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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2월 종희는 서울로 올라왔다.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서울에 적응하는 것은 그녀의 노력이었지만, 보살피고 이끄는 것은 나의 기쁨이었다.

4월이 지날 무렵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억눌렀던 감정들이 거대한 파동으로 밀려왔다. 여름이 끝날 무렵 나는 결혼부터 하고 대학원을 마치면 안 되느냐고 칭얼댔다. 그 해 겨울 아주머니 가게가 어려워지자, 그녀는 대학원 과정을 포기하고 나와 결혼했다.

대학원에 간 것은 광주를 벗어나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었다고, 아내가 고백했을 때,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당시에는 어려서 그때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본인조차 모르는 일이었다.

그 광기, 그 냄새, 그 낙망어린 웅얼거림. 부친이 어린 딸에게 남겨놓았던 원한과 저주의 긴 그림자. 결혼 후 그것들이 오래된 세월의 막을 뚫고 올라왔을 때, 나 역시 살이 떨리는 고통과 분노로 몸서리쳤다.

첫 아이를 임신한 기쁨도 잠시였다. 아내에게 달려든 공포와 불안. 멀쩡한 대낮 집 앞에서 남편을 기다리던 최미애씨가 쿠데타군이 머리를 겨누어 쏜 총에 피살되었던 것처럼, 아내는 두려움에 혼자 집밖을 나가지 못했다. 그녀는 임신 8개월의 몸이었다.

처음에는 임신 초기에 겪는다는 예민함인 줄 알았다. 아내 또한 그러한 고통과 공포, 두려움들이 잠재되어 있는 줄 몰랐던 것 같다.

당혹스러움과 미안함, 남편과 시댁에 대한 죄의식, 태어날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줄지 모른다는 불안한 초조함. 그리고 또 어떤 흉터들이 남아있을까 싶은 불길함에 아내는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하루 종일 아파트에 갇혀 보낸 아내의 손을 잡고 밤마다 산책하며, 새로운 하루를 시작했다. 한낮의 긴 시간 그녀는 혼자 무엇을 했을까. 피곤에 절어 쓰러진 새벽, 잠결에 깨어보면 아내의 눈물로 내 손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

지나고 보면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녀를 사랑했다.

어머니는 우리의 결혼을 탐탁지 않아 했다. 집에 처음 데려갔을 때부터 경계심을 늦추지 않던 당신이었다. 결혼하겠다고 말하자, 감추었던 속내를 단호히 드러냈다.

- 난 전라도 며느리는 싫다.

어머니 그게 무슨 말예요? 지역 편견이 없을 듯했던 당신의 한 마디는 충격이었다. 전라도출신 남편과 평생 잡음 없이 살았던 어머니였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가치와 판단에 따라 무엇으로도 메우기 힘든 골이 있었다.

네가 어디가 모자라서 그런 결혼을 하려느냐고 답답해했을 때, 그녀 오빠의 죽음과 연관되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죽은 처남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던가?

나는 그녀를 보았지만, 당신은 그녀가 속한 집단을 보았다.

요즘 애들은 참 별나게 군다며, 들를 때마다 타박을 놓던 어머니는 해산달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감정들이 시간의 물살에 쓸려간다. 그렇지만 어떤 감정들은 의식 아래로 침전되어 뻑뻑한 앙금으로 가라앉는다. 인지하지 못한 채 살던 어느 날 그곳에 발이 푹 빠질 때의 당혹감이란. 묵은 감정들이 고스란히 떠오르면서 고통스러운 기억을 재구성한다.

어머니는 전라도 출신 남편 때문에 받았던 상처 찌꺼기들을 버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그로 인해 다시 아들에게 새로운 상처를 남기리라고는 왜 생각하지 못한 것일까.

첫 애가 아들이었던 것은 그마나 다행이었다. 분만 직후 죽음의 땅에서 생환한 듯 안도하는 아내의 표정을 보며 마음이 저릿했다. 개인적으로는 딸이기를 바랐다.

- 등하야. 나 지금 올라가면 안 되제? 안아보고 싶어 미치겠다.  

그 사이 삼촌은 새롭게 돌연변이 중이었다. 구속되지 않았고, 특별히 내세울 육체적 부상도 없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5·18 관련단체 활동에 소극적이었던 그였다.

