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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부터 2011년 <오마이뉴스> 지역투어 '시민기자 1박2일'이 시작됐습니다. 이번 투어에서는 기존 '찾아가는 편집국' '기사 합평회' 등에 더해 '시민-상근 공동 지역뉴스 파노라마' 기획도 펼쳐집니다. 이 기획을 통해 지역 문화와 맛집, 그리고 '핫 이슈'까지 시민기자와 상근기자가 지역의 희로애락을 자세히 보여드립니다. 어느덧 여섯 번째, 이번엔 부산·경남입니다. [편집자말]
지역의 첨예한 현안이 담겨 있고 , 등장인물들이 현재 함께 사는 이웃들이라 실명 사용을 피하였습니다.  내가 사는 지역은 가상의 '청정군'으로, 사람들 이름은 이니셜 처리하였음을 양해바랍니다.... 기자 말

'나서면 다친다'는 말이 있다. '가만 있으면 중간은 한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잘 알려진 한국적 격언이다. 그 말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한국을 사는 우리네에겐 무척 피부에 와 닿는 말일 것이다. 이 격언이 더 절실히 와 닿는 곳이 있다. 바로 농촌이다.

농촌이 어떤 곳인가. 좁은 지역에 오랫동안 이동 없이 살아온 혈연·지연·학연의 완결자다. 농촌에선 한 지역의 사람들이 너나없이 한집 건너 친척이고 동창이다.  수십 년 동안, 아니 수세대에 걸쳐서 관계가 얼키고설킨 곳이 농촌이다. 

이런 농촌에선 지역 분쟁이 발생하게 되면 참 애매한 상황이 만들어진다. 이때 이해관계에 따라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는데, 이쪽 편이나 저쪽편이나 어제까지 '형님- 동생' 하는 사이요, '언니- 아우'하는 처지들이다. 이런 곳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고 나서는 건 참으로 조심스러워야 할 일이다.

늘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고 새로 이사해 온 사람은 어떨까?  귀농해 온 사람 말이다. 귀농해 온 당사자와 무관한 분쟁이라면야 눈 질끈 감고 모른 척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환경 문제나 개발 피해처럼 귀농자의 집이나 땅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라면 이야기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이 글은 그와 관련된 단순치 않은 이야기이다. 도시에 살다가 농촌에 귀농한 우리 가족의 '귀농 OTL(굴욕)' 스토리이기도 하다. 그것도 공교롭게 지역 분쟁의 시기에 '나서다 다치게 된' 이야기이다.

"적게 벌어서 적게 쓰자"... '탈도시' 감행한 부산 토박이

이야기를 귀농을 결심하게 된 것부터 해야 겠다. 우리 부부는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만 살아온 전형적인 '부산 토박이'들이다. 나는 금융권의 직장을 다녔고 아내는 지역 대학의 평생교육원 영어강사를 하며 생활했다.

우리 부부는 오래 전부터 경쟁이 좀 덜한 곳, 조용하고 자연이 깃든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나누곤 했다.  커가는 두 딸을 보며 더 그런 생각이 깊어갔다. 학교 외에는 일체의 사교육을 시키지 않았던 우리였지만 대도시에서 언제까지 학원 없는 생활을 보장해 줄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농촌을 하나의 대안으로 생각했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인 우리 부부에게도 농촌 생활이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머리만 쓰는 일, 과도하게 경쟁하는 일에서 벗어나 몸을 써서 하는 일, 공동체 기운이 남아 있는 곳을 떠올리게 됐다. 또한 먹거리를 손수 생산해서 나누는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경제적인 문제가 고민이었지만 '적게 벌고 적게 쓰는 모드'로 바꾸면 불가능한 건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사실 설득보다는 우김질에 가까웠지만).

결심이 서자 아내와 나는 부산과 가까운 경남 지역으로 살 집을 찾고자 돌아다녔다. 먼저 귀농한 선후배에게 귀농지를 부탁하기도 하고 일일이 발품을 팔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다가 겨우 집을 구해 들어가게 된 곳이 경남 '청정군'(가명)이다. 그때가 2007년 2월이다.

