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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왕상 7장(2)

<장자(莊子)> 천도(天道)편에 보면 제(齊) 환공이 당(堂) 위에서 책을 읽다가 수레바퀴를 깎고 있던 하찮은 노인네의 수작에 말려드는 장면이 나오고, 여기 제(齊) 선왕 역시 당(堂) 위에 앉아 있다가 희생에 쓰일 소를 끌고 가던 아랫사람에게 괜한 수작을 걸었다가 뻘쭘해진 사실이 기록돼 있다.

둘 다 제(齊)를 배경으로 일어난 일이고, 둘 다 당 위에 앉아있던 제후와 아랫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한가로이 책을 보고 있는 제후와 그 권위에 기죽지 않고 도발 혹은 망설임 없이 받아치는 아랫 것들(^^)의 발칙함. <장자>에서는 아랫사람이 먼저, 여기 <맹자>에서는 윗사람이 먼저 수작을 붙인다. 무소불위의 권력자인 제후가 희생을 위해 끌려가던 소를 보고 측은해져서 아랫사람에 명령한다.

"그만두어라(舍)."

서슬 퍼런 명령에 소를 끌고 가던 아랫사람의 태연함. 일말의 저어함이나 거리낌 없는 대꾸.

"그럼 흔종을 하지 말라굽쇼?"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라는 짜증 섞인 육성이 행간에서 들리는 듯하다. 수레바퀴나 깎던 노인에게 뒤통수 얻어맞는 환공이나 여기 아랫사람에게 발리는 선왕의 뻘쭘함. 자못 신선하다.

맹자(BC 372? ~ BC 289?)와 장자(BC 369 ~ BC 289?)는 생몰이 거의 겹치는 동시대의 인물이다. 아마 이 당시 사상계에서는 당 위에 앉은 제후와 그 당을 지나거나 거기서 일을 보는 아랫사람과의 대화를 통한 풍자가 일종의 유행이었나 보다. 제후가 당 위에서 편안히 책을 보고 있다는 뜻은 그런 지배 체제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안정적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하고, 아랫 것들의 발칙한 도발이란 그런 정치체제가 오랜 기간 정체(停滯)되면서 지배계층의 허약한 논리가 이미 보통 대중들에게도 모조리 간파되어졌다는 뜻일 수도 있다.

상식이 통하지 않을 때, 합리나 논리적인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여길 때, 사람들은 화법을 비틀어 버린다. 비틀린 화법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나꼼수가 선사하는 통쾌함이란 간단하다. 이미 간파되어 까발려짐, 거기에다 희화화까지 더해진 것. 각설하고, 앞장에서 좀 거시기(?)한 태도로 손님을 맞던 제 선왕에게 밑밥으로 던져두었던, 그 정도의 마음 씀씀이면 왕 노릇하기에 충분하다고 한 말, 이제 그것을 설명해야 될 차례. 선생의 눈물겹고도 교묘한 논변이 시작된다. 제 선왕은 자신의 심경을 헤아려주는 맹자의 부추김에 조금씩 자신의 본심을 내비치기 시작한다.

"그렇더군요(백성들이 저가 소 한 마리가 아까워서 양으로 바꾸라고 한 것으로 알더군요), 제나라가 비록 변두리 작은 나라이긴 해도 저가 어찌 소 한 마리를 아끼겠습니까? (저는) 다만 그 소가 벌벌 떨면서 죄 없이 죽으러 가는 것을 차마 못하는 마음에 양으로 바꾸라고 한 것이었지요(然誠有百姓者齊國雖褊小吾何愛一牛卽不忍其觳觫若無罪而就死地故以羊易之也)."

맹자는 노련하게 자신의 순수한 의도를 알아주지 않는 백성들을 탓하며 선왕의 삐친(^^) 그 마음부터 살살 어루만져준다.

"왕께서는 백성들이 왕을 인색하다고 여기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실 필요가 없습니다. 작은 것(양)으로써 큰 것(소)을 바꾸라는 뜻을 저들이 어찌 알겠습니까(王無異於百姓之以王爲愛也以小易大彼惡知之)?"

