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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석탄박물관 옛 광부들의 삶 문경석탄박물관 곁에 있는 은성갱 안이랍니다. 지난날 꽤 오랫동안 영화를 누린 곳이지요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일하고 생계를 꾸려갔지요. 그러나 세상이 바뀌면서 차츰 문명이 발달하니, 자연스레 석탄이 쓰임새를 잃고 말지요. 지난날, 이곳 은성갱에서 땀흘리며 일하던 광부들의 삶을 잠깐이라도 돌아볼 수 있도록 실제 갱 안의 모습과 그때 그 시절 광부들의 이야기를 재연출한 곳이랍니다.
ⓒ 손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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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쪽으로 와요. 이쪽으로 오라니까요 김씨!"

"하하하, 네."

"땀 좀 닦고요. 자, 여기 물 있으니까 물 좀 마셔요."

"어제 병반부터 케이빙컵(?)을 달았는데, 잘 나오고 있습니다."

"아, 그럼 공차만 있으면 되겠네?"

"그렇지 않아도 공차 가지러 나갑니다."

"하하하, 오늘 그 막장은 생산 많이 해서 좋겠네."

"하하하, 그럼요."

"아 참, 마치고 가은집으로 오세요. 같이 한잔합시다."

"하하하, 우리가 거기 끼어도 괜찮을까요?"

"그럼 괜찮지요. 하하하!"

"아, 그럼 가자고요. 하하하!"

 

어두컴컴한 막장 안, 그 옛날 은성광업소 갱도 안 모습을 그대로 본떠 만들어 놓은 곳, 세 사람이 모여앉아 시커먼 석탄 가루를 뒤집어 쓴 채, 갱도 안에 앉아서 아침에 싸가지고 온 도시락을 먹고 있어요. 제대로 된 밥상도 없고 시커먼 막장 안에서 아무렇게나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는 모습이 마네킹인데도 퍽이나 서글퍼 보입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그 옛날 문경에 석탄개발이 한창일 때, 광부들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득하게 들려옵니다.

 

 

문경에서 사극 드라마 촬영을 하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왕릉리, 우리가 석탄박물관을 찾아갔을 땐, 매우 이른 시간이었답니다. 가장 먼저 표를 끊고 곳곳에 있는 볼거리들을 꼼꼼하게 둘러봅니다. 문경석탄박물관에는 사극 촬영 세트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요. 계단으로 올라가는 길도 있었지만,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까마득하게 보이더군요. 그래서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가봤답니다.

 

모노레일을 타고 가는 동안, 매우 짧은 시간이었지만 안내원 아저씨의 설명을 들으면서 석탄박물관과 영화 촬영장 이야기를 매우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답니다. 문경시는 곳곳에 탄광이 있어 그 옛날부터 무척이나 영화를 누렸던 곳이라고 하더군요. 탄광 일이 힘들기는 했지만, 그것이 이 지역 사람들의 경제활동에는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또, 문경시에서 벌인 지역경제를 살리는 사업 가운데 하나로 석탄박물관을 세우고 영화 촬영 세트장을 만들었다고 해요. 세트장을 하루 빌려주는 데 삯을 300만 원쯤 받는다고 하니 그야말로 지역경제에 큰 도움을 주는 보배라고 할 수 있겠더군요.

 

옛집 모습을 그대로 살려놓고, 그 옛날 임금이 살던 궁궐 모습까지 제대로 갖추어놓았어요. 영화 세트장이기 때문에 구석구석 잘 살펴보면, 조금은 '가짜' 티가 나는 곳도 더러 있었지만, 화면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손색이 없을 만큼 꽤 잘 꾸며져 있었어요. 이곳에서 KBS <근초고왕>, <천추태후> 같은 드라마를 찍었다고 하는군요.

 

예스런 마을 풍경이 정겨워서 구석구석 다니면서 사진을 찍고는 다시 아래로 내려옵니다. 이젠 석탄박물관 안을 구경할 차례에요. 박물관 안에는 우리나라 석탄산업사와 지난날 광산에서 일하던 광부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전시가 퍽 잘 되어 있었답니다. 박물관이라 하면, 농사일이나 우리나라 옛것들을 전시해놓은 민속박물관은 몇 곳 가봤으나 광부들의 삶을 볼 수 있는 곳은 처음이라 아주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어요.

 

무엇보다 박물관 바로 곁에 있는 '은성갱'은 지난날 실제로 석탄을 캐던 '은성광업소' 자리랍니다. 지금은 폐광이 되었지만, 이곳에다가 옛 모습을 잘 꾸려놓고 광부들의 삶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를 한 게 퍽이나 인상 깊었답니다.

 

은성광업소는 1938년 12월 1일 일제강점기 때에 일본이 우리나라 지하자원을 빼앗아가기 위해 개광하여, 해방 뒤에 다시 국가에서 운영하는 '대한석탄공사'에서 꾸린 탄광이랍니다. 1994년 7월 31일 폐광될 때까지 56년 동안 캐낸 탄이 무려 1616만 톤이나 될 만큼 석탄 산업에 크게 이바지한 곳이랍니다.