조용하고 소박한 농촌의 삶 그것은 가능할까
▲ 소박한삶 조용하고 소박한 농촌의 삶 그것은 가능할까
ⓒ 서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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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골프장이 터지기 전까지는

정착 1년 동안은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자리잡은 마을의 이웃들도 좋았고 텃세도 없었다. 농지도 쉽게 빌렸다. 논은 두마지기(약 400평)을 빌려 우렁이 농법으로 무농약 쌀도 생산하고 단감밭도 구입해서 과일농사도 시작할 수 있었다. 

친환경 인증도 받게 되어 인터넷을 통한 직거래를 하는 데 별 문제가 없었다. 단감을 먹어본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아 차츰 농사를 더 늘려야겠다는 계획으로 즐거운 궁리가 늘어갔다. 귀농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농사도 잘됐다. 귀농한 지 1년 만에 지역에 제법 많은 사람들과 친분도 쌓을 수 있었다. 지역 풍물패 활동도 했고 청년회와 농민회 가입도 해서 젊은 사람들과는 가깝게 오고가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중 이상한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지역에 대형 골프장이 들어선다는 거였다. 처음엔 설마했다. 그런데 그 설마가 사실로 밝혀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27홀짜리 큰 골프장이었다.

군수가 말을 바꾼 모양이었다. 군수는 선거 전에 "우리 지역에는 골프장이 들어서지 않도록 하겠다"는 공약을 걸었고 그 덕에 이 지역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당선됐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취임 후 모호하게 입장이 흔들리더니 골프장업체 쪽으로 기울어 버렸다.

지역 여론은 들끓었고 반대의 기운은 높았다. 여론조사를 해보니 지역민의 96%가 골프장 건설에 반대했고 군수를 원망했다. 마을 주민들의 마음은 절박했다. 하루 2000톤의 지하수를 쓰게 된다는 골프장은 주민들에게 청천벽력이었다.

무엇보다 우리 지역은 만성적인 물부족 지역이었다. 토양이 물을 머금는 게 약하다고 했다. 본격 농사철만 되면 부족한 물 때문에 전쟁이 났다. 식수로 이용하는 마을 지하수도 몇 년만 지나면 고갈되어 다시 식수용 지하수를 파야 했다.

그런 곳에 골프장이 들어서고 대형 지하수를 새로 파서 엄청난 양의 물을 쓴다고 하니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는 건 당연했다. 그것도 마을 코앞에 골프장을 짓겠다니, 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마침내 지역에서 대책위원회가 구성되고 연일 집회가 열렸다. 이런 흐름을 지켜보는 나의 마음도 복잡해졌다. 친환경농업을 꿈꾸며 농촌에 들어온 지 겨우 1년 지났는데... 이제 겨우 틀을 잡아가나 싶었는데 이게 뭔가 싶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처음 시작한 친환경인증 단감농사
▲ 단감농사 처음 시작한 친환경인증 단감농사
ⓒ 서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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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수 놓던 '들어온 돌'... 전쟁에 발을 담그다

지역 주민들의 반대 열기는 높았지만 흐름은 좋지 않았다. 마음만 절박했지 싸우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해 골프장 건설업체 쪽은 '프로'들이었다. 수시로 선물을 돌리며 물량 공세를 펼쳤다. 주민들을 개별 접촉해 웃돈을 주며 무섭게 땅을 매입해 들어갔다.

시간이 지나자 땅을 팔아버린 사람과 팔지 않고 버티는 사람간의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상한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며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는 자들도 있었다. 팽팽하던 힘의 균형이 깨어지는 듯했다. 확고하던 주민들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럴 때 경험 있는 지도자가 있어야 할 텐데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이 모든 걸 지켜보는 내 마음은 답답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이곳으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내가 나서서 이러쿵 저러쿵 할 처지도 못되었다. 어쨌거나 나는 '박힌 돌'이 아니라 '들어온 돌'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술자리에서 만나는 지역 형님들에게 도움말을 주는 정도였다.

