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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 시장에서 만난 룽지앙 소수민족 사람들
▲ 룽지앙 사람들 일요 시장에서 만난 룽지앙 소수민족 사람들
ⓒ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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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파노라마

룽지앙으로 떠나는 버스는 낡디낡아 굴러갈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아침 일찍 카이리를 출발한 버스는 창문이 제대로 닫히지도 않았고, 의자도 흔들거려 앉아있기조차 불편했다.

그래도 버스는 안개 자욱한 카이리를 떠나 쉬지 않고 달린다. 시지앙 천호묘채를 가기 위해 지나갔던 길을 따라 달리던 버스가 이윽고 산길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좁디좁은 산길은 끝없는 오르막이다. 낡은 버스는 갸르릉 갸르릉 힘겨운 해소 기침을 해대며 산길을 오른다. 올라도 올라도 산은 끝이 없다. 잠시 내려가는 듯 하다가도 이내 다시 오르막이다.

이 산이 레이꽁산(雷公山)이다. 해발 2178미터로 타이지앙(台江), 지엔허(劍河), 룽지앙(榕江) 세 개의 현에 걸쳐있는 구이저우의 명산 중 하나다. 길은 레이꽁산의 험한 산줄기를 따라 이어져 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이 이어지는 오르막길 옆으로는 천길 벼랑이다. 발 아래로 안개가 짙다. 차가 안개에 묻혀 다른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다.

길은 레이꽁산 거의 상단부에서 능선을 따라 수평으로 나 있다. 산꼭대기까지 올라간 차가 능선을 따라 평지를 가듯 달린다. 곳곳에 눈이 쌓여 있다. 지대가 높다보니, 아래쪽에서는 비가 왔는데 이곳에는 눈이 쌓인 것이다. 눈길에 혹 차가 미끄러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그런 내 마음을 알 바 없다는 듯, 차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마구 달린다. 창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너무 차다. 옹송그리고 앉아 추위에 맞서보지만 온 몸이 덜덜 떨린다.

한참 수평으로 달리던 차가 이윽고 아래로 방향을 튼다. 이제부터 길은 내리막길이다. 이 내리막길을 다 내려가면 룽지앙이 있겠지 하며 추위를 견디고 있는데, 웬걸, 한참 내려가던 차가 다시 올라간다. 올라갔다 싶으면 다시 내려오고, 내려왔다가는 다시 올라간다. 올라가고 내려가는 길은 굽이굽이 휘어져있다. 창밖을 보고 있으면, 차창으로 산이 360도 돌아간다. 버스가 굽잇길을 회전하니 바깥 풍경이 저절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군데군데 길을 따라 산간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버스가 겨우 지나갈 만큼 좁디좁은 길이 마을 가운데로 나 있다. 장날인지, 산골 마을 사람들이 다 모인 것 같다. 길 주위로 상가의 천막이 어지럽다. 도저히 마을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산길을 굽이굽이 지나왔는데, 이렇게 사람들로 길이 막힐 정도니, 그런 마을이 인간의 세상 같지 않게 느껴진다. 인적 하나 없는 산길과 갑자기 나타난 북적거리는 마을의 대조 때문이리라.

차는 산속 깊이 숨어있는 마을들을 몇 개 지나고도 계속 달린다. 역시 굽잇길이다. 또 산을 오르고, 다시 내려오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돌고 돌아 마침내 제법 번화한 도시에 도착한다. 룽지앙이다. 다섯 시간을 쉬지 않고 빙빙 돌면서 달려온 한 셈이다.

"다섯 시간 돌아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버스를 내리며 내가 중얼거리자 아내가 피식 웃는다. 아마도 돌았다는 말에 춤을 연상했나보다. 너무 돌고 돌아 오다 보니 멀미가 나 속이 메슥거릴 정도다. 그래서일까, 버스에서 내려 땅에 발을 딛는데, 잠시 몸이 휘청 한다. 어디 다른 세상에 도착한 것 같이 아득해진다.