그런데 전남도청 분수대 앞에 루이 16세의 목을 쳤던 것과 동일한 모델의 기요틴을 세우겠다고 선언했을 때, 나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전두환 노태우 체포결사대원'이라며, 대학생들과 함께 서울에 나타났을 때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고 직감했다.

밤늦게 머리띠도 풀지 않은 채 집에 와, 전직대통령의 집 근처 전경들과 난투극에 가까운 몸싸움을 했다고 무용담을 늘어놓을 때는 술 냄새까지 풍겼다. 함께 투쟁하는 동지들이라면서 대학생들을 데려오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참 늦었어도, 쿠데타 주모자들을 처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것이 당사자의 묵은 한을 푸는 일이라 해도, 부모와 자식과 형제와 친구와 애인과 누이와 남편과 아내의 복수라 해도 괜찮았다. 또한 잘못된 일은 바로 잡아야 한다는 정의감의 발로였거나, 역사를 바로 세우는 힘든 노동일이라고 해도 좋았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리라 믿고 넘겨준 무력으로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으므로, 당연히 가장 준엄하게 처벌했어야 했다. 할 수 있다면 우마를 끌어다가 시청 광장 앞에서 능지처참이라도 시켜야 했다. 그것은 신이 국가를 직접 지배하지 않는 한 반드시 관철시켜야 할 사회원리였다.

그런데도 지금은, 진실을 관장하는 신이 밀린 숙제를 하느라 바쁘므로, 이해관계가 소멸되었을 때 나타날 역사의 신에게 맡기자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 순간 진상규명은 밝혀야 할 역사적 당위가 아니라, 서지학이나 고증학, 문서감정 등 특수집단이 다루어야 할 전유적 장난감으로 던져지게 될 것이다.

권력이 의무를 거부하면 학생 시민들이라도 나서서 관철시켜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태도였다. 그렇지만 삼촌이 그렇게 나타난 것은 무언가 이상했다. 항쟁과정에서 총을 들었던 사람으로서, 지금껏 고통 받았던 자로서 가해자를 처벌하자고 나서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삼촌의 모습은 주황색 이불보자기를 낙하산이라며 목에 걸고 뛰어내리려는 아이 같았다. 그곳이 장독대 계단이나 서랍장 위라면 충격을 조금 받는 것으로 끝나겠지만, 고층아파트 옥상이라면 문제는 정말 심각했다.

첫 아이 백일 잔칫상은, 흥분한 삼촌의 열변으로 인해 시국강연회장이 되어 버렸다.

모두들 그가 묘약을 먹고 회춘한 모양이라고 확신했다.

기타줄 위를 옮겨 다니며 코드를 바꾸는 손의 불안정과 신경 거슬리는 쇠줄의 날카로움으로, 그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아내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안 되면 혼자서라도 광화문 세종대왕 상 앞에 기요틴을 설치하겠다고 했을 때, 보다 못한 어머니가 시동생에게 한 마디 했다.

- 손자 백일 날 들을 소린 아니네요. 

그날 주인공은 분명 아이가 아니었다.

절정은 저녁 무렵 대학교 서클동기들이 도착했을 때였다. 항쟁의 영웅을 직접 만난 녀석들은 때늦은 감격으로 찬양의 노래를 지어 바쳤다. 삼촌은 드디어 사슬을 끊고 풀려난 프로메테우스로 부활했다.

- 충잘로에서 공수부대 그 새끼들하고 거시기 할라꼬, 각목을 움켜쥐고 달려가는데! 잠깐! 여기까지. 

무용담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화장실에 간다고 일어선 후 귀환하지 못했다. 손자를 보러 갔다가 잠에 곯아떨어졌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게 삼촌이 내게 보여주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객기였고, 열정이었다.

그러나 광장에는 기요틴이 세워지지 않았다.

삼촌이 길길이 날뛰었지만, 놀란 검찰이 먼저 칼날을 들고튀었던 것이다.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는데 어떤 수단방법을 사용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으므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옐리네크나 켈젠, 라드부르크 등 생경한 학자들 이름이 튀어나왔으나 결론은 간단했다. 시끄러! 이긴 놈이 장땡이야! 

독재 권력의 오래된 하수인에게 정의를 기대한 것 자체가 우스운 자의 꿈이었을 뿐이다.


태그:#광주항쟁, #성공한 쿠데타, #공수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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