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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막길은 다시 평지로 이어졌다. 아침에 마을에서 넘어올 때, 그곳에는 수십 대의 탱크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 뒤로는 수많은 군용천막들이 자리 잡았다.

 

택시가 평지로 들어섰을 때 사피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공터에 불빛들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그곳은 적막한 어둠뿐이었다. 임시검문소 또한 자취가 없었다.

 

택시기사도 의식적으로 서행했지만 전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면, 검문이 실시되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이럴 때는 오히려 검문이라도 당했으면 싶었다. 이스라엘군의 공격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가장 확실한 징표였다.

 

- 왜 아무것도 없지?

 

불안해진 운전기사도 전조등을 위아래로 흔들어보았다. 그렇지만 적막한 어둠만 흩어졌을 뿐이다. 공터를 무심히 지나치자, 택시 안의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았다. 이모부 걱정이 빈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많은 탱크들이 나블루스로 진격했다면 오늘 밤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칠 것인지. 

 

다음 순간 사피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면 저들은 어느 길로 갔다는 말이지? 떠오른 의문은 그것이었다. 나블루스로 갔다면 중간에라도 진격하는 군대와 마주쳐야 정상이었다.

 

아무리 시오니스트들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해도, 탱크가 멀쩡한 도로를 놔두고 산을 넘어갔을 리가 없었다. 그 많은 괴물들이 모두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순간 가슴이 답답해지며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그럴 리 없어. 다른 길로 우회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철수했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불안한 떨림은 도저히 진정되지 않았다.

 

평지가 끝나면서 도로는 다시 오른쪽 언덕길로 이어졌다. 언덕 꼭대기에는 이아레브불법정착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미더덕 껍질처럼 우둘투둘하게 솟아있는 저곳은, 지난 90년대 초부터 밀려든 러시아계 유대인들을 위해, 미국정부가 지급 보증한 원조금으로 세워졌다.

 

상황이 정상이라면 오늘 밤 정착촌 입구에는 임시검문소가 가동되지 않을 것이다. 아침에도 검문은 없었다.

 

택시가 불법정착촌이 관문처럼 자리 잡은 언덕 귀퉁이를 돌아갔을 때였다. 절망감에 택시 안 사람들은 일제히 신음을 터뜨렸다. 차량의 붉은색 미등들이 수십 미터를 이어진 채 언덕길을 메우고 있었다.

 

- 이게 무슨 일이지? 아침엔 검문 안 했는데.

 

붉은 카피예를 두른 남자가 불안 가득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 교통사고 난 게 아닐까? 

 

파타의 검은 카피예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맞장구를 쳤다.

 

택시는 긴 대열의 새로운 꼬리로 자리를 잡았다. 운전기사가 라디오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려보았지만 누구도 상황을 알려주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답답함을 견딜 수 없는 듯 차의 시동을 끄고는, 귀동냥이라도 하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언덕 주변은 차의 꽁무니를 따라 온 어둠에 완전히 점령당했다. 땅은 식어가는 대기를 데우려 황급히 열을 발산시켰지만 역부족이었다. 차갑게 무거워진 공기가 침울한 소리와 함께 계곡으로 흘러갔다. 파묻힌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아니었지만, 하데스가 다스리는 명계가 멀지 않은 듯 느껴졌다.

 

그날 천국으로 떠나는 남편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던 것은, 끝내 한으로 남았다. 곁에서 함께, "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이다"라고, 샤하다를 암송하지 못했고, 생명 열이 사라지는 그의 머리가 메카를 향하도록 잡아주지도 못했다.

 

부활의 믿음을 확언하는 야신 장을 읽어주는 것은 더더욱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남편은 평안한 안식을 취했을 것이다.

 

결혼예식 시간이 되었는데도 그를 볼 수 없었다. 불안감에 손이 자꾸 오그라들었다.

 

엄마는 초조해하지 말라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이모가 기분 전환을 위해 노래를 불렀다. 친구들은 춤을 추며 분위기를 북돋았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갑자기 복도가 부산스러워졌다. 엄마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간 지 얼마 후였다.

 

한 남자가 남편 친구들에게 부축되어 대기실로 들어왔다. 일본인 같았다. 그는 징징거리면서, 울면서, 흐느끼면서 맞지 않은 가면이라도 뒤집어 쓴 듯 계속 얼굴을 쥐어뜯었다. 아무도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그를 떠넘기고는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도대체 저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 성스러운 결혼식을 축복해주지 못할망정 무슨 터무니없는 무례란 말인가. 분명 바깥의 소음과 연관된 자임에 틀림없었다. 게다가 그는 남편의 결혼 예복으로 보낸 와이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몹시 불쾌했다.

