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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주막들은 국보도 보물도 아닌 탓에 보존되지 못한 채 모두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경북 예천의 삼강주막은 벽에 주모가 남긴 외상장부 표식으로 유명세를 얻었고, 그 덕분에 복원이 되어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하지만 삼강주막의 숙소 내부에는 출입문보다도 더 큰 비키니 여인 그림이 그려져 있다. 낙서라기엔 너무 커서 벽화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 그림, 누가 도대체 왜 그렸으며, 무슨 이유로 지워지지도 않고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 복원한 조선시대 주막에 '비키니 벽화'가 웬말 조선 시대 주막들은 국보도 보물도 아닌 탓에 보존되지 못한 채 모두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경북 예천의 삼강주막은 벽에 주모가 남긴 외상장부 표식으로 유명세를 얻었고, 그 덕분에 복원이 되어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하지만 삼강주막의 숙소 내부에는 출입문보다도 더 큰 비키니 여인 그림이 그려져 있다. 낙서라기엔 너무 커서 벽화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 그림, 누가 도대체 왜 그렸으며, 무슨 이유로 지워지지도 않고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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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酒幕)은 사람이 거주하는 일반적인 집은 아니다. 그렇다고 상점도 아니다. 주(酒)가 '술 주'라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하자면, 주막은 술과 관계가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주막은 술을 만들어서 파는 양조장, 즉 술도가인가? 알 수가 없다. 결국 주막의 정확한 의미를 알려면 막(幕)의 뜻도 알아보아야 한다.

보통의 사람들이 기거하는 집은 일반적으로 가(家)로 나타낸다. 그에 비하면, 당(堂)은 구조가 단일한 경우에 흔히 붙인다. 다산초당이나 학교의 강당 같은 건물들이 바로 그 예들이다. 구질구질한 곁다리들이 없으니 규모의 대소와 관계없이 '당'들은 그 면모가 '당당'하다.

헌(軒)으로 표현되는 집들은 대체로 높다. 집의 추녀가 높든 고지대에 위치하든 '헌'이라 명명된 집들은 뭔가가 높았다. '軒'이라는 글자 자체가 '높을 헌', '추녀 헌'이라는 점과, 빈한한 민중들이 고개를 들고 우러러 쳐다보아야 했던 벼슬아치들의 가마를 초헌(軺軒)이라 불렀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라. '헌'은 올려다 보아야 하는 '높은' 집인 것이다.

율곡이 태어난 집을 오죽헌(烏竹軒)이라 불렀고, 상춘곡을 지은 정극인이 불우헌(不憂軒)을 자칭했으며, 허초희(楚姬)의 호가 난설헌(蘭雪軒)인 것을 보면 그런 해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들이 스스로를 보잘 것 없는 존재라고 믿는 자기비하에 빠졌던 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들은 '헌'을 자칭함으로써 은근히 자존심을 과시했고, 정신적 자족감을 즐긴 게 분명하다.

삼강주막 옆을 거쳐 낙동강으로 가는 길
 삼강주막 옆을 거쳐 낙동강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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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주막의 '막'은 무엇일까. 연극 공연 때 관객과 무대 사이를 가리는 천을 그렇게 부르고, 원시인이나 극빈층이 기거하는 집에 움막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보면 '막'은  허술한 시한부 거처를 가리키는 말인 듯하다. 실제로 국어사전도 찾아보면 '막'은 기와집이나 번듯한 민가가 아니라 '비바람을 피할 정도의 집, 움막 수준의 임시 거처'라고 풀이되어 있다.

술을 파는 허름한 집, 그곳이 주막이다. 그런 주막에, 오랫동안 머물 필요가 없고, 술값이 싸다는 이점을 찾아야 하는 사람이 흘러들어온다. 먼길을 가는 나그네들이다. 주막이 (나그네들이 찾기 쉽도록) 길가나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삼거리 주막', 많이 들어본 말 아닌가. 이리 가고 저리 가는 나그네들이 교차하는 시골 길목의 대표적 지점이 삼거리이니, 주막은 그런 곳에 있어야 했던 것이다. 주막은 결국 밀주도 빚고 거친밥과 홑이불 잠자리도 제공하는, 시골 길가에 있으면서 먼길 가는 길손을 기다리는 작은 술집이다.

삼강주막으로 가는 국도 아래 통로의 풍경. 삼강강당과 삼강주막 사이를 오가는 이 통로에는 '술맛'을 돋울 만한 벽화들이 가득 그려져 있다.
 삼강주막으로 가는 국도 아래 통로의 풍경. 삼강강당과 삼강주막 사이를 오가는 이 통로에는 '술맛'을 돋울 만한 벽화들이 가득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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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예천군의 삼강주막, 낙동강변에 남아 있는 조선 말기 유일의 주막이다. 그 이유만으로도 삼강주막에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찾아온다. 어차피 밥도 먹고 술도 한잔 해야 하는데, 이 근방을 지나면서 아니 들를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삼강주막에서 볼거리의 핵심은 벽에 그어져 있는 '외상장부'이다. 주막의 본채와 보부상 숙소야 2007년에 복원된 것이라 수준급 문화재가 되지 못하고, 주변의 풍광도 낙동강 난개발로 그 빛을 다 잃어버린 지경이지만, 나라 안 그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특이한 외상장부가 없어지지 않고 여지껏 남아 있으니 이야말로 소중한 볼거리인 까닭이다.