이 정도의 위로야 누구나 가능하다. 그러나 어루만져 주는 동시에 교묘한 장치를 깔아놓는 일은 아무나 가능한 것이 아니다. 바로 이어지는 맹자의 다음 말에 한번 물면 빠지지 않는 예리한 미늘이 감춰놓는 것은 져있음을 제 선왕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왕께서 만약 죄 없으면서 사지로 들어가는 것을 측은히 여기셨다면, (둘 다 같은 생명인데) 소와 양을 어째서 가리신건지요?(王若隱其無罪而就死地則牛羊何擇焉)"

이 질문은 철저히 계산된 질문이고, 미늘을 숨긴 낚시 바늘이 목구멍을 타 넘으면서 바야흐로 제 선왕의 뱃속까지 미끄러져 들어갈 기세. 제 선왕은 아직도 맹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소나 양에 생각이 머물러 있고 맹자는 소와 양을 넘어 제 선왕의 마음까지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이렇다. 왕이 웃으며 말한다.

"(글쎄 말입니다) 정말 그건 어떤 마음이었을까? 나는 돈을 아끼자고 해서 한 일이 아니면서도 양으로 바꾸라 하였으니, (아아! 그러고 보니) 백성들이 나를 인색하다고 말하는 게 당연하겠구려(王笑曰, 是誠何心哉 我非愛其財 而易之以羊也 宜乎百姓之謂我愛也)."

선생 역시 일이 되어간다고 느꼈는지 조금 격앙되고 흥분한 목소리로 장단을 맞춰주면서 군자(君子)라는 조금은 과도해 보이는 헌사(獻辭)까지 아낌없이 쏟아 붓는다. 맹자가 숨겨놓은 미늘은 이것이다. 자, 생각해보십시다. 당신은 언젠가 죄 없이 죽으러 가는 소를 봤던 사실이 있죠? 또 그 소를 보니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말리려는 마음이 있었죠? 그런데 흔종(釁鐘)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당신이 봐 보지 못한 양, 즉 죄책감이 들지 않는 양으로 바꾸라고 명령한 사실이 있었죠?

측은하게 여기는 그 마음, 그 마음이 바로 인술(仁術)입니다. 어진 통치를 하실 수 있는 단서, 가능성이란 말씀입니다. 군자란 쉽게 말하자면 먹기 위해 짐승을 도살하는 것을 듣거나 차마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왕께서도 그 맑은 눈망울의 소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는 것, 그리고 바꾸라고 한 것, 그것이 군자들만이 가지는 차마 못하는 마음입니다. 따라서 당신은 군자인거죠. 맹자의 논리대로라면 이제 제 선왕은 꼼짝없이 팔자에도 없는 군자가 돼 버리고만 것.

이런 과도한 논리와 헌사에 그만 제 선왕도 깜박 넘어가 버린다. 그래서 시경(詩經)의 한 구절까지 대담하게 인용해가며 화답한다. 왕이 기뻐하면서 말하길 "시경에 '다른 이에게 마음이 있는데 내가 그것을 헤아린다네'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선생님을 두고 한 소리군요(王說曰詩云他人有心予忖度之夫子之謂也)." 서로를 띄워주시는, 요즘식대로 말하자면 더블 깔대기가 난무하고 두 분은, 화기가 애애하시다.

좋아 죽는 제 선왕, 탄력 받으시고 오버하신다.

"내가 그리 행하고 내 마음에 돌이켜 보았는데도 내 마음(그 까닭)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해주시니 (이제야) 내 마음이 척척해집니다(夫我乃行之反求之不得吾心夫子言之於我心有戚戚焉)."

척척(戚戚)이란 보통 근심하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로 주로 쓰이지만 여기 주석을 보면 '마음이 움직이는 모양(心動貌)'이라고 나와 있다. 선생의 논변이 제 선왕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이런 마음이 왕 노릇 하는 자에 부합한다고는 말하는 이유가 뭡니까?(此心之所以合於王者何也)"

드디어 제 선왕이 제 입으로 왕 노릇 하는 일을 묻고 있으니, 선생은 여기서 거의 승리를 예감했으리라. 선생의 낚시에 제(齊)라는 대물(大物)이 걸린 것이다.


태그:#맹자, #나꼼수, #깔대기, #장자, #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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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아들이며 누구들의 아빠. 학생이면서 가르치는 사람. 걷다가 생각하고 다시 걷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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