룽지앙, 먼지 자욱한 샹그릴라

룽지앙의 첫 인상은 '낡음'이다. 낡음은 과거와 통하고, 세월과 맞닿아 있다. 룽지앙이 낡았다는 것은 그만큼 세월의 흐림에서 빗겨 서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비록 최신 유행의 옷을 파는 가게들이 있고, 각종 전자제품이 번듯하게 거리를 장식하고 있지만, 그래도 룽지앙은 오래 된 도시다. 아니, 도시가 아니라 마을이라고 해야 될까?

룽지앙이 '낡음'인 것은 켜켜이 쌓인 먼지 때문이다. 먼지는 룽지앙 곳곳을 돌아다니며 날다가 제 앉고 싶은 곳에 가뿐히 내려앉는다. 그랬다가 또 작은 바람에도 제 몸을 날려 다른 곳으로 옮겨 앉는다. 주변 산에는 나무도 많고 그리 건조해 보이지도 않는데, 대체 이 먼지는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가로수로 심어놓은 용수(榕樹:벵골 보리수나무, 스펑나무) 잎사귀에도 먼지가 자작자작 내려앉아 있다. 이곳에도 비가 오면 저 낡은 풍경들이 새로움으로 다가올까?

오래 전 시안(西安)을 여행할 때였다. 시안은 진시황과 관련된 유적이 즐비한 도시니, 역시 오래 된 곳이다. 그래서일까, 시안 곳곳에도 먼지가 가득했다. 가로수로 심어놓은 버즘나무 넓은 잎에는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먼지가 잔뜩 내려앉아 푸른 잎이 잿빛으로 보일 정도였다.

용수 나뭇잎에도 먼지가 자작자작 내려앉아 있다.
▲ 먼지 자욱한 룽지앙 용수 나뭇잎에도 먼지가 자작자작 내려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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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시안에 비가 내렸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나가 본 거리의 가로수들은 그동안 내가 본 어떤 나무들보다 싱그러웠다. 어제까지의 잿빛 먼지 도시가 한 순간 싱싱한 생명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고비 사막 곁에 자리 잡은 도시라 늘 먼지에 싸여 있다는 시안이 빗줄기 한번으로 새로운 도시로 태어난 것이다. 그것은 대조가 가져다주는 아름다움이다. 낡은 먼지와 빗물에 씻긴 싱싱함의 대조 때문에 비 내린 시안은 더 아름다웠다.

그런데 룽지앙의 먼지는 아무리 비가와도 씻겨질 것 같지 않다. 너무 먼지가 많아서가 아니라, 룽지앙이 그만큼 오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도저히 갈 수 없을 것 같은 먼 산골에 자리 잡고 있어 먼지조차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아주 오래 된 시간 속의 어느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곳이기 룽지앙이다.

사실 버스로 다섯 시간이면 중국에서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그 다섯 시간 내내 산길을 돌고 돌아가야 하는 길이니, 실제 거리가 아니라 마음의 거리가 먼 곳이다. 그래서일까? 룽지앙은 꼭 숨겨진 샹그릴라 같다. 운남성의 샹그릴라(더친)는 큰 도로가 닦여 있고, 관광객으로 북적거리는 곳이다. 그래서 도시 곳곳마다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해 건물을 짓느라 법석이다. 샹그릴라라는 이름이 전혀 어울리지 않게 세속 같은 곳이 더친이었다면, 룽지앙은 산 속에 꽁꽁 숨어있는 마을이라서 더 샹그릴라 같이 느껴지는 지도 모른다.

샹그릴라는 이상향이다. 영국의 소설가 제임스 힐튼이 쓴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유래된 말이기는 하지만, 유토피아나 무릉도원과 무엇이 다를까? 유토피아가 '어느 곳에도 없는 곳'이라고 하니, 어쩌면 샹그릴라는 이 지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인간의 꿈속에만 존재하는 곳이리라. 없는 것을 그리워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일까? 나는 룽지앙에서 자꾸 샹그릴라라는 말을 떠올린다. 룽지앙이 그만큼 아득하고 아득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김치말이 국수 같은 스완탕

룽지앙은 조그만 도시다. 도시 곳곳을 다 돌아다녀도 두어 시간 남짓이면 충분할 정도다. 그래도 룽지앙은 고산 곳곳에 깃들어 사는 고산족 소수민족들이 모처럼 도시 나들이를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거리에는 쿵쾅쿵쾅 음악소리가 넘쳐나고, 먼지 자욱한 길을 소수민족 전통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닌다.