"형님, 혹시 인근의 OO시나 ××시 환경단체에 아는 사람 없어요?"
"어, 있긴 있지."
"아니 그럼 뭐해요? 어서 그쪽에 경험있는 실무자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요."
"음. 아무래도 그래야 겠제?"

또 어떤날은.

"형님. 지난 번 지역신문 기사에 우리 지역 골프장 문제가 영 이상하게 나왔던데, 신문사 항의방문 한 번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 하면 좋은데 언론사 쪽에 공문이나 이런 거 보낼 줄을 모른다 아이가..."

이렇게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술자리에서 걱정하다 보니 점점 더 참견하는 일이 많아졌다. 대책위의 형님들도 내게 물어오는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몇 차례 물어보고 대답해 주던 일이 계속되다 보니 대책위에서 작성하는 성명서나 기자회견문을 손봐주기까지도 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날 밤 대책위의 형님 세 명이 우리집을 찾아왔다. 형님들의 요구는 강경했다.

"안 되겠다. 재호 니가 본격적으로 좀 도와줘야 겠다. 니도 여기서 농사를 친환경으로 지을라 카면 골프장을 막아야 안 되겠나? 같이 하자."

몇 번을 고사하다가 어쩔 수 없이 조금은 돕기로 했다. 앞에서 나서진 않는 대신 부족하거나 빠진 부분은 내가 메우기로 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기도 했다.

"니 누꼬?"... 주민설명회에서 내 멱살 잡은 그 덩치

그렇게 어정쩡하게 내가 개입하는 가운데 골프장 주민설명회를 연다는 군청의 공고가 붙었다. 날짜와 장소는 2008년 2월 13일. C면 면사무소 2층 강당이었다.

중요한 날이었다. 법적으로 꼭 거쳐야 하는 절차였다. 주민설명회를 거치지 않고는 골프장건설이 다음 단계로 진행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골프장업체와 군청은 주민설명회에 커다란 공을 들였다. 준비도 많이 하는 듯했다. 형식적이더라도 주민설명회를 하는 시늉을 해야 하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대책위와 주민들 입장에서도 이날은 물러설 수 없는 날이었다. 날치기로라도 "땅. 땅. 땅." "주민설명회 개최를 선언합니다"하게 되는 날에는 골프장업체에 날개를 달아주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주민설명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오후 2시로 예정된 주민설명회 장소인 면사무소 강당 입구는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일찍부터 골프장업체 직원들과 용역들이 입구를 점령해서 막아버린 거였다. 주민설명회인데 정작 주민들은 들어갈 수 없었다. 주민이 빠진 주민설명회가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설명회장으로 들어가려는 주민들과 입구를 막아선 덩치들의 대치가 시작됐다. 주민들은 대부분 노인들이었고 군데군데 청년(이라 해봐야 40~50대들이지만)들이 몇몇 있을 뿐이었다. 입구를 막고 있는 덩치들은 서로의 팔로 스크럼을 짜고 차단벽을 만들어 버렸다. 입구가 막혀 버린 지역주민들은 복도와 계단을 가득 메웠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지역의 노인들은 분통을 터뜨렸지만 인간 차단벽은 요지부동이었다. 중간중간에 섞여 있던 대책위의 형님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저들이 이정도까지 나올 줄 몰랐다.

주민들 뒤에 서있던 나도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곧 2시가 되면 저 안쪽 강당 안에서는 자기들끼리 개회선언하고 바로 끝내 버릴 텐데 이러다가는 꼼짝없이 당하겠구나 싶었다. 순간적인 결단이 필요했다. 이제 10분 정도만 지나면 2시였다. 약간의 망설임 끝에 앞으로 나섰다.

내 옆에 있던 OO시에서 온 시민단체 실무자에게 "이 모든 상황을 동영상으로 찍으세요"라고 부탁하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입구에 막아선 업체 직원들과 용역에게 다가가며 궁리했다. 이런 상황에선 저쪽의 부당성을 알리고 공분을 모으는 게 급하다고 판단했다. 이젠 뒤로 물러설수도 없다. 내 입도 그들을 정확히 향했다.

