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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가리가 세살 때 인가 동네 어귀에서 찰칵. 좌로부터 똥가리(한얼), 마리에따, 그리고 또 다른 연인, 카타리나.
▲ 똥가리의 연인들. 똥가리가 세살 때 인가 동네 어귀에서 찰칵. 좌로부터 똥가리(한얼), 마리에따, 그리고 또 다른 연인, 카타리나.
ⓒ 조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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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가리의 첫사랑, 마리에따

한 열흘 전에 나그네의 붕어빵인 똥가리가 갓난 아기 때부터 어울려 다녔던 마리에따의 엄마 소야 에게서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똥가리가 '내나라내땅'으로 유학 가기 직전까지 첫 번째 '여친'이요, 똥가리의 첫 사랑(?)인 마리에따와 함께 다녔던 태권도장에서 시범경기가 있으니 꼭 참석해 주었으면 한다는 간곡한 전언을 전달하기 위한 전화였다.

마리에따는 오스트리아계 독일인 아빠와 저 멀리 우랄산맥 근처 러시아에서 온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똘망한 아이다. 아빠가 우랄산맥으로 여행을 갔을 때 그곳 마을 산골처녀였던 마리에따 엄마를 독일로 데려와 결혼해서 낳은 아이다. 마리에따의 아빠인 헤르비는 지난 해에 65세가 되어 연금을 받고 있는 젊은(?) 노인이다.

마리에따가 시범을 보이고 들어와 만족한 듯 환히 웃고 있다. 엄마 소야, 할아버지 아빠 헤르비
▲ 태권도장에서 마리에따네 가족 마리에따가 시범을 보이고 들어와 만족한 듯 환히 웃고 있다. 엄마 소야, 할아버지 아빠 헤르비
ⓒ 조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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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세 노인이 이제 겨우 유치원을 졸업한 막내 손녀 또래의 딸을 두고 있다. 엄마인 소야는 물론 삼십대 중반이다. 우리 나이로 마흔 여섯에 오는 춘삼월에 한국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똥가리를 낳은 나그네는 그래도 헤르비에 비하면 한참 '젊은오빠'인 셈이다.

소야는 국적이 러시아이기는 하지만 순수한 슬라브계는 아니다. 몽골리안의 피가 반쯤 섞인, 징기스칸의 후예라는 자부심도 어느 정도 갖고 있는 우랄 알타이계통의 여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독일에서 배우자를 찾지 못한 독일 남자들 중 상당수가 선진국 독일을 동경하고 있는 동남아시아나 러시아 등의 젊은 여인들을 아내로 데려온다. 이는 상당히 안정된 사회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독일에도 한국 농촌 총각들의 신세와 비견되는 독일 총각들이 꽤 있다는 반증인 것이다.

그렇다고 헤르비가 그런 범주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헤르비는 전처 사이에 벌써 사십 초 중반의 자녀들을 여럿 두고 있기도 한 '재혼남'이다. 마리에따네 가족사에 대해서는 벌써 취재 약속을 받아 논 상태라 추후 짬을 내어 '몽송그리' 한 꼭지 올릴 예정이다.

오늘은 영화 <쥬라기공원>의 공룡섬으로 유명한 중남미 코스타리카에서 온 태권도 사범 까를로스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풀어볼까 한다.

나그네가 까를로스를 처음 만난 시점은 약 2년 전 똥가리에게 태권도를 배워주기 위해 방문했던지역 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종합체육관에서였다. 태권도 사범이 한국인이 아닌 것은 사전에 알고 있었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온 독일어가 꽤나 서투른 남아메리카의 코스타리카 사람인 줄은 짐작도 못했다. 나그네는 순수한 학부모 입장에서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는데 까를로스는 나그네가 태권도 종주국인 한국 사람인 걸 알고는 무척 반가워 했다.

더더욱이 우리는 처음 만나 까를로스의 모국어인 스페인어로 인사를 나누었던 것이다. 나그네는 지금은 거의 잊었지만, 독일에 오기 전 아르헨티나에서 생활했던 전력이 있어서 아주 간단한 스페인어는 구사를 한다. 나그네는 스페인어를 하는 까를로스가 멀리 독일까지 와서 서투른 독일말로 독일 아이들을 상대로 우리의 태권도를 보급하고 있는 것에 대해 고마움과 반가움, 그리고 대견함과 더불어 한 편으론 신기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까를로스는 머언 이국 땅 독일에서  그의 모국어인 스페인어로 인사를 나눌 수 있고, 또 동경해 마지 않는 태권도 종주국에서 온 학부모와 제자를 만났으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실제적으로 까를로스는 태권도 종주국인 한국을 꽤나 동경하고 있었음을 그 후 그의 행동거지에서 여실히 드러내 보였다.