주모는 벽에 날카로운 나뭇가지나 뾰족돌로 빗금을 그어 이 사람 저 사람의 외상 내용을 기재하였다. 문자를 읽지도 쓰지도 못했지만, 가난한 민중이 필기구를 상용하던 시대도 아니었으므로 외상 내역을 기록하는 유일한 수단은 송곳 같이 날이 선 '끝'과 흙으로 된 벽뿐이었다. 삼강주막의 벽에 남아 있는 외상장부는 그만큼 조선 시대의 민중 생활사를 극명하게 증언해주는 소중한 흔적이라는 말이다.

삼강주막의 외상 장부. 주모 할매는 (글을 알지 못했고, 종이와 붓도 없었을 터라) 외상 내역을 문벽에 빗금을 그어 표시했다.
 삼강주막의 외상 장부. 주모 할매는 (글을 알지 못했고, 종이와 붓도 없었을 터라) 외상 내역을 문벽에 빗금을 그어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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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삼강주막에서 보내는 잠깐의 시간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조선 시대 주막집과 나그네 숙소를 제법 번듯하게 복원했을 뿐더러, 부엌의 흙벽에는 당시의 생활상을 증언해주는 기막힌 외상장부도 고이 남아 있는데, 이게 웬말인가. 오가는 길손들이 묵었다는 숙소의 방 안을 들여다 보는데, 비키니를 입은 반라의 여인이 허리를 꺾은 채 쳐다보는 게 아닌가.

아니, 조선 말기 사람들이 벽에다 저런 그림을 그렸단 말인가. 단발령으로 상투가 잘려나가기 시작한 게 1896년이고, 이 삼강주막이 지어진 게 대략 그 무렵인데, 어찌 이곳에 비키니를 입은 반라 여인이 출현했을까! 당시의 풍속이 이토록 놀랍게 급변을 거듭했단 말인가.

비키니 여인만이 아니다. 이곳에서는 주막과 숙소 가릴 것 없이 정말 빼꼭하게 채워져 있는 그 많은 낙서들을 보아야 한다. 그것은 사람을 하루 종일 민망하게 만드는 일이다. 조선 시대의 주막과 상인 숙소를 복원한 만큼 낙서가 있더라도 당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내용들이어야 마땅할 텐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탄식은 끝나지 않고 줄곧 이어진다. 삼강주막 집채들의 벽들을 온통 가득 메우고 있는 저 현대적 낙서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복원한 조선 시대 주막 흙벽에 찬연하게 그려진 비키니 여인이라니! 그 누구든, 설혹 입을 열 개 가진 이라 할지라도 도저히 할 말을 찾지 못할 문화적 참상 아닌가.

삼강주막 정면 모습. 집 뒤가 바로 낙동강이다.
 삼강주막 정면 모습. 집 뒤가 바로 낙동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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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낙서, 아니 이 벽화는 누가 무슨 정신으로 그렸을까. 방바닥에서 천정까지 이르는 출입문에 가득하니 그려진 반라의 비키니 여인! 이 정도 규모라면 찰나의 시간 안에 남몰래 휘갈길 수 있는 낙서 수준이 결코 아니다. '벽화'로 인정해야 마땅하다. 과연 어떤 사람이 인적이 별로 없는 때를 찾아 오밤중에 이토록 정성껏(?) 장시간을 들여 대작(?)을 남겼을까. 

또, 그것이 지워지지도 않고 그냥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계 도처 곳곳에 지독한 낙서를 남기는 것으로 유명한 우리나라 사람들, 이제는 공무원들도 지우다가 지쳐버린 것일까. 아니면, 아무도 보지 않는 밤에 관계자들이 스스로 이 거작을 완성한 것일까.

외상장부만 조금 남아 옛날을 가까스로 증언할 뿐, 비키니 여인이 온통 휘젓고 있는 (전통과는 상반되는) 현대판 민속주점에서 전통 막걸리를 마실 이유는 없다. 우리 일행은 주막과 상인 숙소만 잠깐 훑어본 뒤 바로 삼강주막을 떠났다. 아마 조선 시대의 나그네들이었다 할지라도 벽에 그려진 이 비키니 벽화를 보았다면 피곤한 몸을 눕히지 않고 그냥 길을 재촉했으리라. 낯선 벽화를 보고 문화적 충격에 빠졌을 테니 어찌 평온하게 잠을 청할 수 있었으랴. 비록 야밤 산길을 강행하다 도적을 만날지언정 그들은 떠났을 것이 분명하다.  몸에 받는 충격보다 마음의 상처에 더 괴로워 하는 존재가 바로 '만물의 영장' 사람이니까.

이 무참한 낙서는 누가 했으며, 왜 그냥 두는지?
 이 무참한 낙서는 누가 했으며, 왜 그냥 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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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삼강주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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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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