"여기는 C면 주민설명회 하는 곳입니다. 막아선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주민 설명회인데 주민들을 못 들어가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의 거듭되는 외침에도 그들은 침묵할 뿐이었다. 다시 외쳤다.

"주민을 못 들어가게 하는 주민 설명회가 무슨 주민설명회입니까?"
"이렇게 주민 빼고 하는 설명회는 다 무효입니다."

나의 외침에 복도와 계단에 가득찬 주민들이 차츰 호응하기 시작했다. 조금 지나니 봇물 터진 것처럼 항의의 말들이 점점 더 쏟아져 나왔다. 반전된 분위기에 다시 기운을 차린 대책위 형님들은 힘으로 밀어서 입구를 뚫어 버리기로 했다.

용역들과 주민들의 밀고 당기는 힘싸움이 시작됐다. 저쪽은 덩치들이 좋았으나 숫자가 적었고 절박함이 덜했던 것 같다. 이쪽의 청년들과 노인들이 고함 속에 힘을 쏟으니 이내 인간차단벽이 허물어졌다. 오후 2시가 되기 1분 전쯤, 마침내 우리는 설명회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확 나꿔챘다. 내 몸이 그 쪽 방향으로 돌자 이번에는 누군가 내 멱살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순간적으로 멱살을 잡혀 놀란 나는 내 앞의 인물을 쳐다보았다. 엄청난 덩치의 중년 남자였다. 그는 멱살을 쥔 채로 험악하게 내게 소리 질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니는 내가 갋아야(밟아야) 겠다. 니 누꼬?"

순간 설명회장의 시선들이 모두 우리 두사람에게 향했다. 멱살 잡힌 순간, 당황은 했지만 내가 잘못한 건 없으니 나도 가만 있을 순 없었다. 나도 그 자의 멱살을 맞잡으며 소리쳤다. 맞잡는다고는 했으나 그의 긴팔에 막혀 겨우 어깻죽지 정도를 잡고 외쳤다.

"이거 못 놔? 당신 깡패야? 뭐하는 짓이야,이게!"

흥분한 그 남자는 씩씩거리더니 이번에는 손뚜껑만한 주먹으로 나를 치려고 했다. 어수선한 설명회장에서 경황 없던 사람들은 그제야 놀라서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동네 형님들도 둘 사이에 급히 몸을 날려 떼어놓았다. 양쪽 사람들에게 안긴 채로 우리 둘은 그렇게 서로를 한동안 노려보았다.

그렇게 매섭게 쳐다보던 그 자는 주위 동료들에게 "철수하자"고 한마디 하더니 휙~ 하고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행동대장격인 모양이었다. 다른 이들도 그를 따라 모두 나가 버렸다. 그렇게 골프장 직원과 용역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우리들은 환호했다. "이겼다!"

폭력으로 고소당한 아내... 모두 나 때문이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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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우리는 이겼을까? 적어도 그날은 이겼던 것 같다. 이런 걸 전투에 비유하면 될런지 몰라도 이렇게 말하는 게 쉬울 것 같다. 그날의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전체의 전쟁에서는 이기지 못했다. 역부족이 아니었나 싶다.

한 번의 패배로 그들은 지치지 않았다. 그뒤로도 그들은 주민설명회를 다시 시도했다. 이번에도 우리는 대비를 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들은 그 이상이었다. 아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을 그들이 해버렸다.

군청 공무원들 120명이 동원돼 설명회장 입구를 막아 버렸다. 그리곤 일부 찬성 주민만 입장 시키고 대부분의 반대 주민 입장은 원천적으로 막아 버렸다. 그렇게 주민설명회는 열린 것으로 처리됐다.