 

사색이 된 엄마가 휘청거리며 들어온 때는, 징징거리며 울던 남자가 잠든 후였다.

 

알라 훔마 이그피르 라후! 알라 훔마 이르하므 후!* 알라 훔마 이그피르 라후! 알라 훔마 이르하므 후!"

 

순간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그 후의 일은 아무것도 기억에 없다.

 

꼬리를 물고 이어진 자동차 미등들이 언덕을 휘감았다. 살이 발린 붉은 뱀의 거대한 척추 같았다. 그 너머에는 불법정착촌이 방울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주황색 나트륨경계등이 내뿜는 사악한 기운으로 알 수 있다. 임시검문소가 설치되었다면 뱀의 꼬리쯤일 터이다. 

 

미등들이 하나씩 꺼질수록 도로는 캄캄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곳을 넘어갈 수 있는 것일까. 불안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기관총 소리가 무거운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며 울려 퍼졌다. 검문소 쪽이었다. 처음 한번은 드르륵! 했지만 곧바로 폭발물 터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다시 기관총소리가 불안의 공명을 일으키며 연속되었고, 충혈 된 예광탄들이 꼬리를 물며 하늘로 솟아 올라갔다.

 

사막에서 잠든 베헤못을 깨우려는 듯 비명소리들과 욕지거리들이 도로를 흔들고는, 계곡 아래로 메아리치며 달려 내려갔다.

 

이게 무슨 일이람! 사피나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 우릴 다 죽이려는 거 아냐? 

 

코까지 골며 잠에 빠져있던 검은 카피예의 사내가 화들짝 놀라 소리 질렀다.

 

-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붉은 카피예의 남자가 밖으로 튀어나갔다. 검은 카피예의 남자도 엉거주춤 따라 나갔다. 미등에 비친 그들의 뒷모습이 불길한 상황과 맞물려 더욱 다급해 보였다. 어둡고 묵직한 공기를 타고 최루가스 냄새가 날아왔다.

 

총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 벌레만도 못한 놈들!

 

비명소리도 비난의 욕설도 잦아들 무렵, 운전기사가 분을 삭이지 못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검은 카피예의 남자가 따라 들어와 기사에게 담배를 내밀었다.

 

- 무슨 일이오? 

- 언제 끝나는지 묻는 사람들한테 총을 쏘고 최루탄을 터뜨렸어요. 죽일 놈들이 말이지.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우려했던 대로 불법정착촌 민병대가 군인들과 함께 임시검문소를 설치한 채 통행을 막고 있었다.

 

- 이거 난리 났네. 혹시 다른 길은 없소? 

- 없습니다. 그냥 여기 있는게 상책이지요. 안전하고 말이죠. 

 

언덕 일대에는 군인들과 민병대원들이 매복해 있었다. 그들은 접근하는 사람은 누구든 우선 총으로 쏘아 죽인 다음 누구냐고 물을 것이다.

 

통행금지를 선언하고 위반하는 사람들을 살해하는 것은 시오니스트들의 오랜 관행이었다. 심지어 카프르 카셈 마을에서처럼,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우린 미쳐버릴 것"이라는 점을 확인시킬 목적으로,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마을에는 퇴근시간에 맞추어 급작스럽게 '비밀리에' 통금이 시행되었다. 그리고 불과 한 시간 동안 통금 위반으로 47명이 피살되었다. 그렇지만 한 명만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혼자서 43명을 살해한 그는 불과 1년을 복역한 후 아랍문제 담당관으로 임명되었다. 수십 명을 살해한 행위가 그의 화려한 경력으로 인정되었다.

 

비밀리에 봉쇄를 명령한 책임자에게는 10센트의 벌금이 선고되었다. 충분히 알리지 않은 '기술적 실수'가 인정된다는 이유였다. 사건 후 이스라엘 총리는, "한 가지는 명백하다. 유대인들에게는 아랍인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일이 허용된다"며, 학살자들을 두둔했다.

 

얼마 전에도 살핏마을의 목수 아부 로예가 한낮에 정착민이 쏜 총에 목을 맞고 피살되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아이에게 줄 책가방을 사가지고 지름길로 오던 중이었다.

 

폭탄을 들고 오는 줄 알았으며, 교전수칙을 정확히 지켰다는 것이 살인자들의 주장이었다.

 

그가 나블루스 시내를 모두 뒤져 구입한 책가방에는 '싸우지 말라.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라'고 적혀 있었다.

 

* "신이여, 그를 용서하소서. 신이여, 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임종 후에 하는 기도 말.


태그:#팔레스타인, #임시검문, #통행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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