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일본은 크게 2차례의 대결을 펼쳤다. 임진왜란(임란) 때는 전면전 형태로 대결을 벌였고, 구한말 때는 그런 것 없이 대결을 펼쳤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조선은 임란 때는 일본을 물리쳤고, 구한말 때는 일본에게 허무하게 패했다. "그거야 임란 때는 일본이 약했고 구한말 때는 일본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다.
구한말 조선, 일본에 왜 그렇게 허망하게 국권 내줬을까센고쿠 시대 즉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룩한 임란 당시의 일본은 사상 최강의 국력을 자랑했다. 열도 전체가 일본이라는 깃발 아래 단결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뿐 아니라, 당시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걸출한 영웅까지 있었다. 게다가 당시의 일본군은 조총을 보유한 탓에, 군사적으로도 조선군을 능가했다. 그런데도 조선은 일본과의 전면전에서 당당히 승리를 거두었다.
그에 비해 구한말의 '한일전'은 너무 싱겁게 종결되었다. 일본이 조선보다 먼저 개항했고 과학기술이 앞섰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별다른 전쟁도 없이 조선이 그처럼 쉽게 국권을 내준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우리는 서민대중과 특권층의 관계를 꼽을 수 있다. 임란이 벌어진 16세기에는 조선의 서민대중과 특권층이 상호 화합한 데 반해, 구한말 즉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팀워크'가 두 시기의 차이를 결정했던 것이다.
임란이 벌어지기 25년 전인 1567년, 조선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선조 임금의 즉위를 계기로 조선의 지배층이 질적으로 바뀐 것이다. 훈구파라 불린 종래의 지배층은 각종 정변에서 승리를 거둔 공신세력으로 구성되었다. 그에 비해 사림파라 불린 새로운 지배층은 정상적인 정치 시스템을 밟고 정권을 장악한 선비세력으로 구성되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잘 나타나듯이, 정변이나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세력은 원칙보다는 힘을, 공정성보다는 부정부패에 기울기 쉽다. 훈구파는 그런 특성을 띠었기 때문에, 16세기에 이르러 보다 건강하고 진보적인 사림파의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훈구파에 비해 건강하고 진보적인 세력이었기에, 사림파는 무엇보다 지역사회를 보다 더 확실히 장악할 수 있었다. 16세기의 서민대중이 사림파를 신뢰했다는 점은, 사림파가 주도한 범국민 캠페인인 향약운동이 널리 파급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서민대중의 신뢰를 받는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한 뒤로부터 25년 뒤에 임란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이 전쟁에서 조선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설명해준다. 사림파가 그보다 훨씬 먼저 정권을 장악해서 일찌감치 부패해버렸거나 아니면 훈구파가 임란 당시까지도 계속 권력을 잡았다면, 전쟁이 어느 방향으로 전개되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행히도 서민대중과 호흡하는 젊은 지배층이 전쟁을 주도했기에, 조선은 조총을 앞세운 일본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특히, 사림파가 서민대중을 의병투쟁으로 끌어들인 것이 전쟁의 승패를 가른 결정적 요인이었다. 조선은 정부군의 열세를 의병투쟁으로 보완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사림파도 부패하고 보수적이 되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꽤 혁신적인 세력이었다. 서민대중이 그들을 믿고 의병투쟁에 나선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서민과 특권층의 반목, 조선 멸망의 원인
구한말에도 일본에 맞선 의병투쟁이 있었지만, 나라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다. 왜 그랬을까? 구한말에는 서민대중과 특권층의 화합이 없었던 탓에 의병투쟁에 대한 서민들의 호응도가 낮을 수밖에 없었고, 그랬기 때문에 전면전도 없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19세기에는 전정·군정·환곡 즉 삼정의 문란, 다시 말해 조세 수취체제의 문란이 가속화되었다. 서민들은 먹고 살기 힘들어지는데도 이러저러한 명목으로 각종 세금을 뜯어갔던 것이다. 그런데도 특권층은 이를 외면하고 부를 축적하는 데만 골몰했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서민대중이 독자적 생존을 위해 전국 곳곳에서 민란을 일으키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서민 중심의 사회개혁운동인 동학농민전쟁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동학전쟁이 '정부군+일본군+민병대(양반 중심)'의 연합작전에 의해 짓밟힘에 따라 서민과 특권층의 상호반목은 한층 더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정부군과 양반 민병대가 일본군과 손잡고 동족을 진압하는 '콩가루 집안' 같은 양상까지 벌어졌으니, 나라가 안 망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멸망은 사실상 '자살골' 때문이었다.
구한말에 서민과 특권층의 반목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자료가 있다. 구한말에 그 누구보다도 열렬히 나라를 사랑했던 '특권층 출신 항일투사'의 표본인 안중근 의사. 그의 내면의식을 살펴보면, 당시의 계층 갈등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안중근이 '특권층 출신'이었다는 표현이 혹시 의아하게 느껴졌을까? 초췌한 표정의 안중근 초상화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그가 특권층 출신이라는 말이 믿겨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죽기 직전에 여순감옥(뤼순감옥)에서 남긴 <안응칠 역사>라는 자서전을 읽어보면, 그가 조선사회의 특권층을 대표할 만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응칠'은 안중근이 성인식 때 받은 이름 즉 자(字)다.
