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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8일(목)

 

하늘은 맑지만 바람이 부는 날이 며칠째 계속되고 있다. 다행히 하늘이 울부짖는 소리가 날 정도로 거센 바람은 아니다. 그래도 아침과 저녁으로 기온이 무척 낮은 데다 바람이 부는 만큼, 보온에 신경을 써야 한다. 지난밤에 벌교 시내에서 바람막이 점퍼를 하나 구입했다.

 

벌교에서 다시 중도방죽으로 올라선다. 방죽 위로 흙길을 시멘트만큼이나 단단하게 다져 놓았다. 방죽 아래 갯벌엔 갈대가 꽉 들어차 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갈대가 바람에 서걱대는 소리가 들린다. 시원하고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하기에 좋은 길이다.

 

보성생태마을로 들어섰다가 길을 찾지 못하고 되돌아 나온다. 풀이 우거진 길이 하나 보이기는 하는데, 사람이나 차가 지나다닌 흔적이 거의 없다. 벌교 읍내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침부터 풀숲을 헤치고 들어갈 마음이 생기질 않는다. 며칠 전만 해도 이런 길을 가다가 추수를 끝낸 논바닥으로 걸어 들어간 적이 있다.

 

그렇게 해서 오늘은 2번 국도를 타고 일부 구간을 우회한 뒤, 다시 쟁동 바닷가마을로 들어선다. 예전에도 한두 번 경험한 일이지만, 도시 근처의 국도는 차량이 꽤 많은 편이다. 특히 산업 시설이 가까운 구간에는 거대한 크기의 산업용 차량들이 많이 지나다녀 꽤 위협적이다. 따라서 이런 구간에서는 가급적 차량이 드문 옛 국도나 지방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기차가 설 것 같은 멀쩡한 역사

 

진석마을을 지난 뒤로는 꽤 오랫동안 2차선 지방도로를 탄다. 길도 다시 바닷가에서 멀어져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곤 논과 밭뿐이다. 이 길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곳에 2번 국도가 길고 곧게 뻗어 있는 것이 보인다. 마음 같아선 국도를 이용하고 싶다. 하지만 그곳엔 속도만 있고, 정취라는 게 없다.

 

내가 지금 달려가고 있는 이 길엔 차들이 거의 오가지 않는다. 정취를 포기하고 속도를 택한 차들이 대부분 국도로 올라가고 없기 때문이다. 길이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휘어지는 것 말고 아쉬울 게 아무것도 없다. 내 뒤를 쫓는 차들이 없어서 그런지 마음도 훨씬 더 편안하다.

 

가는 길에 낡은 역사가 하나 눈에 들어온다. 겉모습이 멀쩡해서 지금도 운영 중인 역인 줄 알았다. 대합실 의자에 앉아 잠시 쉬어갈까 생각했다. 때맞춰 기차가 들어오는 장면이라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하지만, 철길은 이미 폐선이 되고 역사에는 근대문화유산 딱지가 붙어 있다.

 

1934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겉보기엔 대충 지은 건물 같은데 그새 80년 가까이 된 건물이다. 건물 앞에 '전라도 일대의 주요 자원인 쌀, 목재, 광물 등을 일본으로 수탈하는 통로 역할을 했던 송정리-여수 간 철도에 만들어진 역 건물 중의 하나'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당시 우리 땅에 지어진 역들이 대부분 그런 용도로 이용됐다.

 

기차역뿐만이 아니다. 바닷가의 항구들 역시 대부분 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군산에서는 아직도 길가에 늘어선 건물의 상당수가 일본색을 띠고 있다. 당시에 만들어진 주요 시설과 건물들이 이제는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보존이 되고 있다. 과거를 잊지 말자는 취지의 보존이겠지만, 식민 통치의 도구로 사용됐던 것들이 수십 년 같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마음이 조금은 씁쓸하다.

 

어떻게 하다 보니, 별량면 면소재지가 있는 곳까지 달려간다. 이게 아니다 싶어 지도를 뚫어지게 들여다봤더니 조금 지나쳤다. 차라리 잘됐다 싶다. 때마침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이다. 면소재지답게 길가에 식당이 늘어섰다. 메뉴를 내 맘대로 골라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여러 곳이다.