 

그동안 크고 작은 사고도 여러 번 있었지요. 그 가운데 1979년 10월 27일 큰 불이 나서 44명이나 되는 안타까운 목숨들이 숨지기도 했답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릴 적에 뉴스에서 탄광사고가 나서 매몰된 광부들을 며칠 만에 구조해냈다는 걸 여러 번 본 적이 있어요.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곳 은성광업소였다고 하니, 무척 안타까운 사연이 깃든 곳이라는 걸 알 수 있어요. 이밖에도 또 다른 사고로 9명이 목숨을 잃기도 하고, 지금까지 모두 166명이나 되는 아까운 목숨들이 숨진 곳이기도 하답니다.

 

가은읍 탄광촌 사람들의 삶

 

탄광촌이던 문경시 가은읍, 이곳 사람들은 지난날 거의 모든 이들이 이곳 탄광에서 일을 했고, 또 그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지역 경제에도 크게 이바지한 분들이랍니다. 그래서인지,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고 할 만큼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고 해요. 탄광 일이 말 안 해도 얼마나 힘이 들지 상상이 가지만, 그래도 지역경제에 크게 이바지한 사업이었지요.

 

어느 곳이든지 그 옛날에는 어렵고 힘들지 않을 때가 없었겠지만, 탄광촌 사람들의 삶은 더욱 고단했을 거예요. 하루 3교대로 8시간씩 막장에 들어가서 일을 했다고 하는데, 아침에 맑은 하늘을 보고 들어가면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답니다. 오죽하면 탄광 사람들은 두 개의 하늘을 모시고 산다고 했대요. 바깥에서 하늘을 보고 들어가면, 온종일 시커먼 막장 안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컴컴한 갱 천장을 보고 산다고 해서 그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탄광의 금기사항

○ 출근할 때 여자가 가로질러 가면 출근하지 않는다.

○ 출근하기 전 여자가 방문하지 않는다.

○ 전날 밤 꿈자리가 뒤숭숭하면 출근하지 않는다.

○ 남편 출근시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 부부싸움 후에는 가급적 갱에 들어가지 않는다.

○ 도시락에 밥을 4주걱 푸지 않는다.

○ 남편이 출근한 후 신발을 방 안쪽으로 향하게 놓는다.

○ 갱내에서는 휘파람을 불거나 뛰지 않는다.

○ 갱내에서는 쥐를 잡지 않는다.

○ 갱내에서 용변을 볼 때 출입금지 구역으로 가지 않는다.

○ 출근 길에 짐승을 치면 그날은 출근하지 않는다.

일이 워낙 힘들고 위험하기 때문일까요? 이쪽 사람들은 '금기하는 사항'들이 무척 많다고 합니다. 자기 목숨을 내걸고 석탄을 캐야 하는 광부들이니 이해가 된답니다. 크고 작은 사고가 언제나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서 광부들 스스로 지켰다고 하네요.

 

모두 11가지쯤 되는데, 퍽 재미난 항목도 눈에 띕니다. '도시락을 풀 때, 4주걱은 푸지 않는다'와 '갱내에서는 쥐를 잡지 않는다'가 있어요. 아마도 숫자 '4'는 예로부터 '죽음'을 뜻한다고 해서 그런 듯해요. 또 쥐를 소중하게 여기는 데에는 남다른 뜻이 있답니다.

 

막장 안에는 여러 가지 해로운 가스들이 많이 나오는데, 주로 메탄가스나 일산화탄소랍니다. 그런데 쥐가 살고 있다는 것은 그런 유해가스가 없다는 걸 증명하기 때문에 막장 안에서 쥐를 만나면 안심하고 일할 수 있죠. 또 쥐의 움직임을 보고 위험을 판단하기도 했대요. 바깥에서는 쥐를 징그럽거나 더럽게 여기겠지만, 탄광에서는 광부들과 동무라고 합니다. 심지어 도시락을 함께 나눠먹기도 했다는군요.

 

탄광에서 일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 것인지는 말 안 해도 짐작이 가지만, 막장 안에는 기온이 30도를 웃돌고, 땅속을 파내는 일이라서 물이 많기 때문에 습도가 매우 높아요. 그래서 이들은 '월남막장'이라고 했다는데, 월남처럼 무덥고 습하다고 해서 그렇게 붙여졌다고 합니다.

 

여성광부들의 모습을 연출해놓은 것도 있었는데, 탄광 일은 남자들의 몫인 줄로만 알았는데 조금 놀랍더군요. 실제로 그 옛날에도 여성광부들이 많았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남자들도 힘들다고 하는 막장에서 일하게 된 배경을 알고 나니, 가슴이 먹먹하더군요.

 

주로 막장에서 일하다가 순직한 사람의 부인들이래요. 막장에서 남편을 잃고 생계를 꾸려갈 사람이 없으니까 부인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와 일을 한대요. 주로 캐낸 탄을 골라내는 '선탄작업'을 한다고 합니다.

