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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는 1997년 4월 27일에 결혼해서 2011년인 현재까지 만 14년을 함께 살고 있다.  연애시절엔 '좋아한다', '사랑한다' 등 나름대로 머리를 쥐어짜며 다양한 사랑의 표현도 해보았던 것 같은데 요즘은 일상의 대화가 의·식·주 관련, 특히 식에 대한 대화가 거의 전부인 듯하다. 남편이라기보다는 내가 '밥 해주어야 하는 사람'으로 여기게 된 게 언제부터였을까?

'사랑한다'는 말보다 '밥 먹었어? 배고프면 얼른 식사해야지'라는 일상의 대화들이 훨씬 편하고 자연스러워진 건 우리 부부의 사랑이 정말 식어버렸기 때문일까. 하지만 재미가 없어져도 괜찮다.

알콩달콩 재미가 없어도 우리 부부에겐 다른 부부에게 없는 아주 강한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부부가 반드시 불행하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야만 하는 '의무'같은 것이다. 당연히 우리 부부에게 '이혼'이란 단어는 하늘이 두 쪽나도 전 세계에 쓰나미가 몰려와도 입에 올릴 수 없는 말이다.

'이혼'이란 말을 절대 떠올릴 수 없는 그 특별한 이유

가족사진.
 가족사진.
ⓒ 임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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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올해 중학교 1학년이 된 아들과 초등학교 5학년이 된 딸을 두고 있다. 그런데 우리 부부에게 중학교에 입학한 아들은 좀 특별하다. 이름은 승혁이라고 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누구나 다 가는 중학교를 우리 아들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결정 끝에 입학했다.

남편과 나는 큰 결단을 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아들은 지적장애 3급 장애아이다. 만 5살 때 정신지체 3급 판정을 받았다. 우리 부부가 서로에 대한 애정표현에 무뎌지고 말수가 몹시 줄어들었던 것도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아들에게 장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어렴풋이 생겨났던 (아들이 36개월일 무렵) 때부터 평탄하고 지루하기까지 할 것 같은 우리 부부의 단조로운 생활도 알 수 없는 불행의 터널로 서서히 들어서게 된 것 같다. 사실 남편은 장난기도 많고 아직도 딸이 보는 만화영화를 보면서 함께 웃을 정도로 '천진난만한' 사람이었다.

아들, 딸을 둔 우리 4가족은 경제적으로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저축을 열심히 한 덕택에 결혼한 지 2년만에 스물다섯 평의 아파트도 사서 아늑한 우리 가족만의 보금자리도 마련했다. 워낙 직장에서도 둥글둥글한 사람으로 통하는 남편이 가끔 회식을 핑계로 너무 늦게 귀가한다거나, 아니면 가부장적이고 좀 보수적인 집안환경에서 4남의 막내로 자란 남편이 4인 가족으로 도시생활에만 익숙했던 나와 생활방식이 달랐기에 부딪혔던 것을 빼면 우리 부부에게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아들에게 장애가 있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것은 두 부부가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노력해보고 대화해보려 해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아니 대화는커녕 당시 남편은 나와 대화 자체를 피했다. 자식에게 장애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네 살이 되어도 "엄마" 소리는커녕 아들에게 옹알이도 들어보지 못한 채 하루 종일 장난감 바퀴를 굴리며 혼자 웃으며 노는 어린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이 타들어갔다.

행여 병원에서 검사라도 받자고 말하면 남편은 펄쩍 뛰며 아이가 늦될 뿐인데 무슨 소리냐며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수개월의 시간이 흘러도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들의 모습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결국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추측하기에는 더더욱 겁이 나는 그 결론에 내 생각이 도달하고 있을 무렵, 나는 어렵게 남편에게 말을 꺼냈다.

"혹시 우리 승혁이에게 장애가 있는 건 아닐까?"

남편의 반응은 이전보다 훨씬 격렬했다. 아니 다시는 그런 말 꺼내지도 말라며 그 이후 대화를 단절해 버렸다. 그래도 부부가 함께 살아가는 이상 하루도 아무 말 없이 살아간다는 건 힘들었다. 더구나 이미 나에게는 두 살 아래의 딸이 있었기 때문에 아들에 대한 고민을 붙들었다 잊어버렸다 하는 상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한심했다. 무조건 병원이나 전문가를 찾아가서 아들에게 검사를 받게 했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장애아'의 부모가 된다는 건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순순히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남편과 내가 그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떠올리기조차 싫다.

당시가 우리 부부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고 피하고 싶은 순간이었고 누군가의 절대적인 도움이 꼭 필요한 시기였다. 말은 없어도 장난은 걷잡을 수 없이 심해지는 아들 때문에 앉아서 고민만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한마디도 하지 않는 아들과 방구석에 앉아서 눈물로 세월을 보내느니 차라리 온종일 바깥에 나가 있기로 했다. 남편을 출근시키면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딸아이를 둘러업고 대충 주먹밥을 싸서 도시락을 챙기고 하루 종일 동네 놀이터에서 아들과 시간을 보냈다. 시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계셨고 친정어머니는 맞벌이하는 새언니 대신 두 손자를 돌보시느라 더더욱 시간내기 어려웠다.