"(나의) 할아버지의 이름은 안인수다. 성품이 어질고 후덕했으며 살림이 넉넉하여 자선가로도 도내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일찍이 진해현감을 지냈으며 6남 3녀를 낳았다. …… 그중에서도 셋째인 아버지(안태훈, 안중근의 아버지)는 …… 중년에 과거시험에 응시해 진사가 되고 조씨에게 장가들어 배필을 삼아 3남 1녀를 낳으니 맏이는 중근, 둘째는 정근, 셋째는 공근이다." 할아버지가 현감 출신의 자선사업가였고 아버지는 진사였다는 것은, 이 집안이 경제력과 명예를 함께 가진 양반가문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경제력은 안중근이 죽기 전까지도 계속 유지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3년 전인 1906년, 안중근 가족은 평안도 진남포(지금의 남포시)에서 양옥 한 채를 매입하고 사립학교를 두 개나 세웠다. 이 정도면 안중근이 특권층 출신이었다는 점을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동학군 토벌에 나선 안중근, 진짜?
이제, 안중근의 내면으로 들어가 구한말 계층갈등의 실상을 들여다보자. 서민들이 중심이 된 동학전쟁에 대해 그가 어떤 시각을 갖고 있었는지를 살펴보면, 계층갈등의 실상이 드러날 것이다. 그는 <안응칠 역사>에서 1894년 동학전쟁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그 무렵 한국 각 지방에서는 이른바 동학당이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외국인을 배척한다는 핑계로 군현(郡縣)을 횡행하면서 관리들을 죽이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했다. …… 그때 나의 아버지는 동학당의 폭행을 견디기 어려워 동지들을 단결하고 격문을 뿌려 의거를 일으켰다. 포수들을 불러 모으고 처자들까지 대열에 편입시켜 정예병이 무려 70여 명이나 되었다. 청계 산중에 진을 치고 동학당에 항거했다. …… 그때 나는 동지 6명과 함께 자원하고 나서서, 선봉 겸 정탐독립대가 되어 전진 수색하면서 적병의 대장이 있는 곳에 아주 가까이 다다랐다."아버지와 함께 민병대를 조직해서 동학군 토벌에 참가했다는 기록을 보면, 그가 서민 중심의 사회개혁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렬히 사랑하면서도, 서민대중이 일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내면적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동학군에 대한 안중근의 거부감은 또 다른 자료에서도 나타난다. 죽기 직전까지 쓰다 만 미완의 원고인 <동양평화론>에서도 그는 동학군을 "조선의 좀도둑 동학당"이라며 폄하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그런 인식을 세상에 보여주는 일을 조금도 꺼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감옥에서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할 당시, 그는 이미 세계적인 관심대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기록이 갖는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동학군에 대한 거부감을 그토록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확신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훗날 대한민국 시대에 들어 '동학난'이 '동학농민전쟁'으로 재평가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가장 전형적인 특권층 출신의 항일투사이자,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애국지사인 안중근에게서마저 구한말의 계층갈등을 엿볼 수 있다. 이완용 같은 인물에게서 그런 징표가 나타났다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지만 안중근 의사 같은 훌륭한 인격자에게서마저 그것이 나타났으니, 계층갈등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안중근도 이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을 것인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 아닌가.
일본에 맞서 투쟁을 벌이는 그 와중에도 동족인 동학군을 그처럼 미워했다는 것은, 구한말에 서민대중과 특권층 간의 반목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니, 조선이 자살골을 내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
조선이 임란 때는 승리하고 구한말 때는 패배한 이유는, 내부적으로 단결했느냐 아니냐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임란 때는 서민대중과 특권층이 화합했고 구한말 때는 두 계층이 반목한 데서 그런 차이가 생겨난 것이다.
밖에 있는 적 죽이기보다 안에 있는 동족을 살려야
오늘날 대한민국은 심각한 계층갈등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실업과 물가상승 등으로 서민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서민대중을 위한 복지정책을 저해하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 심지어는 어린아이들에 대한 학교 급식마저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갈등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계층 간의 화합을 도모하는 길뿐이다. 어느 한쪽을 붕괴시키는 방법으로 계층갈등을 해결하려 할 경우, 대한민국은 그대로 붕괴하는 수밖에 없다.
계층갈등을 내전으로 해결한 구한말의 조선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구한말에 특권층 출신 항일투사들의 노력이 결국 수포로 돌아간 것은, 그들 중 상당수가 서민대중의 정치역량을 분쇄함으로써 국력을 약화시키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동족을 짓밟고 일어선 뒤에, 이토 히로부미 같은 인물 10명을 죽이면 뭐할 것이고 100명을 죽이면 뭐할 것인가? 밖에 있는 적을 죽이기보다는, 안에 있는 동족을 살리는 길이 진정 한국을 살리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