나는 천천히 룽지앙 시내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걷던 걸음이 멈춘 곳은 허름한 식당 앞이다. 오후라 다른 식당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데, 유독 그 식당에만 기다리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다. 무엇을 파는 식당일까, 궁금해서 들여다보니 국수가 렌지 위에서 바글바글 끓고 있다. 붉은 국물이 꼭 우리나라 김치 국물 같다.

김치말이 국수 같은 스완탕
▲ 스완탕 김치말이 국수 같은 스완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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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쌀국수냐?"

내가 묻자, 얼굴이 둥글둥글하게 생긴 주인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야. 이거 스완탕(酸湯)이야."

그 말을 듣자 어디에선가 이 지역 특유의 음식이라는 글을 본 기억이 떠오른다. 신 맛이 강해서 스완탕이라고 하는데, 꼭 우리나라 김치말이 국수와 맛이 비슷하다고 했던가.

배가 고프지는 않지만, 맛의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스완탕을 하나 시킨다. 먼저 국물을 떠 먹어본다. 정말 신 김치 국물 맛이다.

"면은 밀가루냐?"

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주인에게 묻는다. 주인은 외국인이 스완탕을 시킨 것이 신기했는지, 힐끔힐끔 바라보며 눈치를 살피다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응. 밀가루야."

국물 맛도 일품이고, 밀가루라지만 국수도 제법 입맛을 당긴다. 고프지도 않은 배에 한 그릇을 금방 뚝딱 해치운다. 아주 먼 곳에 와서 우리나라 음식을 먹은 듯, 기분이 좋아진다. 음식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별로 없다고 자부하는 나지만, 그래도 제가 태어난 땅의 음식 맛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나보다.

스완탕은 고추를 갈라 씨를 빼고, 소금과 빠이주(白酒)를 넣어 두 달간 숙성시켜야 국물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꼭 백주여야 하고, 고추도 이곳의 특산이어야 한다니, 오직 이 지역에서나 맛볼 수 있는 특별 음식인 셈이다.

식당 안에는 곱게 생긴 묘족 아이들이 맛있게 스완탕을 먹고 있다. 둘러보니, 대부분이 스완탕을 먹는다. 역시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인가보다.

묘족 아이들, 계란빵 아주머니, 돼지머리, 순대, 모두 우리네 삶과 비슷하다.
▲ 룽시장 풍물 묘족 아이들, 계란빵 아주머니, 돼지머리, 순대, 모두 우리네 삶과 비슷하다.
ⓒ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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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을 나와 길거리를 걷다가 계란빵을 파는 노점을 발견하고 또 하나를 산다. 먹는 즐거움이야말로 여행의 묘미 중 하나다. 아주머니가 내 말투가 이상한지,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저 한국 사람이에요."

내 말에 아주머니가 깜짝 놀란다. 평생 처음 한국 사람을 본단다. 그러면서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다.

"텔레비전에서 한국 드라마 많이 봤다. 참 재미있어."

이곳에도 한류 열풍이 빗겨 가지는 않았나보다.

계란빵은 찹쌀로 만들었다는데, 그래서 쫄깃쫄깃하고 입에 착착 감긴다. 뜨거운 계란빵을 후후 불며 가니, 놀이터다. 아이들 셋이서 놀이기구에 매달려 신이 나 있다.

내가 사진을 찍어도 되냐니까 배시시 웃는다.

"너희들은 무슨 민족이니?"

사진을 찍고 난 후 물으니, 한 아이가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회족, 뿌이족, 한족 아이들이 어울려 한 세상을 이루고 있다.
▲ 룽지앙 아이들 회족, 뿌이족, 한족 아이들이 어울려 한 세상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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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후이족(回族)이고요, 얘는 뿌이족(布依族), 얘는 한족(漢族)이에요."