차렷! 열중 쉬엇! 돌려차기! 그만!
▲ 사범 까를로스가 심사위원들 앞에서 수련생들에게 지시를 하고 있다 차렷! 열중 쉬엇! 돌려차기! 그만!
ⓒ 조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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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태권도장에서 사용하는 용어나 구호 숫자들은 우리말로 통일되어 있다. 그래서 태권도를 배우는 벽안의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하나, 둘, 셋'의 우리말 숫자는 물론 '차렷, 뒤로 돌아, 돌려차기, 앞 굽이 자세'등의 용어를 알고 있다. 처음 얼마 동안 나그네는 아들녀석 똥가리가 독일 아이들과 함께 까를로스에게 태권도를 배우는 약 한 시간 동안 체육관 가장자리 학부모 석에 앉아 우리말로 기합을 지르고 대련을 하는 아이들을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지켜보는 즐거움을 가졌다.

그러나 언제 부터인가 까를로스가 나그네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후부터는 까를로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똥가리를 까를로스에게 인계한 즉시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체육관을 부리나케 빠져 나와야 했다. 그리고 강가나 숲 속에서 학교 수업을 빼먹고 '땡땡이 깐' 초등학교 아이처럼 혼자 얼쩡거리다가 수업이 끝날 무렵에 다시 체육관에 가서 똥가리를 데려와야만 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내가 간단한 전통무예 시범을 보이기 전에는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말의 태권도 용어로 아이들을 가르치던 까를로스가 어느 날인가부터 아이들에게 우리말로 지시를 한 다음 나그네가 앉아 있는 학부모 석으로 고개를 돌려 확인을 하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차렷! 뒤로 돌아! 준비!"
"앞 굽이 자세!"

"헤어(독일어 존칭) 조! 앞 굽이 자세가 정확히 맞습니까?"

나그네는 까를로스에게 '나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고 확인할 필요도 없다'고 여러 번 얘기했지만, 나그네가 학부모 석에 앉아 있으면 여전히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리고 인사를 나눌 때면 나그네가 내민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허리를 구십 도 각도로 숙이는 민망한 장면들을 연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실 나그네는 지금보다 한참 젊었을 때 우리 전통무예에 조금 관심을 가진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고수는 아니었다. 흉내만 조금 내었을 뿐인 전통무예의 동작을 나그네 나름으로 변형시켜서 아주 조금 까를로스에게 보여 주었을 뿐인데, 그는 의례짐작에 기인한 긴장을 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태권도와 전통무예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소용이 없었다.

"까를로스, 내가 했던 무술은 태권도가 아니야. 그래서 동작도 완전히 다르고 용어도 비슷한 게 거의 없어. 옛날 태권도가 생기기 전에 고대 한국에서 우리 조상들이 연마했던 것인데, 내가 보인 동작은 그나마 내가 나름대로 변형시킨 거라구. 그러니 나에게 물어볼 필요가 전혀 없어. 까를로스가 배운 데로 가르치면 되는 거야. 나는 태권도는 잘 몰라."

사실 오늘날 태권도 동작과 용어들은 최근에 많이 바뀐 듯하다. 나그네가 어릴 적엔 '기마자세'니, '팔괘 일장', '태극 일장' 등의 용어가 있었는데 요즘 그런 용어는 사용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태권도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두 개의 단체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국에서 장성을 지냈던 최홍희가 박정희와 대립각을 세우다 캐나다로 망명해서 만든 국제태권도연맹(ITF)과 최홍희 망명 후 역시 장성 출신인 김운용의 주도하에 최홍희의 국제태권도연맹(ITF)에 대항해서 창설한 세계태권도연맹(WTF)이 그것이다. 최홍희와 김운용 사후 그 후진들이 오랜 반목을 청산하고 단일화 하자는 얘기들이 오가는 모양인데, 그리 간단치는 않은 듯싶다.

역시 두 단체의 태권도 품새와 용어들은 그들의 불신과 대립 만큼이나 많이 다르다. 하물며 사실상 뿌리가 많이 다른 오늘날의 태권도와 전통무예의 품새와 용어의 다름이야 말해 무엇 하랴. 나그네는 까를로스를 처음 만났을 때 어느 단체 소속이냐고 물었다.

대체적으로 중남미는 최홍희의 국제태권도연맹 소속이 많고 미국과 유럽은 세계태권도연맹의 입김이 강한 지역이다. 까를로스는 중미의 코스타리카 출신이기 때문에 나그네는 십중팔구 국제태권도연맹(ITF)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까를로스는 세계태권도연맹 소속이었다.

