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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도였거나 폭도를 둔 집안은 일상적 감시 대상이었다.

취직하면 신원조회에 걸려 쫓겨났다. 내란중요종사자. 아니면 담당형사가 회사 사장에게 직접 찾아가, 그는 폭도였다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거주지에서 반경 4킬로미터를 벗어날 경우 관할경찰서에 신고해야 했다.

서울에서 고위관리가 내려오면, 사전에 연행되거나 가택 연금되었고, 효도관광이라는 명목으로 버스에 강제로 태워져 먼 곳으로 추방되었다.

다른 도시로 이사 가도 마찬가지였다. 폭도들은 어느 지역이든 오염시킬 것이므로, 그들의 기록은 곧바로 해당지역 감찰기관으로 이송되었다. 이삿짐이 집에 들어가기도 전에 우선 담당경찰을 찾아가 도착확인서부터 써내야 했다.

폭도였으므로, 부상자들은 제대로 된 치료를 꿈꿀 수 없었다.

의료보험혜택은 당연히 받지 못했고, 전문적 검진은 더욱 불가능했다. 부유한 시민들이 도망친 도시를 지켰던 그들은 처음부터 가난했으므로, 살과 뼈를 발라내는 고통이 밀려와도 진통제 사먹을 돈조차 구하기 힘들었다.

쇠파이프로 맞아 척추 뼈가 내려앉은 허리, 군홧발과 몽둥이에 부러진 갈비뼈와 팔은 그 상태로 굳었고, 송곳에 찔려 만신창이가 된 손가락과 무릎은 살이 밀려나와 두툼해졌다.

수십 일 동안 개머리판과 몽둥이로 두들겨 맞아 항상 두통을 달고 살았고, 사지의 관절들이 뒤틀려 움직일 때마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양쪽 책상 사이에서 각목에 끼워져 통닭구이가 되었던 결과였다.

부러지고 멍들고, 터지고, 파열된 자기 몸도 추스를 수 없는데, 가족은 무슨 수로 책임질 것인가.

군부는 그들을 대대손손 폭도로 낙인찍고 핍박하고 추방하는데 전력했다. 불의에 저항했던 자들이 폭도가 되어야, 그들의 권력찬탈이 정당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남은 자들은 고개 숙이지 않았고, 낙인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항쟁이 마무리된 직후부터 새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유족들은 지속적으로 진상규명을 요구했고, 투쟁사실을 알렸으며, 배상을 요구했다.

그러자 군부는 아예 망월동묘지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관제유족들을 동원하여 위로금으로 매수했으며, 사찰기관, 행정기관들을 통해 협박하고 회유하여 다른 곳으로의 이장을 시도했다. 심지어 터가 좋지 않아 시신이 잘 썩지 않으므로, 자손 대대로 폭도의 낙인을 벗겨내지 못할 것이라는 저주도 퍼부었다.

당시 광주에서는 새로운 투쟁이 발화되었고, 할머니집이 모임장소로 이용되었다.

유족도 아닌데 왜 거기에 끼어들어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려는지, 아버지는 솔직히 할머니에게도 불만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사태의 전말을 알지 못했다. 다만 할아버지 장례를 치른 후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긴 모양이다 정도로 짐작했을 뿐이다.

안방에서는 간간히 아버지의 훈계소리가 흘러나왔다. 삼촌의 조용하고 여린 목소리도 드문드문 들렸던 것 같다.

왜 거실에 앉아 있었을까. 무엇이 엄마의 눈치를 이기면서 TV 핑계를 대게 했을까. 그렇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세수라도 하고 나오라는 엄마의 추궁이 재차 이어졌을 때, 나는 무거운 엉덩이를 추슬러야 했다.

- 무얼 잘했다고! 그러니 아버지가!

숨이 탁 멎을 정도로 격한 아버지의 질책이 들리는 순간, 나는 재빨리 욕실로 들어갔다.

그거 참. 아버지의 저 말은 좀 심하다 싶었다. 똑같이 부친을 여의었어도 심정이 다를 것이다. 한쪽은 두고 온 고향이지만, 삼촌은 함께 살던 가족을 잃었다. 오늘은 평소의 신중했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건성으로 물을 얼굴에 묻힌 후 욕실에서 나왔을 때, 안방에서 나오는 삼촌과 마주쳤다.

- 삼촌, 오셨어요!

왜 그렇게 등이 오싹했고 소름이 끼쳤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이상한 눈을 본 건 처음이었다. 그곳에서는 아무런 빛도 반사되지 않았다. 한지에 그린 초상화에 먹으로 눈동자를 쿡 찍어 넣은 느낌. 눈동자도 흔들리지 않았고 나를 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삼촌은 곧장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문을 나가버렸다. 놀란 사람은 엄마였다.

- 나와 봐요, 도련님 그냥 가요.
- 놔 둬. 걔도 이젠 정신을 차려야 해.

아버지는 심란하고도 매몰차게 대꾸했다. 

불안 가득한 엄마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나는 총알처럼 현관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미 엘리베이터는 하강하는 중이었다. 2층, 1층. 문이 열릴 것이고 다시 닫혔다가 올라오면? 계단으로 몸을 돌린 나는 일곱 개 층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자전거와 짐들은 왜 그렇게 쌓여있는지. 4층까지 내려갔을 때, 엘리베이터는 7층으로 올라간 후였다.