이 아이들에게 민족이라는 개념은 어떤 의미일까? 어쩌면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구분일 뿐, 이 아이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아닐까? 한때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는 개념으로 얼마나 많은 외국인들과 우리를 구분지었던가? 그 구분 때문에 무시당하고 차별당하는 외국인이 있는 한, 우리도 또 다른 어떤 사람에 의해 차별받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고 돌아서며 내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들이 뒤섞여 떠올랐다 사라진다.

룽지앙에도 한글이 있다

발길이 시장으로 들어선다. 아마도 룽지앙에서는 가장 큰 시장인가보다. 없는 물건이 없다. 돼지머리를 늘어놓은 가게에서는 우리처럼 웃는 돼지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다. 말린 고추에 갈아놓은 고추까지 고추란 고추는 다 늘어놓은 가게도 있다. 물고기가 펄떡펄떡 튀어 오르는 함지박도 늘어서있고, 심지어 순대를 파는 곳도 있다. 우리나라 시장과 거의 같은 풍경이다.

시장통에 한 아이가 팔을 벌린 채 서 있다. 가만 보니, 팔을 벌린 것이 아니라 옷을 너무 입어 팔이 내려가지 않는다. 추위에 볼이 발갛게 얼어 있다.

너무 많은 옷을 입어 팔을 내릴 수 없다.
▲ 룽지앙 시장 아이 너무 많은 옷을 입어 팔을 내릴 수 없다.
ⓒ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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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을 나서 조금 더 걷자, 갑자기 눈앞에 익숙한 글자가 다가온다.

'조류전선'이라고 쓴 한글 간판이다. 언젠가 운남성 남쪽 지엔수웨이(建水)에서 본 간판이다. 옷을 파는 체인점인데, 중저가 제품이지만, 중국에서는 한국명의 상품이 질 좋은 제품의 상징처럼 인식되고 있다고 했던 기억이 떠올라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문을 열자 송혜교 사진이 커다랗게 붙어 있다.

"어서 오세요."

점원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물건을 사려는 것이 아니라서 서둘러 내 소개를 한다.

"나는 한국 사람이에요. 한글 간판이 보여서 들어왔어요."

한국 사람이라고 하는 말을 듣자, 점원의 눈이 동그래진다.

"한국이요? 정말이에요? 한국 사람 처음 봐요."
"저 간판을 뭐라고 읽는지 아세요?"

중저가 옷을 파는 체인점이란다.
▲ 룽지앙의 한글 간판1 중저가 옷을 파는 체인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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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예뻐 간판에 적었다고.
▲ 룽지앙의 한글 간판 2 한글이 예뻐 간판에 적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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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꼬치 맛 같은 김밥이지만 반갑다.
▲ 룽지앙의 김밥 떡꼬치 맛 같은 김밥이지만 반갑다.
ⓒ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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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묻자 점원은 멋쩍은듯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한국말로 '조류전선'이라고 읽어요."
"조 루 전 선?"

점원이 내 말을 하나하나 따라한다.

"루가 아니라 류."
"루"

내가 고쳐줘도 점원은 계속 '루'라고 읽는다. 그러게 읽으니 영 이상한 말이 되는 것 같다. 하긴 조류전선도 알 수 없는 말이니, 그게 그거다.

가게를 나와 룽지앙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다 또 한글 간판을 하나 발견한다. 조그만 옷가게인데, 간판에 '예쁜 옷 유행'이라는 한글이 곱게 적혀 있다.

"여기서 파는 물건이 한국 제품인가요?"

주인인 젊은 아주머니에게 묻자 아주머니는 아니라며, 그냥 한글이 예뻐서 붙인 것이란다. 그러면서 한국 드라마는 자주 본다며, 한국 사람인 내가 신기하다는 듯 뻔히 바라본다. 괜히 낯이 뜨거워진다.

'미안합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한국 배우처럼 잘 생기지 못해서.'

속으로 그런 말을 곱씹으며 나는 가게를 나와 또 거리를 걷는다. 한참을 걷다 보니, 좁은 뒷골목 안에 한국 식당도 있다. 한글 간판은 아니지만, 파는 것은 한국 음식이다. 김밥도 있다. 한 접시 시키니, 아주머니가 아주 오랜 시간동안 정성들여 김밥을 말아 내온다.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고 하니, 더 부담이 됐나보다.