결국 나 혼자였다. 더구나 장애가 있을지도 모르는 아들과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낸다는 건 엄청난 체력을 요구했다. 집에서 하던 부업도 접었다. 그래도 동네 놀이터에서 이 아이, 저 아이 만나면서 사회성을 키우면 나아지리라 믿었음에도 아들은 갈수록 다루기 힘든 아이가 되었다. 일단 누군가 다가오면 흙을 뿌리고 공격적인 행동을 취했다. 언어가 안 되니 아마도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부담스러웠나 보다. 열 네 살이 된 지금도 낯선 사람이나 또래 친구들이 다가오면 부담스러워서 슬그머니 저 혼자 있을 만한 곳으로 피해버린다. 지금까지도 노력하고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인데도 좋아지기는 참 어렵다. 

그런 와중에 겨우 남편을 설득시켜서 함께 병원에 가서 아이에게 검사를 받게 한 것은 우리 부부가 아들 때문에 대화를 잃어버린 후 다시 함께 힘을 합치는 계기가 되었다. 일반 아이들도 병원 가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을 텐데 장애가 있는 아이에게 병원검사를 받게 하는 일은 더더욱 어려웠다.

울며 보채며 잠들지 않는 아이를 수면제까지 먹여서 잠들게 한 후 MRI기계에 들여보내는 순간, 몇 달 동안 아이 걱정에 제대로 쳐다본 적 없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편도 나만큼이나 지쳐 있었고 나도 남편만큼 지쳐 있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아직도 우리를 더 지치게 할 만한 일이 많이 남아 있음을 예감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이제부터 고생의 시작일 거라고 막연히 예감하면서···.

고생의 시작...그러나 희망이 있기에

결혼반지.
 결혼반지.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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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생스럽더라도 이렇게 남편과 내가 힘을 합치면 모든 고난을 넘을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이 생겼다. 도대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용기가 어디서 생겨났을까. 아마도 그건 내 옆에 있어줄 그 누군가의 힘 아니었을까. 바로 남편. 검사 이후 남편도 아들 때문에 약해지려는 마음을 부정하려고 괜히 화도 내고 짜증도 냈지만 결국엔 나의 위로에 마음을 의지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힘든 세월을 보냈다.

아이가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보기 힘드니 나가달라고 어린이집에서 문전박대를 당할 때 남편은 웃으며 "괜찮아, 더 좋은 어린이집 보내면 되지 뭐"하고 위로해 주었다. 대여섯 번 어린이집을 쫓겨나다 보니 나도 좀 뻔뻔해지고 나중엔 큰소리도 쳐 보았다. "장애아인 우리 아이가 문제가 아니라 이런 아이들을 받아주지 않는 어린이집이 더 문제"라며···.

그런데 나중에 정말 남편의 말처럼 더 좋은 어린이집을 찾게 되었다. 바로 우리가 살던 동네에 새로 생긴 국공립 어린이집이었는데 다행히 장애아 통합어린이집이었다. 아들을 입학시키려고 하니 복지카드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들에게 종합검사를 받으라고 권유한 병원의 의사선생님께 찾아가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어렵지 않게 복지카드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너무 무거웠다. '정신지체 3급'이라고 쓰인 병원의 보랏빛 직인이 아들의 미래를 짓누르는 주홍글씨 같았다. 결국 우리 두 부부의 희망이었고 첫 아이였고 웃음을 주었던 아들이 장애인이 된 것이다. 장애판정을 받고 아들과 함께 병원에서 돌아오던 날 눈물이 앞을 가린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할 정도로 펑펑 울면서 집에 돌아오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런데 남편은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야속하다. 어쩌면 아들의 '불행' 앞에서 저렇게 무표정하다는 게 분노스러웠다. 그런데 그것이 남편의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이었고 고통을 이겨내며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아들과 함께 하루 종일 싸우고 놀이터에서 뒹굴고 숨가쁘게 한번도 해 본적이 없는 장애아 육아의 부담 속에서 괴로우면 일단 눈물부터 나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그냥 말없이 묵묵히 직장을 다녔다. 아들 앞에서 하루하루가 무력해지기만 하던 우울함에 아침을 제대로 차려주지 못하는 날이 점점 많아져도 남편은 말없이 출근을 했다. 대신 담배를 더 많이 피우기 시작했고 늦게 오는 날도 많아졌다.

하지만 또 다음날엔 나에게 한마디 말없이 출근을 했다. 차라리 함께 울어주고 함께 싸워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나로서는 세상의 절벽 끝에 선 것처럼 정말스럽고 외로웠다. 누구보다도 가장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남편은 그렇게 철저히 혼자만의 침묵 속으로 내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쳤다. 요즘은 나보다 더 수다스러울 정도로 말이 많아졌지만 그때는 하루 종일 거의 말하지 않는 남편이 원망스럽고 미웠다. 그렇다고 육아나 가사에 도움을 준 것도 아니었다. 혼자서 베란다에서 먼 하늘을 보며 담배를 무는 남편의 뒷모습이 참 낯설게 느껴졌다.

