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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셋 몸
▲ 달과 6펜스 서머셋 몸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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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림을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고 하지 않았소. 이 마음은 나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거요.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를 따지고 있겠소? 어떻게 해서든지 물속에서 빠져나와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죽는 것 아니오."

얼마만이지? 다시 만난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를 읽었다. 읽었던 책을 긴 시간 지나 다시 읽는 기쁨은 그땐 발견하지 못했던 것과 생각지 못했던 것이 보이는가하면 그때 받은 감동이 되살아나기도 한다는 점이다.

글은 그 사람이라는 말은 과연 옳다. <달과 6펜스>는 한 예술가(화가 고갱)에서 모티브를 얻어  쓴 소설이다. 주인공 '스트릭랜드'라는 한 인물의 삶의 반전, 어느 날 문득 평범한 직장인에서 벗어나 기행과도 같은 삶을 살았던 한 예술가의 삶을 통해 작가 서머셋 몸의 작가관과 가치관을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가 추구하는 예술적 삶을 말이다.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40년 동안 살아왔다. 그의 아내는 작가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 모임을 갖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고 스트릭랜드는 두 자녀의 아버지요 남편이며 직장인으로 특출나지 않게 살아왔다. 그러던 그가, 40년 동안 평범하고 미온적이었던 일상을 모두 버리고 나이 마흔 살에 가출한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모두 버린다.

오직 '그림만 그리겠다는 뜨거운 집념과 열정으로 말이다. 굶주림과 궁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 없이 떠돌며 그림 그리는 일에만 전념한다. 40년 동안 헛되이 보낸 지난 삶을 만회하려는 듯 오직 그림 그리기에만 몰두한다. 자신이 아니었던 지난 삶,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의 몇 배의 삶으로 보상하려는 듯이. 더 이상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이 미친 듯이 그림에 몰두한다.

도대체 왜 집을 나왔냐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러니까 그림을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고 하지 않았소. 이 마음은 나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거요.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를 따지고 있겠소? 어떻게 해서든지 물속에서 빠져나와야 하고 그렇게 못하면 죽는 것 아니오."

오직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지체할 수 없는 절박감을 안고 마흔 살에 가출을 감행한 것이다.

"심리적인 전환은 사람에 따라 여러 형태와 갖가지 경과를 거쳐 나타나기 마련이다. 사람에 따라 노도 같은 격류가 바위를 단번에 산산조각 내듯 격변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고, 낙숫물이 바위에 구멍을 뚫듯 서서히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스트릭랜드의 경우에는 광신자의 열성적인 면과 사도의 광포함을 연상케 하는 면이 있었다."(p.64)

서머셋 몸은 8살에 어머니를 잃었고, 10살엔 아버지를 잃었다. 그는 목사인 숙부님의 집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의 사랑의 울타리가 없던 시절, 그는 심한 말더듬이에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학교 친구들과 적응하지 못했고, 책에 몰입하면서 작가를 꿈꾸었다. 하지만 숙부는 의과대학에 진학하라고 충고하는 바람에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졸업 후 그의 작품을 읽은 저명한 비평가 에드먼드 고스의 격찬을 듣고 용기를 얻은 그는 힘들게 얻은 의사 자격증을 버리고 직업적인 작가 생활을 하게 되었다. 서머셋 몸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것은 일생동안 버릴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달과 6펜스>에 그려진 화가 '스트릭랜드'라는 인물을 통해서 서머셋 몸을 발견하게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소설에서 스트릭랜드 말고 한 의사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인물에서도 서머셋 몸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소설 속에 '나'가 센트 토머스 병원부속 의대생이던 때에 알게 된 어느 친구다.

아브라함이라는 유태인인데 실력이 뛰어난 의대생이었고 5년 간 상이란 상은 혼자서 휩쓸었던 사람이다. 머리가 뛰어난 수재였던 그는 병원에서 내과와 외과 의사를 겸했고 모두가 인정하는 우수한 두뇌였다.