- 잠깐만요 삼촌!

그는 멀찌감치 앞에서 걷고 있었다. 아니, 걷는다기보다는 고꾸라지지 않으려고 애쓴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무대 바깥 줄에 매달린 나무인형처럼 무릎이 꺾였다가는 일어서고, 다시 풀리기를 반복했다.

서둘러 쫓아간 나는 황급히 삼촌의 팔을 쥐었다. 그 느낌이란.

방금 익사한 시체를 만지면 이런 촉감일 터였다. 축축이 젖어 서늘하고 미끈한 느낌. 그는 빠져나가고 도망치려 몸부림쳤다.

결국 나는 삼촌을 집으로 데려가지 못했다. 대신 동네 입구 여관에 함께 투숙하는 것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삼촌은 TV 장식장 모서리에 기대앉은 채 꼼짝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내 말이 위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불편한 분위기를 바꿀 겸 맥주와 담배를 사러 나갔다 돌아왔을 때였다. 삼촌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낯선 침대에는 총을 들고 쿠데타군에 맞서 싸웠던, 항쟁의 장엄한 영웅이 누워 있지 않았다. 사슬에 묶인 채 매일 아침 독수리에 심장을 쪼였던 프로메테우스처럼, 반복된 충격과 공포로 두려움 속에 떠는 왜소한 사내가 잠들어 있었다.

그날 밤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 같다. 뒤척이며 무슨 생각을 했던지 구체적으로 기억나는 것은 없다.

다만 지금도 남은 느낌은, 삶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겁다는, 어쩌면 그 때문에 나를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삼촌의 얼굴에 깊게 패인 고통과 절망의 화인이 그런 느낌을 갖게 했던 것 같다.

다음날 아침 일어났을 때, 삼촌은 사라지고 없었다. 깨어보니 조카애와 여관에서 자고 있는 게 겸연쩍어 서둘러 내려갔구나 싶었다. 아버지는 출근한 후였고, 엄마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나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할머니가 올라오셨던 것이다.

일주일 쯤 후였다. 광주에서 지금 출발한다며, 아버지를 불러오라는 할머니의 서슬 퍼런 지시가 떨어졌다. 나 또한 그날 밤 삼촌의 행적을 설명하기 위해 집에서 대기해야 했다.

다행히 나의 예측대로 삼촌은 아침 일찍 광주로 내려간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지만 도착하자마자 앓아누워 사흘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깨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드러났다. 삼촌은 자기가 서울에 갔다 왔던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냥 집에 있다가 아팠던 것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목숨보다 소중한 늦둥이가 그런 지경이 되었을 때, 수십 년을 함께 산 남편을 잃은 신산함까지 얹어진 늙은이는 도저히 참고 넘어갈 수 없었다. 제 새끼를 보호하려는 본능으로 무장한 할머니의 눈빛은 사납고 매서웠다.

순식간에 터져 나온 분노는 차라리 절규에 가까웠다.

- 네가 뭐간데 우리 종호를 혼냈냐. 형으로 한 일이 무간데, 나가 뒈지는 꼴을 보려고 작정했냐. 그리 잘나서 어미를 잡아먹을 거냐?

불쌍한 시동생이 당하는 것을 구경만 한, 몰인정한 며느리에 대한 서운함도 빠뜨리지 않았다.

- 어멈은 그리 안 보았는데, 자넨 무얼 했는가. 우리 종호가 어려서 괄시했는가.

삼촌이 올라온 날 밤 할머니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전화를 건 큰 애의 태도로 보아 틀림없이 좋지 않은 이야기가 오갔을 텐데, 막내가 마음의 상처나 받지 않았을까.

서울에 전화했지만 삼촌과 통화를 하지 못했다. 그것이 할머니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며느리 말로는, 큰 손자와 함께 나갔다는데 왜 안 들어오는지. 어째서 늦게라도 전화 해주지 않는지 밤새 불안했다.

그런데 혼이 빠져 돌아온 아들을 본 늙은 어미는, 순간적으로 격심한 살의를 느꼈을 것 같다.

- 공수부대 그 육시랄 놈들이 지저대불고 종호 잡아갔을 때, 아범은 어디 있었는가? 너가 서울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때, 우리는 광주서 다 죽고 있었다, 이 나쁜 놈아!

할머니는 끝내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렸다. 열손가락 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지만 특별히 더 아픈 손가락이 있는 법이다.

아버지는 대꾸 한마디 하지 않은 채 할머니의 행패를 고스란히 받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왜 똑같은 자식인데 차별하느냐고 울분을 느꼈을까. 아니면 집안의 어른으로 남겨진 당신의 고독을 곰씹었을까. 아버지는 갑자기 훌쩍 늙어버린 할머니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슬프고 마음 아파 할 말을 잃어버렸을 것도 같다.

엄마는 식사라도 하고 가시라고 간곡히 사정했지만 모질게 거절당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이 할머니를 서울역까지 모셔드린 후 회사로 돌아갔다.


태그:#광주항쟁, #공수부대, #내란중요종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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