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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자 성폭행 혐의를 받고 있는 방송인 고영욱이 15일 오후 서울 용산서에서 재수사를 받기위해 출석하고 있다.
 미성년자 성폭행 혐의를 받고 있는 방송인 고영욱이 15일 오후 서울 용산서에서 재수사를 받기위해 출석하고 있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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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연예인의 미성년자 성폭행 혐의가 드러났다. 이 사건의 전개 과정은 한국사회의 인권의식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를 보여준다. 혐의자인 '룰라'의 전 멤버 고영욱만이 아니다.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영장을 기각한 검찰의 안일함에서, 가해자 편을 드는 법체계, 이 중대한 사건을 흥미위주로 보도해 온 한국 언론 모두가 그렇다.

지금까지 밝혀진 대개의 사실은 이렇다. 혐의자가 18세 미성년자에게 연예계에 줄을 놔 주겠다고 접근해 술을 먹인 후 성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피고인은 자신이 '공론화된 것만큼 부도덕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으나, 미성년자를 상대로 성행위를 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고 있다.

놀라운 것은, 앞의 혐의가 모두 사실로 드러나도 피고인이 처벌을 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피해자가 미성년자라 하더라도 13세 이상이고, '합의에 의한 성관계'면 처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13세 미만이어도 피고인이 '몰랐다'고 주장하고, 그 반대사실이 입증되지 않으면 처벌할 수 없다.

지난 달 12세 초등학생을 성폭행한 30대 남성의 재판이 열렸다. 피고인은 2009년 일어난 성폭행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당시 피해자의 키가 커 15~16살 정도로 보였고, 자신도 14살이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수원지법 제11형사부(재판장 이동훈)는 "피해자가 13세 미만의 미성년자임을 알았다고 입증할 증거가 없다"며 검찰의 공소를 기각했다.

결과적으로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로는 처벌할 수 없고, 오직 형법상 강간죄로만 처벌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가해자는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풀려난다. 강간은 본인의 고소가 있어야만 공소가 가능한 친고죄인데, 피해자와 부모는 합의 후 고소를 취소했기 때문이다.

미성년자와의 성행위는 모두 '강간'이다

현재 고영욱은 이후 2건의 다른 성폭행 혐의로 추가 기소된 상태다. 그리고 2010년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어 미성년자 상대 성범죄의 처벌이 상대적으로 엄격해졌다. 하지만 과거 판례대로라면, 피고인을 처벌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가 '미성년자임을 몰랐고, 강제성도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0년부터 2012년 사이에 미성년자와 장애아에 대한 성폭력 관련 형법이 강화된 건 사실이다. 예컨대 제 16조(피해자의 의사) 개정으로 아동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는 피해자의 고소가 없어도 공소를 제기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13세 미만 장애아에 대한 강간 및 준강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폐지되었다.

하지만 법률 강화가 처벌 강화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기존의 형법 305조로도 13세 미만 부녀의 간음을 합의 여부와 상관 없이 처벌할 수 있지만, 수원지법의 판결은 12세 여아를 강간하고도 처벌을 피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고영욱 사건처럼 피해자가 13세 이상인 경우는 해당하지 않는다. 이 경우 적용할 수 있는 법률은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7조 '폭행 또는 협박으로 아동·청소년을 강간한 사람은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는 조항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협박이나 위계 사실을 입증하지 못하면 처벌이 불가능하다.      

옳은 것일까? 미성년자를 상대로 성행위를 해도 '몰랐다'고 주장하고 '협박'이나 '위계' 사실이 입증되지 않는 한 처벌이 어려운 현실 말이다. 하다 못해 무단횡단을 하다 적발돼도 '몰랐다'는 주장으로 빠져나가기 어렵지 않은가. 딱지를 떼려는 경찰에게 '이 도로에 무단횡단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내가 사전인지했다는 증거를 대라'고 요구하는 사람을 보았는가.

한국의 검찰과 법원은 혐의자가 미성년자와 성행위를 한 게 명백한 상황에서도 '무죄냐 유죄냐'를 따진다. 하지만 한국 이외의 나라에서는 미성년자와의 성행위 자체를 엄벌하는 게 상식이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상대가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알았는지, 합의에 의한 관계인지 여부를 따지지 않는다. 미성년자와의 성행위는 무조건 '법정강간(statutory rape)'으로 처벌한다.

코네티컷, 앨라바마, 델라웨어 등에서는 13~16세(한국 나이 14~18세) 미성년자와의 성행위는 최고 20~30년 징역형을 받는다. 피해자의 나이가 더 어린 경우, 종신형에서 100년형까지도 선고한다. 가해자가 미성년자인 경우에 한해 예외조항을 두긴 하지만, 성인의 경우에는 엄벌을 피할 수 없다.

이럴 때면 항상 듣는 이야기가 있다. '나라에 따라 법체계와 적용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어떤 문화적 전통과 특수성이 미성년 대상 성범죄를 관대하게 다루게 만드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국제적 법상식이나 미국을 무조건 따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한국의 법체계와 집행 방식이 보편적 법상식에 어긋나 결과적으로 성범죄를 권하는 꼴이 되니, 획기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성년자와 '합의 성관계'?... 책임을 떠넘기지 마라

미성년자 성폭행 혐의를 받고 있는 방송인 고영욱이 15일 오후 서울 용산서에서 재수사를 받기위해 출석하고 있다.
 미성년자 성폭행 혐의를 받고 있는 방송인 고영욱이 15일 오후 서울 용산서에서 재수사를 받기위해 출석하고 있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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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욱 사건은 혐의자가 피해자 나이를 알았는지 여부와 성행위가 '합의'에 의한 것이었는지에 따라 판가름 날 것이다. '몰랐다'는 주장이 먹히는 상황이 왜 한심한지는 이미 설명했다. 나이도 모르는 사람과 성행위를 시도하는 게 책임감과 거리가 먼 행위라는 사실을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잘 모르거나 의심되면 하지 말아야 하고, 그러지 않을 때는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게 성인이다.