아브라함이라는 유태인 친구는 실력이 뛰어난 의대생인데다가 모두가 인정하는 우수한 두뇌다. 마침내 그는 병원 간부 요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그의 장래는 확실히 보장되고 최고의 지위에 오를 인물이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입항해 갑판에서 아침 햇살을 받아 하얗게 번쩍이는 도시와 부두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던 중에 그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그동안 그가 쌓았던 모든 명성을 홀연히 내려놓고 남 보기에 초라한 의사로 살아간다. 파격적인 전환이다. 자신이 그동안 힘들게 쌓아올린 모든 경력을 내던진 용기였다. 서머셋 몸은 소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 자기가 바라는 것을 실행하고 자기가 만족하는 환경 속에서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 일생을 망친 것이 될까? 연 수입 1만 파운드의 유명한 의사가 되어 미인 마누라를 얻어 사는 것이 성공일까? 요컨대 그것은 자기가 인생의 의미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며, 사회가 자기에 대한 요구를 어느 정도 인정하느냐에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한다."(p.214)

세상에는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수를 이룬다. 인생의 의미를 어디에 두고 있는 지 작가 몸은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묻는다. 동시에 그 자신은 인생의 의미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소설로 답한다. 세상에는 동그란 구멍 속에 잘 맞는 동그란 못과 같은 다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동그란 구멍 속에 박힌 네모난 못과 같은 존재'들도 있는 것이다. 바로 스트릭랜드 같고 아브라함 같은.

"스트릭랜드를 사로잡았던 정열은 바로 미를 창조하고자 하는 열정이었어요. 그 정열은 그의 마음을 끊임없이 재촉하여 조금도 쉴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았던 모양이오. 신성한 노스탤지어에 사로잡혀 영원한 순례자가 된 거예요. 그의 몸 안에 자리 잡은 악귀는 무자비함, 바로 그거였죠. 세상에는 진리를 구하는 욕구가 너무나 강해서 그것을 잡기 위해서는 자기들이 서 있는 토대마저도 못쓰게 만들어 놓고 돌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트릭랜드도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소."(p.227)

'세상에는 완전히 사회 조직 속에 녹아들어 그 속에서라기보다 다만 그것에 의해서만 살아가는 흐릿한 그림자 같은 사람들이 많은 법'(p.32)이다. 또 한편으로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도 있다. 그동안 시력과 역량을 쌓아온 최고의 수재요 의사로서 탄탄대로가 열려있는 길을 30분의 고민 끝에 버리고 아렉산드리아에 남아 평범한 의사로 살아가는 길을 택하는 사람도 있다. 둥근 못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박힌 네모난 못처럼 세상의 주류들과는 다른, '의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안락한 생활이 주는 사회적 가치와 안일한 행복을 모르진 않지만 자기 가슴 속 깊은 데서의 부름에 응답한 사람들이. 기꺼이 험란한 행로를 걸어가는 사람들이.

서머셋 몸 자신이 '글'이 그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던 것처럼.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처럼. 마치 노예선의 좌석에 사슬로 묶인 노예들처럼 자기 자신의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처럼. 내면의 목소리 따라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정열도 그런 사랑에 빠진 마음이나 다름없이 폭군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신성한 노스탤지어에 사로잡혀 영원한 순례자가 된...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를 통해 물질과 예술의 팽팽한 대립, 그리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묵묵히 자기 길을 간 사람들을 만났다. 우리는 언제나 갈림길에 선다. 선택은 자유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자기 몫으로 남는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을까.

그리스 철학자 에픽헤토스의 말처럼, 한 사람이 그 생애에서 모든 고난을 겪고 힘들여 행한 일들을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그가 쓴 책을 통해 나의 것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시대를 초월한 만남과 여행이다. 좋은 책은 언제나 향기롭다. 좋은 책은 자신의 길을 멈추어 서서 돌아보게 하고 감춰진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한다.

'스트릭랜드'에게 있어 그림이 전부였다면 40년 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을 버릴 정도로 간절한 그 무엇이었다면... 나, 그리고 당신의 전부를 걸 만한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둥근 못이 잘 들어갈 둥근 못자리인가. 아니면 둥근 못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들어간 네모 난 못인가. 당신은 안락한 생활에 젖어 있는가. 아니면 가슴 속의 부름에 응답해 험로도 마다하지 않고 있는가. 몸은 그렇게 묻고 있는 것 같다.


달과 6펜스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민음사(2000)


태그:#달과6펜스, #서머셋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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