 

"오월 달에 돌 지내고 음력으로 십일월 달에 남편이 순직당했으께 애기잖아요. 인제 열한살 먹고 고만고만하지 아홉 살 먹고 여섯 살 먹고, 네 살 먹고, 첫 돌 지냈으께요. 턱하게 처음에 일 가는 게 야간이 걸렸네요. 병반이 걸렸네요. 방은 한 칸인데 시계는 다 되가는데 열두 시가 다 되가는데 아가 안 자는거에요. 막내가요. 그래가지고는 우는 거를 보고 일을 가요. 우는 걸 보고 일을 가면 오로지 아 우는 소리만 귀에 듣기는 거라요….

 

우는 걸 보고 일을 또 가만 저 언니가 인제 그거(공부)를 중학교밖에 못했어요. 애들 키운다고 지 동생들 키운다고, 살림 사니라고, 그래가 하는데, 이제 주간 때 되면 언니가 아를 업고 저거 밥 보따리하고 책가방하고 이래 이고 인자 중학교를 가요. 그럼 일하다 건너다 보면요, 업고 내려가는 거 보면요, 날 좋은 날은 괜찮은데 비 오는 날은 가슴이 찢어져요. 가슴이 찢어져요."

- 석탄박물관 안 판넬에 쓰여 있던, 24년간 선탄장에서 근무한 여성광부의 말

 

그 옛날 영화는 어디로 가고

 

이렇듯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며 살아온 탄광촌 사람들, 그러나 하루하루 힘겨움 속에서도 생계를 꾸리며 자식들을 키우는 보람으로 살아왔지만, 그나마 탄광들이 차츰 문을 닫게 되면서 그들의 삶도 무척이나 힘들어졌답니다.

 

195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가정용 연료인 연탄 산업이 발달했지만, 1980년대 중후반이 되면서 국제 유가가 안정되고, 청정에너지가스가 보급되면서 연탄의 사용량은 크게 줄어들었고, 무연탄의 소비량도 크게 줄어들었지요. 그 뒤로 나라에서 1989년부터 1996년까지 모두 334개의 탄광을 폐광시킴으로써 석탄산업은 찬란했던 과거를 뒤로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석탄박물관과 은성갱을 둘러보고 나오니 점심 때가 되었네요. 마땅한 밥집을 찾아 가은 읍내로 나왔는데, 마을이 너무나도 조용합니다. 박물관에 찾아온 사람들은 무척 많았는데, 바깥에는 오가는 이들도 없습니다.

 

참 희한하더군요. 밥집도 거의 장사를 그만 둔 문 닫은 집이 많았어요. 가게 앞에 '점포 세놓음'이라고 쓴 종이가 붙어있는 곳도 여럿 있었고, '여기가 과연 관광지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썰렁했어요. 마침 중국밥집이 있어 들어갔더니 거기도 손님 하나 없습니다.

 

"아니, 틀림없이 여기가 관광지인데 어쩜 이리도 손님이 없지?"

"그러게. 그리고 마을도 너무 조용해. 상가들도 왠지 다 죽은 듯 보이고, 아까 박물관에는 그렇게나 사람이 많더니, 여기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하네."

"그게 다 자동차 때문이야.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자기 차를 타고 오니까 관광지 안에는 사람이 북적거려도 마을에는 장사가 안 되는 거야. 생각해봐. 차만 타면 어디서든지 한두 시간이면 닿는 거린데 굳이 이 마을에서 끼니를 해결하지 않아도 될 거 아니야?"

 

참말로 그랬어요. 남편의 말을 듣고 보니, 가은 읍내 상가들이 모두 죽은 듯이 보인 까닭이 이해가 되었어요. 그러니 관광지라고 해도 마을 사람들한테는 그다지 많은 도움이 안 되는 거예요. 그 옛날, 탄광이 한창 잘 돌아갈 때엔 광부들이 고된 일을 마치고 나와서 막걸리 잔이라도 기울이며 그날그날 일하던 얘기도 하면서 고단함을 이겨내고 했을 텐데. 그때가 장사도 더욱 잘 되었을 것이고 지금보다 경기가 훨씬 더 좋았겠지요.

 

아까 은성갱 안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다시 귓가에 맴돕니다. "어이 김씨, 마치고 가은집으로 오세요. 같이 한잔합시다!"라고 하던 소리가….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절, 위험을 무릅쓰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석탄을 캐며 생계를 꾸리던 그들, 하루 일을 마치고 '가은집'에 와서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시름을 덜어내던 그들이 함께 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겠지요? 힘들었지만 그래도 풍요로웠던 가은읍내의 풍경은 어디로 가고 이렇게 쓸쓸하고 너무나도 한적한 풍경만이 남아 있을까 생각하니, 가슴 한 쪽에 쓸쓸함이 남습니다.


태그:#문경석탄박물관, #문경시 가은읍, #광부, #광부들의 삶, #석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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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오랫동안 여행을 다니다가, 이젠 자동차로 다닙니다. 시골마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정겹고 살가운 고향풍경과 문화재 나들이를 좋아하는 사람이지요. 때때로 노래와 연주활동을 하면서 행복한 삶을 노래하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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