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건봉사 가는 길에는 검문소가 있다. 검문이라고 해야 몇 명이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는지 체크하는 정도지만 여하튼 군의 통제를 따라야 한다. 그렇지만 건봉사 가는 길은 잘 나 있어 금방 건봉사 영역으로 들어간다. 길 왼쪽으로 보니 사명대사의 동상과 부도전이 보인다. 부도전은 이따 나오는 길에 보기로 하고, 건봉사 경내로 들어간다.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니 절의 영역이 대단히 커 보인다.

 

그중 불이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일주문도 천왕문도 거치지 않고 바로 부처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불이는 중생과 부처, 불가와 속가가 둘이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이제 불가로 들어가기 전 불이문 앞에서 잠시 머문다. 그것은 건봉사의 건축물 중에 오로지 불이문만 원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근대사의 명필 해강 김규진이 쓴 현판 글씨 때문이기도 하다. 붓 터치가 예사롭지 않다.

 

건봉사는 서기 520년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한다. 당시 이름은 원각사였다. 758년(경덕왕 17년) 발징화상이 만일 염불회를 시작했고, 29년이 지난 787년 7월 17일 아미타 부처님이 나타나 스님 31분과 신도 1820분을 극락세계로 이끌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원각사는 만일염불 기도도량이 되었다. 1358년에는 나옹스님이 절을 중건하고 건봉사로 개칭하였으며, 이때부터 염불과 함께 선·교를 수행하는 사찰이 되었다.

 

건봉사는 또한 호국사찰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건봉사에 있던 사명대사는 의승병을 훈련하여 건봉령을 넘어 평양성과 한양을 탈환하는 일에 참여했다. 1605년에는 사명대사가 일본에 탐적사(探賊使)로 가 왜군이 통도사에서 약탈해간 부처님 치아사리를 되찾아 왔으며, 이것을 1606년 중건한 건봉사에 안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건봉사에는 적멸보궁이 자리하게 되었다.

 

적멸보궁 뒤에 보면 석가모니부처 진신치아사리탑이 세워져 있다. 이것은 1724년(경종 14년) 치아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지금은 적멸보궁 오른쪽에 있는데, 방형의 지대석 위에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가 완벽하게 갖춰진 팔각원당형의 부도탑이다. 기단부는 팔각형으로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을 완전히 구비하고 있으며, 하대석에는 복련, 상대석에는 양련 등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탑신은 높이 53cm의 구형인데 표면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옥개석은 팔각형으로 낙수면과 상면이 별도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한 개의 돌로 이루어진 상륜부는 연국문대, 편구형 부재, 여의두문, 화문의 순서로 조각되어 있다. 사리탑의 전체 높이는 1.6m이다. 옛날에는 이 치아사리탑이 적멸보궁 불단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94년 5월 25일 적멸보궁이 신축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건봉사 하면 생각나는 스님, 사명대사

 

불이문을 통해 건봉사의 역사를 돌이켜본 나는 사명대사의 흔적을 찾기 위해 사명당 의승병(義僧兵) 기념관으로 간다. 기념관 안에 스님의 영정, 비문탁본, 교지, 불교용품, 서적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이 밀양 표충사에 있는 '송운대사 비명'과 건봉사에 있는 '사명대사 기적비명'다. 이들은 모두 탁본을 사진 찍은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는 없지만, 사명대사의 행적을 아는 데에는 아주 중요하다.

 

이의현(李宜顯)이 찬한 '송운대사 비명'에 따르면, 송운대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선에 뛰어든다. 그는 강원 고성 땅에서 왜군을 만나 설득하고, 그것이 통하지 않자 직접 승군을 조직하여 평양성 탈환 전투에 참여한다.

 

당시 송운대사 유정(惟政)은 부처를 믿는 자로 석장을 짚고 달려와 고성(高城)으로 들어가서 왜적들에게 살인을 즐기지 말라고 깨우치니, 왜적이 그의 늠름한 의용(儀容)을 보고 즉시 경의를 표하고 무리들을 경계하였다. 이 때문에 영동(嶺東)의 9군(郡)은 도륙(屠戮)을 당하는 참상을 면할 수 있었다. 이윽고 강개(慷慨)하여 승려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한가히 노닐며 마시고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성은(聖恩)이다. 지금 나라의 위기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앉아서 구경만 하고 구원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하고, 수백 명의 무리를 모집하여 급히 순안(順安)으로 달려갔다.   

