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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어린 단종을 잘 보필하라고 세종대왕이 특별히 하사한 수양대군의 잠저. 훗날 월산대군 사저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간 선조가 돌아와 잠시 기거했던 곳이며 광해군에 의해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다
▲ 덕수궁 나이어린 단종을 잘 보필하라고 세종대왕이 특별히 하사한 수양대군의 잠저. 훗날 월산대군 사저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간 선조가 돌아와 잠시 기거했던 곳이며 광해군에 의해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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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초 열흘. 상현달도 사라져 버린 어스름 밤. 황토현을 넘어오는 사나이가 뒤를 돌아봤다. 따라오는 자가 없다. 소나무에 몸을 숨겼던 사나이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순청(巡廳)이 눈앞이다. 순청은 야간 통행을 관장하는 관청이다. 밤새워 순라(巡邏)를 돌아야 하는 순라꾼들은 어느 색주가에서 술을 푸고 있는지 파수 보는 순졸 하나가 꾸벅꾸벅 졸고 있다. 군기시 담장을 끼고 방향을 바꾼 사나이가 잰걸음을 놓았다.

이제 골목길을 빠져 나가면 대군 사저다. 별채 담장에 도착한 사나이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좌우를 휘둘러보았다. 그때였다. 어둠속에 그림자가 움직였다. 긴장한 사나이가 칼자루를 잡았다.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사나이는 칼자루에 힘을 주었다.

"아니, 이거 권 교리 아니오?"

어둠속의 사나이가 배시시 웃었다.

"홍 지사는 어인 일 이십니까?"

안도의 미소를 흘리던 사나이가 칼자루에서 손을 뗐다.

"한방이 급히 불러서 왔습니다만 권 교리는?"

홍달손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대군의 사저에 드나들던 그들은 권람의 천거로 수양대군의 장자방(張子房)이 된 한명회를 한방(韓房)이라 불렀다. 그것은 수양의 신망에 대한 질시와 칠삭둥이라는 조롱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문제도 한 방에 해결하는 그의 능력에 대한 경외심도 묻어 있었다.

"저도 그의 기별을 받고 왔습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내금위에 있다 무과에 급제한 홍달손은 힘이 장사였고 문과에 장원급제한 권람은 머리가 좋았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나는 놈 위에 구름을 움직이는 놈이 있듯이 자신의 한계를 절감한 권람은 경덕궁 궁지기로 있던 한명회를 수양에게 천거하여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권력은 바람이고 바람은 구름을 움직인다 하지 않았던가. 권람은 그의 번득이는 지략에 경탄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대문을 박차고 들어간 두 사람을 한명회가 반갑게 맞이했다. 수양이 똬리를 튼 사저는 그의 아버지 세종이 나이어린 조카를 잘 보필하라며 특별히 하사한 집이다.

"나으리께서 많이 기다리시네, 어서 들어갑시다."

구부정한 허리 때문에 턱을 들고 권람과 홍달손을 쳐다보던 한명회가 채근했다. 실력이 미천해서일까? 운이 없어서일까? 한명회는 젊어서부터 과거에 여러번 도전했으나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그의 나이 30대 중반이 넘자 과거에 대한 희망을 접었다. 명나라로부터 '조선'이라는 국호를 받아온 개국공신 할아버지를 둔 탓에 음보(蔭補)로 경덕궁 궁지기가 되었으나 꿈은 버리지 않았다.

세 사람이 좌정한 사랑채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한명회와 홍달손이 서른여덟 동갑, 권람이 서른일곱이었으므로 평소에는 스스럼없이 호형호제 했으나 시절이 하수상하니 그들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수양대군이 자리를 잡았다.

"교활한 김종서를 벨 것이다...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오늘은 요망한 적당(賊黨)을 소탕하여 종사를 편안히 할 것이다. 간당(姦黨) 중에 가장 교활한 자는 김종서다. 내 그자의 집에 곧장 가서 선 자리에서 그자를 벨 것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양대군의 얼굴에 비장감이 감돌았다. 폭탄선언이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되었으나 당혹스럽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좋습니다."

서로를 쳐다보던 두 사람이 머리를 조아렸다.

"내가 여러 무사들을 불러 조용히 이르겠으니 그대들은 집에 가 대기했다 땅거미가 내려오면 다시 오라. 큰일을 도모함에 있어 기밀이 새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 간당들이 먼저 알면 성사되지 못할 것이니 식솔들에게 입 조심하라."

잠자리를 같이하는 부인은 물론 가노들에게도 함구하라는 엄명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홍달손과 권람을 돌려보낸 수양이 식객으로 드나들던 무사들을 불러 후원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간신 김종서가 주상을 무시하고 권세를 희롱하며 안평과 공모하여 불궤(不軌)한 짓을 도모하려 한다. 지금이야말로 충신열사가 대의를 위하여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때이다. 내가 이자들을 베어 종사를 편안히 하고자 하는데 그대들은 어떠한가?"

후원에 서리가 내리는 듯했다.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홍윤성·강곤·임자번·최윤·안경손·홍순로·홍귀동이 주억거렸다.

"마땅히 먼저 대전에 아뢰어야 합니다."

송석손과 유형 그리고 민발이 제동을 걸었다. 원칙을 지키자는 것이다. 순간,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생과 사가 갈리는 길목이다. 잘되면 공신이 될 수 있고 못되면 역적이 되어 멸문지화를 당해야 한다.