군청에 몰려가 항의하는 주민들에게 군수는 모르는 일이라 했다. 동원을 지시한 적도 없고 출장내준 직원들도 없다고 했다. 이런 식인데 어찌 상식을 가진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패했다. 그뒤 행정소송을 제기했지만 이런 명백한 사실을 제시해도 이기지 못했다(역사에 남을 만한 군청의 작전은 2008년 2월 14일자 <경남도민일보>에 상세히 나와있다).

골프장 싸움에서 우리는 패했다. 우리만 패한 것이 아니라 나는 나대로 또 패했다. 주민설명회 일이 지난 후 3주 가량 뒤의 일이다. 우리집으로 사복경찰이 두 명 찾아왔다. 주민설명회장에 있었던 폭력사건 때문이랬다.

나는 그날 나를 노려보던 그 덩치를 떠올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니는 내가 갋아야 겠다. 니 누꼬?"라고 하던 그 서슬 푸르던 눈초리가 생각났다. 그런데 뜻밖에도 경찰은 아내를 찾았다. 그날 설명회장에서 아내가 골프장 건설업체 상무를 넘어뜨려 전치 2주의 상처를 입혔다는 거였다. 당사자의 고소가 있어 조사해야 겠다는 거였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증거는 없었다. 당사자의 고소와 진단서뿐이었다. 그래도 고소가 들어온 이상 경찰서에 출두해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결국 무혐의 결정이 났지만 그로 인해 아내는 시달려야 했고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다. 

너무도 뻔한 수였다. 나에 대한 공격이었다. 골프장대책위를 알게 모르게 지원하고 있는 나에 대한 공격이었다. 첫 번째 주민설명회가 무산된 것에 대한 앙갚음이기도 했다. 나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본 모양이었다. 나를 직접 걸고 넘어지기 어려울 것 같으니 약한 고리인 아내를 걸고 들어온 거였다. 가족을 통한 압박이었다.

아내에 대한 폭력 혐의가 검찰에 의해 '혐의없음' 결정이 난 후 나는 잠시 고민했다. 아내를 고소한 골프장 상무에 대해 무고로 고발하는 문제를 생각했다. 주변에서 만류했다. 그리고 아내를 경찰과 검찰에 또 출두시키고 싶진 않았다. 미안했다. 고민 끝에 고발을 접었다.

죽기 살기로 싸울 땐 언제고... "우짜겠노, 지역 사람인데"

졸지에 나는 지역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귀농 1년 만에 지역에 화려하게 등장한 셈이다. 결코 원치 않던 일이다. 경찰서와 면사무소 공무원들이 길에서 만나면 나에게 아는 체를 한다. 농협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호' '불호'가 분명한 유명인사가 되어 버렸다. 골프장에 반대했던 주민들은 나를 좋게 보는 것 같고 찬성했던 소수의 주민들은 나를 기피하는 게 느껴진다. 딱 잘라 그렇진 않겠지만 대체로 그런 느낌이다. 

그건 어쩔수 없는 일이지 싶다. 내가 그날 주민설명회장에서 앞으로 나서는 순간, 감수해야 할 일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내가 수긍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감수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다. 우선 지역 유력인사 J씨 이야기부터 해보겠다.

골프장의 잡초 제거 작업을 벌이고 있는 지역 주민들.
 골프장의 잡초 제거 작업을 벌이고 있는 지역 주민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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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장 반대대책위에서 공동위원장을 하던 인사 J씨는 그뒤 아름답지 못한 변신을 했다. 그 군수의 재선을 위해 선거운동원이 되어 뛰어다녔다. 그 군수가 누구인가? 골프장 건설을 작전하듯 밀어붙인 사람이다. 언제 반대운동을 했냐는 듯이 군수를 위해 열심히 뛴다.

그는 대책위 공동 위원장이면서 지역의 크고 작은 단체에 직함을 두루 걸치고 있다. 그런 J씨를 주민들은 뒤에서 욕하면서도 해마다 그를 다시 뽑아준다.

