이다. 당시의 바이에른주 지사는 양철북의 작가 귄터그라스가 네오나찌의 배후라고 주장했던 에드문트슈토이버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입견과는 달리 대부분의 이곳 사람들은 그 후 나에게 호의적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그 이후로 단 한번도 생계비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다. 하루 한끼를 먹어가며 직장을 구하고 있을 때 다행히 노동청으로부터 취직 알선이 들어왔다. 전자회사였다. 전자라면 문외한 이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독일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동양인, 그렇지만 부지런하고 요령도 모르고 일 처리도 빠르고. 오래지 않아 주변 동료들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 사는 세상 어디를 가나 시샘하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완성된 제품들을 포장해서 송출부에 보내려면 자재창고를 지나야 했는데  창고장이란 녀석이 '묻지마' 시비를 내가 지나갈 때마다 걸어왔다. 그는 전형적인 프랑켄이다. 바이에른은 약 백여 년 전에는 독일이 아닌 프랑켄 왕국이었다. 이곳의 골수 토박이들은 아직도 옛 날 프랑켄 왕국의 향수를 갖고 있으며 외국인에겐 상당히 배타적이다.
각설하고, 나는 거의 한 달간은 시비를 걸어와도 그냥 웃으면서 무시해 버렸다. 뭐, 머리 새까만 동양인이 '즈그들 밥그릇 뺏어갈 수도 있으려니' 하고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덥지 않은 그렇고 그런 시비쯤이야 얼마든지 받아넘길 수 있는 아량 정도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지만, 국가를 모독하고 우리 민족을 모독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창고장은 나의 인내의 한계선을 넘어 도발해 왔던 것이다.
"어이! 니는 내눈보다 쬐금 작기는 하지만 째진 눈은 아니네? 근데 느그들 나라 코리아엔 악마새끼를 닮은 째진 눈을 가진 놈들 투성이라매?  째진 눈처럼 사기꾼도 많고."
나는 조건반사적으로 벽력 같은 고함을 질렀다. 나의 주특기 중의 하나인 기차화통을 능가하는.물론 우리말로 했음은 자명하다. " 이, 개 쌍놈의 새끼가 죽을려고 용을 쓰는구나. 너 이새끼, 오늘 임자 만났다. 어디 니가 이유 없이 경멸하는 째진눈의 일원인 나한테 죽어봐라."
나는 고함과 거의 시차를 두지 않고  창고장 바로 옆에 쌓아두었던, 나무로 된 적재상자를 향해 그간 단련된 수도로 일격을 가했던 것이다.
우지끈 하고 나무상자는 박살이 났고, 얼굴이 놀란 '토깽이 새끼'마냥 하얗게 질려 초속 100미터의 음속을 능가하는 속력으로 삼십육계를 한 창고장, 그 뒤를 이어 나의 고함소리에 달려온 사장 아들, 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창고장에게 심한 꾸지람을 하는데, 사장아들도 상황을 미루어 파악한 것이었다.
들어온지 얼마 안 되는 신입이 막강한 창고장에게 시비를 걸었을 리는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동안 내가 어떻게 회사생활을 했는지는 익히 아는 터, 물품상자가 파손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서열 2위인 사장 아들은 나에게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만 던졌을 뿐이었다.
그 후로 나는 이 회사가 미국의 금융위기 여파로 영원히 문을 닫은 2009년 6월 말까지 회사의 마지막 일원으로 남아 있었다. 자동차에 들어가는 전자부품을 만드는 회사였다. 세계적인 불황은 여타 다른 산업도 마찬가지겠지만, 미국의 다국적 자동차회사의 위기는 유럽 자동차의 자존심인 독일 자동차 산업에도 심대한 타격을 입혔던 것이다.
그 때 내 나이 쉰 하나,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 똥가리 한 놈!  마눌님에겐 "걱정말라, 산 입에 거미줄 치겠냐. 내가 아무리 못났어도 처자식 안 굶긴다. 원하는 만큼 풍족하게는 못하겠지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조금 불안하기는 했다. 일년 동안이야 실업수당으로 그럭저럭 살아가겠지만 그 후론?  지천명을 훌쩍 넘어버린 나이, 능력 있는 젊은 독일 사람들도 취직을 못해 전전긍긍 하고 있는, 희망이 아직 보이지 않은 구질구질한 시대에 정년(?)을 내다보는 외국인 임에랴. 물론 사회보장제도에 기인한 '쏘시알힐페'를 받으면 최소한 굶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구걸(?)하기 위해 쓰리고 아픈 가슴, 삭이고 삭이면서 독일에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3개월만에 실업대학을 졸업하다
빅톨은 입사 당시 나의 조장이기도 하다.
▲ SC-Schafer 회사에서 동료인 빅톨( Victor)과 살짝 빅톨은 입사 당시 나의 조장이기도 하다.
ⓒ 조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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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찾는 자에게 열린다고 했는가. 각고 끝에 실업수당  받은지 3개월만에 '실업대학' 조기졸업을 하고 다른 회사에 신입으로 들어갔다. 쉰 둘이 거의 다 되어서, 근데 말이다. 내가 자동차와 전생에 무슨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이번에도 자동차 관련 업종이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와 아르헨티나에서 생활할 때는 내 소유의 자동차가 있었지만, 독일에서는 자동차 없이 십 수년을 살아 왔다.