 

강원도 관찰사 남공철이 찬한 '사명대사 기적비명'은 1800년 이곳 건봉사에 세워졌다. 비문에 의하면 남공철이 관동지방을 순찰하다 건봉사에 들러 사명대사의 의병활동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는 예조에 청하여 사명대사 기적비를 세우기로 했고, 신도들의 시주와 정성으로 비를 세울 수 있었다.

 

금강산은 비로봉으로부터 두 줄기로 나뉘었으니, 단발령 서쪽은 내첩이라 하였고 안문 동쪽은 외첩이라 하였다. 내첩에 자리 잡고 있는 표훈사는 서산대사가 가르쳤던 곳이며, 외첩에 있는 건봉사는 사명대사가 의병을 모집한 곳이다. 두 사람이 비록 불교에 몸을 담고 출발하였으나 서산대사는 그 곧은 절개로서, 사명대사는 그 높은 공으로 이름을 떨친 곳이기에 모두 소중하게 여긴다. 이런 사연으로 건봉사는 오늘날 유명한 사찰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만해스님을 사랑하는 까닭은...

 

이제 만해 한용운(1879-1944) 스님을 찾아나서야 한다. 그러나 만해선사의 행적은 시비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만해선사의 법손인 설산(雪山)스님은, 만해선사가 건봉사 만일선원에서 하안거를 한 후 큰 깨달음을 얻어 만화(萬化)스님으로부터 만해(萬海)라는 법호를 받았다고 적고 있다. 이를 통해 만해스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78세손으로 대선사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해선사의 오도송은 다음과 같다. 

 

男兒到處是故鄕     사나이 가는 곳마다 다 고향인데

幾人長在客愁中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나그네 설움을 겪고 있구나

一聲喝破三千界     한 소리 큰 할에 삼천세계를 깨뜨리니

雪裏桃花片片飛     눈 속에 복사꽃이 분분히 날리는구나

 

정말 대단한 경지다. 그런 스님의 경지는 불교경전과 시문학을 통해 발현된다. 그는 이를 통해 고뇌하는 중생들의 마음을 열어주었다. 더욱이 쇠락해가는 나라의 운명을 보고 있을 수만 없어 독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 건봉사에 세워져 있는 그의 시비 '사랑하는 까닭'은 더 감동적이다. 시 속의 화자인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기다린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紅顔)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이곳에서 알게 된 조명암 시인의 존재

 

만해선사의 시비 옆에는 또 하나의 시비가 서 있다. 제목을 보니 조영출(趙靈出) 시와 노래비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그런데 시의 제목 역시 낯설다. '칡넝쿨'? 그렇지만 시를 읽다보니 그의 출신과 정서를 알 수 있다. 시 속에 토속적인 강원도(강안두) 사투리가 나오고, 종소리와 여승 같은 절의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영출이라는 시인을 잘 모른다. 그러나 <꿈꾸는 백마강> <신라의 달밤> <고향초> <알뜰한 당신> <선창> <낙화유수> 같은 대중가요는 들어 알 것이다. 이 노래의 가사를 쓴 사람이 조영출이다. 그는 우리에게 조명암(趙鳴岩: 1913-1993)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바로 15세 되던 1927년 건봉사에서 출가 중연(重連)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리고 1930년 한용운 스님의 추천으로 보성고보에 입학하여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는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방의 태양을 쏘라>는 시로 등단해 유명해졌다.

 

그는 이후 조명암이라는 필명으로 대중가요 180여 곡의 가사를 썼다. 이것은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정서를 표현한 것으로, 애수에 차 있고 암울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조명암은 1940년대 친일가요를 만들고 친일연극을 만들면서 친일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해방 후에는 좌익 활동을 했고, 1948년 월북해 북조선 예술계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또한 6·25사변 중에 조선인민군을 위한 진중가요를 작곡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그의 이름은 우리나라에서 금기시되었고, 일제강점기 그의 노래에 작사자를 표기할 수 없었다. 그는 1988년 해금되어 그 이름을 다시 알리기 시작했다. 그는 1960년대 이후 북한의 문학과 예술분야에서 크게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시에서 출발, 대중가요를 거쳐 연극과 가극 분야로까지 활동영역을 넓혔고, 1993년 평양에서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시비 뒷면에는 유명한 시 <고향초> 한 단락이 적혀 있다.

      

남쪽 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날으면

뒷동산에 동백꽃도 곱게 피는데

뽕을 따던 아가씨들 서울로 가네

정든 사람 정든 고향 잊었단 말인가.


태그:#건봉사, #불이문, #사명대사, #만해 한용운 선사, #조명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