울지 않았던 남편, 사실은...

사실은 남편도 나처럼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입장에서는 차라리 함께 울어주고 서로의 탓을 하며 원색적으로 싸우기라도 했다면 차라리 속 시원했을 텐데 자기 혼자서만 감당할 수 없는 고민의 무게를 짊어지려고 하는 남편의 모습이 속상하기만 하고 미련해 보였다. 장애가 있긴 해도 아들은 무럭무럭 커갔다. 특히 늘 어디론가 나가고 싶어했다.

남편은 말은 없는 대신 아들과 함께 매일 어디론가 나갔다. 아들 백일잔치를 끝내고 구입한 10년 차 중고차가 우리 가족에게 가장 사랑받던 시기였다. 평소 무뚝뚝하기도 하고 말수도 적은 남편이었으니 아들과 놀아주는 일이 서툴기만 했다. 더구나 지적장애 3급이라는 판정까지 받은 아들과 제대로 노는 방법을 배워본 적이 없었기에 더더욱···.

그래서 우리 가족은 저녁을 먹으면 무조건 드라이브를 했다. 남편의 저녁 시간이 허락하는 한 서울 자양동에서 구리시나 일산 경기도 광주까지 안 가본 곳이 없었다. 아들이 학습능력은 느려도 길눈이 밝고 서울교통지리를 잘 아는 것은 아빠와 수없이 했던 드라이브의 추억 덕택인 것 같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사람이 많은 곳은 자주 가지 못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말 못하는 아이를 잃어버릴까 봐 두렵기도 했고 말과 행동이 남다른 아이에게 향할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얼마 전 한 TV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아이가 장애아임을 고백한 가수 김태원씨처럼 우리 가족도 이 나라에서 장애아를 데리고 살아가는 일이 두려웠다.

그래도 남편은 여전히 예전처럼 딸과 함께 만화를 보면 깔깔거리고 웃고 아들에게 장난치는 것을 좋아했다. 장난과 애정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할 때가 많은 탓에 아들은 아빠의 장난에 매번 화를 내고 중학생이 된 지금도 화를 내곤 하지만 난 예전처럼 지금도 남편의 장난을 말리지는 않는다. 그것만이 남편이 아들에게 다가가는 사랑의 방식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평범한 부모에서 장애아 부모가 된다는 것

평범한 부모에서 장애아 부모가 되는 감당할 수 없는 힘든 시간을 겪었고 지금도 그 마음고생은 고스란히 진행 중이지만 그래도 우리 부부는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지금은 틈만 나면 남편은 아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고, 집 근처 한강에 데리고 나선다. 아직도 사람들과 어울림이 어렵기만 한 아들과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의 전형인 남편은 늘 사람없는 한적한 곳을 찾는다. 반면 나는 조금이라도 아들의 사회성에 도움이 될까 싶어 될 수 있으면 사람 많고 복잡한 곳만 가게 된다.

가끔 사람들의 아들에게 향하는 시선이 불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다. 나와 함께 이 험난한 세상의 편견에 맞서줄 남편이 있고, 누구도 가를 수 없는 튼튼한 가족의 사랑이 있기에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딸아이는 가끔은 내가 오빠를 더 많이 챙긴다고 불평하긴 해도 나가면 제 오빠를 끔찍이 챙겨주고 오빠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귀신같이 알고 있다.

다만 요즘 사춘기에 접어들어 가뜩이나 친구하나 없고 말을 안 하는 아들이 자꾸 혼자만 있고 싶어 하는 모습이 안타까울 때가 많다. 그래도 가끔은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 세상 많은 부부들처럼 우리도 싸울 때도 많고 서로를 당장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미워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 부부에게는 반드시 행복하게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 아들 승혁이에게 행복한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 부부 최고의 목표이다. 또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아들도 언젠간 좋은 배필을 만나 결혼을 해서 부부로서의 참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런데 어쩌면 그 바람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렇게 때문에 지금 승혁이에겐 남편과 나, 우리 두 부부의 모습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여지는 부부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 부부의 행복은 더 절실하고 소중하다.

남편과 나는 아들에게 부부라는 이름의 행복이 무엇인지 평생 동안 가르쳐 줄 의무가 있다. 그리고 아들보다도 건강하게 오래 살면서 서로를 아껴줄 것이다. 아들에게 부부라는 단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닫게 해 주고 싶다.

아들이 우리의 진심을 깨달아 줄 날이 올 수 있을지 모르고 또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아들의 머릿속에 부부라는 단어가 가족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단어라고 깨닫게 되는 그날까지 우리 부부는 늘 서로 아끼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


태그:#부부의 날, #장애아 부모, #부부의 사랑, #부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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