최근에야 아들녀석이 커 가고 또 시장 볼 때 불편한 점이 많아 마눌님의 성화에 독일 면허증도 따고 '라만챠의 동키호테의 애마인 로시난테' 만큼 누더기는 아니지만 중고 자동차를 구입해 나의 적토마로 삼고 있기는 하다.
새 회사에서 하는 일은  가죽으로 자동차 내부의 모든 것을 책임진다. 그린피스에 꽤 오래 동안 적을 두었던 나로서는 께름직 하기는 하지만 일반 야생동물들의 생살을 뜯어낸 생가죽이 아니고 도살장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육우의 소가죽임을 스스로의 위안과 변명거리로 삼는다. 그렇다고 내가 죄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 소가죽으로 자동차의 핸들을 만들거나, 가죽의자, 가죽천장, 운전자 앞의 계기판도 가죽으로 감싼다. 백 년이 넘은 회사다. SELLNER GROUP 산하의 SC Schäfer라는 회사다. 헝가리에 자회사가 있는데 대부분의 자잘한 제품은 그곳에서 생산하고 내가 일하는 곳에서는 주로 부가가치 있는 제품을 담당한다.
그런데 언감생심 내가 언제 가죽으로 자동차 천정을 도배하고 헨들을 만들어 보았는가. 처음 두어 달은 그야말로 죽지 않을 만큼 고생했다. 손톱 몇 개는 아예 빠져버리고 집에 와서는 끙끙 앓았다. 그러나 마눌님과 똥가리에게는 거의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나의 똥가리는 아직까지는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힘도 세고 강한 줄 안다. 세상의 모든 천사 같은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사실 내가 보통 사람들보다 '아구지'힘이 강하기는 한가보다. 코끼리 같은 독일사람들도 거의 대부분 며칠을 못 버티고 단봇짐을 챙겨 달아나 버리는 것을 보면, 
이제 거의 1년이 다 되어간다. 다음 달 14일이 딱 1년째다. 검사담당이 내가 만든 제품은 무조건'오케이' 할 정도로 인정도 받고 회사의 보든 사람들에게 '대단한 코리안'이라는 칭호도 얻었지만, 아직 나는 정식 직원이 아니다.
요즘 독일의 회사들은 정식 직원을 거의 채용하지 않는다. 정식 직원은 회사가 어려울 때 해고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은 경제적으로 위기상황의 시기다. 한국도 그러하겠지만 유럽은 더 심하다. 따라서 대부분 인력송출회사를 통해 그때그때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한다. 그리고 일이 없으면 인력송출회사 출신들을 우선적으로 해고해 버린다.
나도 인력송출회사 출신이다. 응당 임금도 정식 직원보다 상당히 적다. 인력송출회사의 몫이 임금에서 빠져 나가기 때문이다. 언제 해고 될 지도 알 수 없다. 이른바 독일식 카스트제도의 한복판에 내가 지금 서 있는 것이다. 브라만, 크산드라, 크샤트리아, 그리고 성골, 진골의 골품제도, 나는 인력송출회사 출신의 서자인 것이다.
그런 불안한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력송출회사와 내가 일을 하고 있는 회사 책임자에게 송출회사의 '노예상태'에서 해방시켜 줄 것과 나를 필요로 한다면 정식 직원으로 채용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내 능력만큼 대우를 받아야 겠다. 그렇지 않으면 새 일자리를 찾아 보겠다는 으름장(?)을 '겁대가리' 없이 날렸던 것인데, 양쪽 회사의 답변은 지금은 때가 아니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살살 달래는 것 아닌가.
사실 이 회사를 그만 두면 나이 많은 외국인을 써 줄 회사가 또 있을 지 의문이기도 하거니와, 나는 임금이 적더라도 이 회사를 나갈 생각이 없다. 또 다시 신입으로 고생해야 한다는 것도 있지만 나는 지금 제품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가죽을 이용해서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험중인 자투리 가죽을 이용한 그림. 옆에 밑그림을 그리기 위한 전기인두가 살짝 얼굴을 내밀고...
 실험중인 자투리 가죽을 이용한 그림. 옆에 밑그림을 그리기 위한 전기인두가 살짝 얼굴을 내밀고...
ⓒ 조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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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투리가죽 뒷면에 전기 인두로 그림을 그린 후 채색하는 나만의 캐릭터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고민하고 연구하는 실험단계이다. 그 실험이 언제 끝날지는 나도 모른다. 자투리가죽도 제품을 만들고 잘려 나온 원 상태 그대로 손 보지 않고 활용한다.
고민이 끝나는 날 나의 첫 작품이 나올 것이다. 어설프기는 하겠지만, 누구나 쉽고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그림을 그릴 것이다. 내가 수용소에서 수용소 난민들을 염두에 두고 전시회를 준비했던 그런 그림들의 연장선의 일환이 될 것이다. 사랑하는 동물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태그:#들풀하나, #똥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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