 

이런 식당을 발견했을 땐 횡재한 기분이다. 바닷가에선 내가 메뉴를 선택한다기보다는 식당에서 정해준 메뉴를 먹는 경우가 많다. 그마저도 감지덕지다. 게다가 혼자라서 미안해 할 이유도 없다. 어느새 밥 먹는 일 역시 주요한 일과 중에 하나가 됐다.

 

배를 채우고 나니까 마음까지 든든해진다. 이제 해가 질 때까진 아무 걱정이 없다. 면소재지를 떠나서는 다시 바닷가 길로 들어선다. 한적한 어촌 풍경이 이어진다. 조금 단조로운 풍경이다. 마침 햇빛마저 정면으로 비추고 있어 눈을 들기 힘들다.

 

그러다 봉화산을 바닷가 쪽으로 돌아가는 절벽 길 위로 올라서면서 풍경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빛의 각도가 바뀌기도 했지만, 그곳부터 서서히 순천만의 갈대밭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봉화산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면 순천만의 갈대밭들이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작고 낮은 섬들처럼 보인다. 갈대밭은 노란 섬이고, 칠면초는 붉은 섬이다.

 

이 갈대밭에 관광객이 북적댈 줄 알았을까  

 

봉화산을 내려가면 그때부터는 눈에 들어오는 것이 모두 갈대다. 어른 키보다 높은 갈대들이 펄 밭에 곧추서서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장관이다. 대하양식장을 지나 오른쪽 샛길로 들어서면 그때부터는 제방 위로 난 길을 따라갈 수 있다. 계단 말고는 제방으로 올라가는 길이 따로 없다. 제방 경사면으로 그냥 자전거를 밀고 올라간다.

 

제방 왼쪽은 비포장도로이고, 오른쪽은 끝이 어딘지 가늠하기 힘든 갈대밭이다. 이 길이 대대포구까지 이어진다. 대대포구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예전 그 모습 그대로 한적하다. 하지만 이 길도 대대포구에 가까워지면서부터는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얼마 안 가 등산복 차림의 관광객들이 대여섯 명씩 무리를 지어 제방 위를 걷는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그리고 포구에 도착해서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관광객들로 북적대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대포구는 순천만 갈대밭을 찾는 사람들이 반드시 거쳐 가는 곳이다. 대대포구를 지나야 순천만 갈대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용산전망대까지 걸어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순천만에 갈대밭이 형성되기 시작한 지 30여 년, 최근 10년 사이에 갈대밭이 급속도로 확산됐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지금과 같은 유명관광지가 되기까지 채 5년이 걸리지 않았다.

 

대대포구에 갈대밭을 돌아보는 유람선이 드나들고, 제방 위로 갈대밭을 순회하는 무궤도 열차가 지나다닌다. 격세지변이 따로 없다. 갈대밭이 유명세를 타고 있는 추세로 보면, 앞으로 5년 뒤엔 더 큰 변화가 있을 게 틀림없다.

 

대대포구를 지나 계속 제방 길을 따라가다 보면, 갈대밭을 가로질러 반대편 제방 길로 건너가는 다리가 나온다. 다리 건너 제방 길은 사람들이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 곳이다. 인적이 드문 까닭인지 갈대가 제방 위까지 올라와 제 몸을 흔들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제방이 끝나는 곳부터는 갈대밭과도 작별이다. 이후로 와온마을까지는 내륙으로 갓길이 없는 좁은 도로를 달려야 한다. 이 길에서 이제는 몇 번째인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펑크가 난다. 뒷바퀴에 3cm 가까이 되는 못이 박혀 있다. 너무 놀라서 말문이 막힌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긴 못이 타이어를 뚫고 들어올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놈의 못이 사선도 아니고, 벌떡 일어선 90도 각도로 뚫고 들어왔다. 덕분에 튜브의 아랫면과 윗면을 모두 때워야 하는 특이한 경험을 한다. 펑크를 때우고 있는 사이에 해가 기운다. 오늘은 여기서 쉬어가라는 신의 계시일 게다. 오늘 달린 거리는 45km, 총 누적거리는 2932km다. 어느새 지금까지 달려온 거리가 3000km에 육박하고 있다.


태그:#순천만, #갈대, #원창역, #대대포구, #와온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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