김밥은 찹쌀로 만들었는데, 씹기 힘들 정도로 질기다. 찹쌀밥을 꼭꼭 눌러 만들어서 더 그런 것 같다. 속에는 소시지와 오이만 넣었다. 곁들여 고추장을 준다. 김밥을 고추장에 찍어 먹으라고 한다. 꼭 떡꼬치를 먹는 것 같다. 맛보다는 신기함으로 한 접시를 다 먹어치우고 주인에게 한마디 한다.

"맛있어요."

내 말에 아주머니가 환하게 웃는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나보다.

"한국 김밥도 이렇게 만드나요?"
"아니요. 한국은 찹쌀로 만들지 않아요. 그냥 쌀로 만들어요."

말이 통하지 않아 내가 글자를 써가며 설명을 하자, 그제야 알아들었는지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인다. 속에 단무지도 넣고, 고기도 볶아 넣는다는 설명까지는 도저히 역부족이다.
아득하고 또 아득해서 이 세상 같지 않은 곳 룽지앙에서 한국과 관련된 것들을 만나는 신기한 경험을 한 그 날 밤, 나는 마치 룽지앙이 고향 같다는 느낌을 갖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낯설고도 익숙한 것들과 마주친 경험 때문이었을까?

일요시장, 소수민족의 잔치

일요일이면 룽지앙 버스 터미널 주변으로 재래시장이 선다는 말을 듣고 찾아 나선다. 길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터미널 근처에 이르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소수민족의 전통 복장을 한 사람들이 상당수다.

소리소리 지르며 야채를 파는 사람에, 먹음직스러운 튀김을 튀겨내는 곳도 있다. 짐 보따리를 지고 온 분홍색 저고리 고운 아주머니에, 솜씨 좋게 마두를 빚어내는 할머니,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하게 큰 칼을 두 손으로 눌러 잡고 쉴 새 없이 칼국수를 썰어내는 사람, 저울 눈을 맞추느라 실눈을 뜨고 집중하는 아낙네, 삶의 풍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주름진 얼굴에 동족의 전통 복장이 잘 어울리는 할머니도 있다. 그 하나하나가 일요 시장에서는 그대로 풍경이고 삶이 된다.

일요시장에서 만난 할머니. 세월이 거기 주름살에 머물고 있다.
▲ 룽지앙 소수민족1 일요시장에서 만난 할머니. 세월이 거기 주름살에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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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무늬 모자에 초록색 저고리를 입은 아주머니 한 분의 모습이 너무 고와서 카메라를 들이댄다.

"사진 한 장만 찍을게요."

내 말에 아주머니가 생긋 웃더니, 살짝 돌아선다. 찍으라는 건지, 안 된다는 건지 알 수가 없는 표정이다. 내 나름대로 긍정의 의미로 해석하고 찰칵 셔터를 누른다.

일요 시장의 아낙네들
▲ 룽지앙 소수민족2 일요 시장의 아낙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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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는 그런 나를 향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씨익 웃어준다. 오래 전, 기억 속에 남겨두고 잊었던 우리네 시골 마을의 누님과 같은 표정이다. 가만 둘러보니, 시장에 나온 사람들 모두 어린 시절 내가 오일장에서 마주쳤던 기억 속의 사람들과 닮아 있다.

살짝 웃어주던 아주머니의 모습이 곱다.
▲ 룽지앙 소수민족3 살짝 웃어주던 아주머니의 모습이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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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어귀로 돌아 나오자, 길가에 수이족(水族) 아주머니들이 손을 치마 주머니에 찌르거나 뒷짐을 진 채 무엇인가들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아주머니들이 보고 있는 것은 텔레비전이다. 화면 속에서는 소수민족 춤과 노래가 한창이다.

자신들이 추는 춤을 화면을 통해 보며 신기함을 느끼는 그네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실물보다 가공된 허상이 더 신기한 것일까? 자본은 늘 실물 같은 허상을 만들어 돈을 번다. 사람들은 허상을 실물인 것처럼 여기고, 자신의 주머니를 턴다. 아마도 저 아주머니들 마음  속에는 텔레비전 한 대 쯤 사들고 산굽이를 넘어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는 모습이 새겨져 있을 지도 모른다.