까를로스가 태권도 시범경기장 벽에 직접 걸어놓은 국기들.
독일, 꼬레아, 그의 조국 코스타리카 국기, 가운데 태극기를 두었다.
▲ 국기들 까를로스가 태권도 시범경기장 벽에 직접 걸어놓은 국기들. 독일, 꼬레아, 그의 조국 코스타리카 국기, 가운데 태극기를 두었다.
ⓒ 조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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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를로스의 종주국에 대한 가없는 흠모

각설하고, 나그네는 재작년 어느 날, 태권도 수업이 다 끝나기를 기다려서 수련생들과 학모부들, 그리고 까를로스가 있는 자리에서 어눌하게나마 일장 연설(?)을 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잠시 동안 여러분의 시간을 좀 뺐겠습니다. 내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이 두 권의 책은 태권도가 태어나기 전인 아주 오랜 옛날, 코레아의 옛사람들이 연마했던 무예를 담은 책들입니다. 태권도의 할아버지쯤 되는 옛 무예지요. 보시면 알겠지만, 지금 여러분의 자녀들이 배우고 있는 태권도와는 아주 많이 다릅니다.

따라서 두 무예를 비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마이스타(사범) 까를로스는 지금까지 아주 훌륭하게 여러분의 자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까를로스의 가르침이 모두 정석입니다. 까를로스는 나에게 더 이상 문의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태권도를 모르기 때문이지요. 여러분도 훌륭한 마이스타 까를로스를 믿고 조금의 의문도 갖지 말기를 바랍니다..."

나그네가 오랜 세월 서재 구석에 처박혀 곰팡내와 먼지가 푸석하게 쌓인 전통무예 책을 끄집어 들고 체육관에 간 것은 까를로스가 나그네를 의식하지 않고 소신껏 아이들을 가르치기를 진심으로 바랐고, 그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도중에 나그네를 의식, 고개를 돌리고 나그네에게 질문을 던질 때마다 은연 중 학부모들과 아이들이 까를로스를 못 미더워 할 가능성 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부심의 산물이었다.

몇몇 학부모들은 나그네의 연설(?)이 끝난 후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동작이 담겨있는 전통무예책을 들춰보았다. 까를로스는 책을 좀 빌려주면 않되겠느냐고 나그네에게 물었고, 나그네는 기꺼히 그에게 전통무예 책을 빌려 주었다. 그는 그만큼 태권도 종주국의 여러 가지에 관심이 많았고 동경해 왔던 것이다. 그 책들은 나그네가 아주 오래 전에 조금 날렵했던 시절에 보았던 책들이었다. 지금은 어떠냐고? 전형적인 배불뚝이 중년이라오. 아! 옛 날이여.

멀리 마리에다가 보인다. 똥가리의 첫사랑 마리에따의 고사리지만 매서운 주먹?
똥가리도 독일에 있다면 끼어 있을텐데, 아쉽다.
▲ 아이들의 태권도 시범 멀리 마리에다가 보인다. 똥가리의 첫사랑 마리에따의 고사리지만 매서운 주먹? 똥가리도 독일에 있다면 끼어 있을텐데, 아쉽다.
ⓒ 조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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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를로스는 똥가리가 갈수록 우리말을 자꾸 잃어버리는 정체성 문제 때문에 엄마 아빠의 고향으로 유학(?)간다고 하니까, 한편으론 수긍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매우 아쉽고 서운해 했다. 독일 아이들 틈새에 끼어 태권도 종주국 출신 제자인 똥가리를 많이 사랑했던 그였기에, 어쩌면 독일 아이들이나 독일 학부형들 앞에서 똥가리가 그의 든든한 '빽그라운드'였는지도 모르겠다. 까를로스는 나그네에게 묻는 것을 포기하고(?) 종종 똥가리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곤 했으니 말이다.

나그네는 지난 토요일 오후, 짬을 내어 시범경기가 펼쳐지는 체육관을 실로 오랜만에 방문했다. 똥가리가 '내나라 내땅'으로 떠나간 이후 처음이다. 이번에는 학부모 입장이 아니라 순수한 관람객으로, 아니 사실상 똥가리의 첫사랑 마리에따의 일취월장 했을 태권도 품새를 보기 위해, 그리고 까를로스를 취재하기 위해서가 더 정확하겠다.

마리에따는 자기 몫의 품새가 끝나고 나그네를 보자, "옹켈 조!(조 아저씨!)" 하면서 다가와 나그네의 품에 안기며 화알짝 웃는다. 그리고 앙증스럽게 한마디 더 한다.

"한얼은 언제 독일에 오는 거야? 정말 보고 싶다. 뽀뽀하구 싶은데...헤헤헤"

까를로스는 여전히 나그네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고 구십도 인사를 한다. 순 한국식으로...그렇지만 정말 반가워서 보름달 같은 환한 웃음을 얼굴 가득 동그랗게 받아 안고 있다.

"부에노 디아! 세뇨르 조."
"부에노 디아! 까를로스."

"우리 언제 날 잡아서 우리 집에서 쐬주 한 잔 하자구."
"쎄구로? 오케이! 그라시아스."


태그:#까를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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