마찬가지로, 미성년자와의 성행위에 '합의' 여부를 따지는 것도 한심하다. '합의'란 성숙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미성년자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머리 모양 하나도 미성년자의 판단에 못 맡기는 사회가 성행위처럼 복잡하고 많은 위험요소가 따르는 행위의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사회는 권력관계의 장이다. 한국사회의 권력관계는 특히 더 불균등하다. 남녀관계를 보라. 도대체 어떤 나라에서 성폭행범이 '범죄 사실을 공개하겠다'면서 피해자를 협박할 수 있는가. 강도가 범행장면을 촬영한 후 '신고하면 비디오를 공개하겠다'고 말하는 꼴이다. 그리고 실제로 피해자가 죄인이 된다. 성범죄에 관한 한 한국이 그런 나라다.

이처럼 불평등한 남녀관계에 사회적 지위, 경제력, 나이(한국사회에 이만한 권력이 있는가) 차이가 개입하는 게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다. 관계 자체가 '강제성'을 띨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검찰과 법원은 미성년자들의 미숙한 판단과 그들을 둘러싼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오히려 '합의 여부'를 따지지 않고 상대가 미성년자라면 무조건 '강간'으로 규정하는 미국 주들의 형법이 합리적이다.

'증거 부족'을 이유로 고영욱에 대한 체포영장을 기각한 검찰의 태도는 납득하기 힘들다. 물론 영장은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는 경우에 한해 신중히 발부해야 한다. 고영욱이 도주의 우려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처럼 사후 합의가 절대적 영향력을 미치는 친고죄의 경우, 피의자는 자신의 지위, 재력, 물리력 등을 이용해 결사적으로 합의나 무마를 요구(혹은 강요)하게 된다. 잘못하면 증거인멸의 기회를 주는 셈인 동시에, 피해자 보호 의무를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성폭행 가해자' 편드는 이상한 한국의 법체계

한국의 청소년보호법 제28조 제1항에 따르면, 19세 미만 미성년자에게 술을 판매·대여·배포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 있다. 이를 위반하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이하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다. 여기서 '강매'나 '강권' 여부를 따지지는 않는다. 상대가 미성년자라면 '합의' 정도가 아니라 애걸을 해도 판매해서는 안 된다. 유해약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법이 이런데도, 미성년자에게 술을 먹여 성행위를 한 것에 대해서는 '강제성이 있었는지' 혹은 '얼마나 취했었는지'를 따진다. 그리고 증거를 찾지 못하면 혐의를 벗게 된다. 사실상 가해자 편을 드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주마다 법률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다음의 추세를 따르고 있다.

1) 16세 이하(한국 나이로 17~18세) 미성년자와 성행위를 하는 것은 합의 여부와 상관 없이 법정 강간이다.

2) 미성년자란 사실을 몰랐다는 사실로 면책될 수 없다.

3) 미성년자는 합의할 수 없다.

4) 성년이든 미성년이든, 술과 약물의 영향으로 합리적 판단이 어려운 상대는 합의할 수 없다.

5) 성년의 경우 성폭행 여부는 상대가 '저항했는가'가 아니라 '적극 동의했는가' 여부로 판단한다.

한국 법원과 달리, 미국 대다수의 주는 성폭행 구성 요소로 물리적 저항을 요구하지 않는다. 상대의 동의 없이 이루어지는 성행위는 모두 성폭행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한국은 '적극적 저항'이 없는 성행위는 일단 '합의에 의한 성관계'로 간주한다. 미국 법원은 피해자 시각에서, 한국 법원은 가해자 입장에서 상황을 파악하는 셈이다.

미국도 1970년대까지는 성폭행을 가리는 데 있어 피해자의 저항을 요구했었다. 물리적 저항이 없다면 합의에 의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현재에는 언어적 거부의사를 표명하는 순간 '동의부재(lack of consent)'가 성립한다고 본다. 상대가 직간접적으로 '하지 말라'고 말할 때 이를 무시하면 성폭행이 되는 것이다. 한국의 인권수준은 미국보다 40년 이상 뒤떨어진 셈이다.

피해자에게 '적극 저항'을 요구하는 것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다. 이건 위급한 상황에서 '정절과 목숨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교육과 홍보를 통해 성폭행은 피해자 책임이 아니라는 사실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이라고 가르친다. 때로는 물리적 저항이 효과적인 경우도 있고, 이것이 더 큰 위험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판단의 주체는 언제나 피해자여야 한다.

더불어 성범죄를 말할 때 '성관계'라는 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 상대의 동의 없이 행하는 성행위는 그냥 폭행일 뿐이다. 입술을 주먹으로 친다고 '입맞춤'이 되지는 않는다. '성상납'이라는 기괴한 언어도 쓰지 말아야 한다.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전제로 한 행위는 언제나 성폭행이거나 성폭행 교사다.

미성년자를 상대로 한 성행위는 말할 필요도 없다. 판단력이 무르익지 않은 미성년자에게 어떤 '합의'를 얻어내고 어떤 금전과 대가를 지불하든 마찬가지다. 허술한 법을 피한다고 당신의 죄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태그:#고영욱, #성폭행, #미성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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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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