텔레비전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수이족 아주머니들
▲ 수이족 아주머니들 텔레비전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수이족 아주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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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지앙 동족마을의 한가로운 풍경

보기만 해도 흥성거리는 룽지앙 일요시장을 뒤로하고 오토바이 택시를 잡는다. 처지앙 동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이다. 처지앙산바오퉁짜이(車江三寶侗寨)는 중국 최대의 동족 밀집 마을이다. 마을이 상·중·하 셋으로 나뉘어 이루어졌기 때문에 삼보채(三寶寨)라고 부른단다.

처지앙 동족 마을의 고루
▲ 동족 고루 처지앙 동족 마을의 고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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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면 동족 사람들이 환영 음악을 연주해주고, 술도 권한다는데, 비수기인 겨울이어서인지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입구에 들어서면 동족 마을의 특징인 거대한 고루(鼓樓)가 이방의 나그네를 맞아줄 뿐이다. 고루 옆의 상가에도 사람이 없다. 주인도 그냥 동네 사람 맞이하듯, 아무 말 없이 우리를 쳐다볼 뿐, 이내 자기 하던 일에 눈길을 주고 만다.

그저 스적스적 마실 구경하듯 동족 마을을 돌아다닌다. 강가에 자리 잡고 서 있는 정자조차 한가하다. 말이 끄는 수레를 몰고 한 사내가 강가로 난 길을 따라 지나간다. 그 사람도 우리를 심드렁하니 바라볼 뿐이다. 마을 집들은 모두 다 텅 비어버린 것처럼 인적이 없다. 그냥 이 집 저 집 호기심이 이는 대로 돌아다닌다.

그가 가는 곳은 먼 과거일까?
▲ 처지앙 강가를 달리는 마차 그가 가는 곳은 먼 과거일까?
ⓒ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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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에 제 모습을 비춰 보이고 있는 오래 된 집 앞에서는 한동안 멈춰 서서 그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기도 한다. 마음이 한없이 느긋하고 편안해진다. 처지앙 동족 마을에서는 급할 것도 바쁠 것도 없는 마음이 된다.

좁은 골목을 돌아다니며, 그 어디선가 어린 시절 술래잡기 하던 나의 옛 모습을 발견할 것 같은 추억에 빠져보기도 한다.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다 버리고 온 풀무 같은 물건들을 보며 아련해지기도 한다.    

마을을 돌아보고 나오는데, 길 끝 공터에 사람들이 모여 음식을 만들고 있다. 사람들을 볼 수 없었던 이유가 이곳에 모여 있어서였구나 하고 짐작하며 다가간다. 커다란 중국식 솥이 여러 개다. 스완탕을 만들고, 돼지고기를 볶는다.

장례식 준비에 바쁜 동족 사람들
▲ 처지앙 동족 마을 장례식 준비에 바쁜 동족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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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 하나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묻자 요리를 하던 아저씨기 씨익 웃는다.

"아니야. 동네 노인께서 돌아가셔서 장례 준비 중이야."
웃는 것 보니 호상인가보다. 잠시 구경을 하다 자리를 뜨려는데 아저씨가 한마디 한다.

"기다렸다가 음식 먹고 가라."
"아니요.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선다. 찾아온 손님에게 따스한 마음을 나누어주는 말 한마디만으로도 푸짐한 음식 대접을 받은 것 같다.

처지앙 동족마을을 나서며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고루를 바라본다. 저녁 햇살 속에 고루는 의연하게 빛나고 있다. 마치 숱한 세월을 오지의 땅에서 굳세게 견뎌 온 소수민족인 동족의 삶처럼, 그렇게 동족 마을은 먼지 자욱한 땅에서 오늘을 견디고 있는 것 같다.

물에 비친 모습이 아름다운 처지앙 동족 마을
▲ 처지앙 동족 마을 풍경 물에 비친 모습이 아름다운 처지앙 동족 마을
ⓒ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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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룽지앙, #처지앙 동족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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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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