이렇게 욕먹는 그가 계속 지역에서 주요 직책을 차지하는 배경에는 그의 성씨가 있다. 'J'라는 성씨는 이곳에서 최대 성씨다. 그가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문중에서 내치지 않는 이상 그는 지역에서 큰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J씨 문제 말고도 내게는 감수하고 싶지 않고 수긍하고 싶지 않은 일이있다. 역시 골프장 문제와 관련이 있다. 주민설명회날 나와 멱살잡이했던 행동대장을 기억할 것이다. 알고 보니 그도 우리 C면 출신이고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편의상 P씨라 하겠다.

P는 우리 청정군의 유명한 주먹이었다. 각종 선거나 이권사업에 힘을 쓰거나 조직을 동원할 일이 있을 때 나서는 인물이라 한다. 그런 사람과 멱살잡이를 했으니, 나도 참 '무식하니 용감하다'는 말이 딱 맞는 짓을 한 셈이었다.

P도 나에 대해 전혀 정보가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 들어 보니 그도 내가 이곳으로 귀농한 사람인 줄 몰랐다고 한다. 마산의 시민단체 사람이 자기 일을 방해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게 다짜고짜 덤벼들었다 한다.

어쨌든 골프장 건설일로 P는 더 지역의 인심을 잃었다. 마을 주민들은 그의 어머니가 하는 마을 매점도 못하게 해야 한다고 들고 일어났다. 청년들도 그를 다시는 상종 못할 인간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농촌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연줄의 망이다. 집성촌이고 초등학교 동창들의 끈끈한 정이 넘치는 곳이다. 지역 공동체에 위태로운 해를 끼친 자에 대한 복권은 참으로 쉽게 이뤄지곤 한다. 그의 어머니가 하는 마을 매점은 쫓겨나는 대신 자리만 살짝 옮겨 계속 성업중이다.

"골프장은 절대 들어와선 안 된다"고 호언하던 청년회장 K형 이야기도 빠질 수 없겠다. 최근에 청년회장 K형은 내게 청년회 총무를 맡아 달라고 했다. 그리고 어렵사리 새로운 결정 사실을 이야기해 줬다. 그 주먹패인 P도 청년회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우짜겠노. 같은 지역사람인데"라는 말과 함께.

나는 크게 반대했다. P가 골프장 문제로 우리 지역에 끼친 해악에 대해 거품을 물고 말했다. 그리고 P를 받아들일 거면 나는 청년회 총무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술 먹고 찾아가 청년회장 K형에게 따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돌아온 회장 K형의 말은 "우짜겠노. 니가 이해해라"였다.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친분의 구분이 되지 않는 처신들에 할말을 잃었다. 사적으로는 그 주먹패 P는 내 작은딸의 학교 절친과 관련있는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초등 6학년인 작은딸의 둘도 없는 친구의 아비가 바로 P였다. 참 묘한 인연이다.

그러다 보니 그 싸움 뒤에 학교 학부모 모임이다 뭐다해서 P와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서로 어색한 인사만 주고 받곤 한다. 앞으로도 어쩔 수 없이 서로는 같은 지역에서 자주 마주치며 살게 될 것이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거나 눈길을 피하면서 말이다.

지금 그 주먹패 P는 청년회에 들어왔고 행사가 있을 때마다 찬조와 기부를 넉넉히 해서 칭송이 자자하다. 술자리에선 초등학교 선후배끼리의 돈독함이 넘쳐난다. 그들만의 아름다운 화해 모습이다. 골프장 분쟁이 언제 휩쓸고 지났나 싶게 사람들은 그들의 자리로 쉽게 돌아갔다. 잊은 걸까? 덮고 싶은 걸까?

6일 전에 농민회활동을 하는 윗마을 H형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번에는 우리 지역에 초대형 축사가 들어서려고 한다는 거였다. 1만두 가량의 소축사가 들어서면 그 냄새와 폐수 때문에 큰일이란다. 그러면서 내게 글을 좀 써달라고 부탁했다. 군수에게 우리의 반대 입장을 전달해야 겠다는 거다. 나는 생각해 보겠다고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받은 지 6일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 아무런 답을 하지 않고 있다.



태그:#귀농, #골프장, #친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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