하늘이 놀라고 땅이 움직일(驚天動地) 모사를 임금에게 먼저 고해야 한다니 수양은 아찔했다. 거사에는 보안이 첫째다. 기밀이 누설되면 만사가 헛일이다. 이러한 소인배들을 데리고 거사를 꿈꾼 자신이 너무 무모하지 않나 생각되었다. 이때였다. 한명회의 얘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으리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고 협조하지 않는 자들도 일단 후원으로 불러들여야 합니다. 그들도 거사가 실패하면 후원 회동에 참석했다는 것만으로도 목이 잘릴까봐 지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자들을 그대로 방치하면 저들에게 붙습니다. 저들에게 붙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불러들여야 합니다."

기발한 책략이었다. 역시 자신의 장자방감이라고 생각되었다. 의논이 분분하자 북문 쪽으로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는 사람도 있었다.

"무엇들을 하는게냐. 남문을 걸어 잠그고 북문을 닫아라."

수양의 목소리가 후원을 진동했다. 가동(家僮) 임어을운(林於乙云)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이 때였다. 집으로 돌아간 권람이 땅거미가 짙어지면 오라는 명을 거역하고 수양을 다시 찾아왔다.

"곽연성이 어미의 상(喪)이라며 사양하기에 여러 번 되풀이하여 말했으나 듣지 않는다. 그대가 타일러라."

수양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대군께서 지금 종사의 큰 계책으로 간사한 적당을 베고자 하는데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네를 부른 것이다. 자네는 장차 어찌하려는가?"

권람이 곽연성을 설득했다.

"장부가 어찌 장한 마음이 없겠습니까마는 상중이라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사나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을 수 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는 것이다. 지금 대군께서 만 번 죽을 계책을 내어 국가를 위하여 의(義)를 일으키는 것인데 자네가 어찌 구구하게 작은 절의(節義)를 앞세워 회피하려는가? 충과 효에는 두 가지 이치가 없다. 구차히 사양하지 말고 큰 효를 이루라."
"하늘이 두렵습니다."

울상이 된 곽연성이 무릎을 꿇었다. 순간, 후원에 숙연한 공기가 맴돌았다.

"불가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으니 계교가 장차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불콰한 낯빛으로 수양이 한명회를 쏘아보았다.

"길옆에 집을 지으면 참견하는 사람이 많아 3년이 되어도 짓지 못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도 이러할진데 하물며 큰일이겠습니까? 일에는 역(逆)과 순(順)이 있습니다. 순으로 움직이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목표가 이미 먼저 정해졌으니 지금 의논이 비록 통일되지 않더라도 그만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나으리께서 먼저 일어나면 따르지 않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군사를 쓰는데 있어 이럴까 저럴까 결단 못하는 것이 가장 해롭습니다. 지금 시간이 매우 급박하니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른다면 일을 그르칠 것입니다."

홍윤성이 거들었다.

"너희들은 다 나가서 먼저 고하라. 나는 너희들을 의지하지 않겠다."

노기를 띤 수양이 부르짖었다. 먹잇감을 앞에 놓고 울부짖는 한 마리의 호랑이와도 같았다. 수양이 활을 끌어안고 일어서 하늘을 우러러봤다.

"내 한 몸에 종사의 사활이 걸렸다. 운명은 하늘에 맡긴다. 장부가 죽으면 사직(社稷)에 죽을 뿐이다. 나를 따를 자는 따르고 갈 자는 가라. 나는 너희들에게 강요하지 않겠다. 만일 고집하여 사기(事機)를 그르치는 자가 있으면 먼저 베고 나가겠다. 군사는 신속한 것이 상책이다. 내가 간흉을 베어 없앨 것이니 누가 감히 어기겠는가?"

수양이 대문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송석손이 옷자락을 끌어당기면서 만류했다. 수양의 발길에 송석손이 나뒹굴었다.

"이 자들을 모두 가두어 둬라."

밖으로 내보내면 기밀이 샐 터이니 사옥(私獄)에 가두라는 것이다.

"대전에 먼저 아뢰지 않고 대신을 베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장차 우리들을 어느 땅에 두려고 이러십니까?"

사색이 된 여러 사람들이 다투어 튀어나왔다. 권람이 이들을 막아섰다.

"우리들은 용렬하지만 나으리의 그릇은 크다. 모든 것을 철두철미하게 계획하셨을 것이다. 그대들은 한방의 치밀함을 의심하지 말라. 만에 하나 일을 이루지 못하면 내가 어떻게 혼자 살겠는가? 장부는 순(順)을 취하고 역(逆)을 버린다. 나는 종사를 위하여 공을 세워 공명을 취할 것이다."

권람의 결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소인배는 돌아가고 대인배는 나를 따르라."

수양이 앞장섰다. 장부에게 소인배라는 칭호는 치욕적인 어휘다. 허나, 따라 나서는 사람은 한 두 사람에 불과했다. 수양이 중문에 이르렀다. 깊숙한 곳에 묻어 두었던 갑옷을 꺼내온 부인이 떨리는 손으로 갑주를 입혀 주었다. 이제가면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 그녀의 눈가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수양이 말에 올랐다. 그리고 고삐를 감아쥐었다. 단기(單騎)로 김종서의 집으로 향했다.

덧붙이는 글 | 역사에는 사실(史實)과 진실(眞實)이 있습니다.
역사에 사실(史實)로 기록되어 있어도 진실(眞實)이 아닐 수 있습니다.
때문에 역사를 승자의 기록이라 합니다.

역사적 사실을 씨줄에 놓고 진실을 날줄에 놓아
인간 수양대군을 교직하려 합니다.
역사소설 <수양대군>
많은 격려 부탁드립니다.



태그:#수양대군, #한명회, #덕수궁, #김종서, #계유정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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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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