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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기둥인 22살 맏아들이 재판도 없이 죽고, 6.25전쟁이 일어난 뒤 아버지는 인민위원장으로 고초를 당하셨다. 이어 둘째 아들이 인민의용군이 됐다가 부역자로 자수해 국군으로 전쟁에 참전해 중부상을 입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또한 6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아버지. 아버지의 한달 고문 뒷바라지에 무고로 석방되고 그 와중에 6살 막내딸을 잃었다. 친정 동생이 밤낮 보초를 서다가 경찰에게 총살을 당하고 제부는 전쟁 전후에 마을 좌우익 싸움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런 참적의 어머니 삶을 간단하게 사실을 기록한다.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 윤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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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전쟁의 6월이 오면 84년 참적(慘迹)의 삶을 사시고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지금까지 살아계셨다면 백세가 넘으셨을 것이다. 조선조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던 해, 풍산 홍씨 집안에서 태어나 윤씨 집안으로 당신 나이 17세에 출가했다.

아버지는 18세로 한학을 수학하고 농민이면서도 틈틈이 문맹자를 가르치는 마을 훈장이었다. 할머니는 17살에 출가 오셔서 혼례 후 3개월 만에 후사도 없이 청상과부가 되고 말았다. 할아버지가 병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자식도 없었지만 개가도 하지 않고 10년을 시집에서 효부로 지내시다 조카인 아버지를 양자로 삼아 단란한 일가를 이뤘다. 서당을 보내고 양육하여 18세에 장가를 보냈다. 그리고 아들과 딸, 8남매를 낳고 자손이 번성했다.

어머니는 딸만 넷인 맏딸로 아들을 바라던 친정의 염원이, 출가해 1년이 되면서 첫아들, 둘째아들, 첫딸, 둘째 딸, 그리고 셋째 아들, 넷째 아들을 연속하여 낳으면서 시가와 친정에서 자손번성의 큰 기쁨을 안긴 참한 며느리가 됐다.

어떤 일이든지 첫 번째가 중요하듯 첫아들을 낳을 즈음 조산원은 청상과부 시어머니가 금쪽같은 손자를 받아 앉았다. 당신은 비록 자식을 낳지 못할 처지였지만 마치 자신이 아기를 낳은 산고를 생각하며 손자손녀를 척척 받아 내셨다.

기쁨의 나날을 열심히 살아 길삼을 하고 농사를 지으며 자손을 늘려갔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애를 낳고 젖을 먹이면 다음에는 할머니가 애지중지 손자손녀를 양육하셨다. 세월은 큰 손자가 소학교를 나와 중학을 졸업해 청년이 되는 때로 흘러가고 있었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절약하며 돈을 모아 큰댁과 똑같은 대지 500평에다 집을 지었다. 평소에 큰집과 똑같이 사는 보람을 갖게 됐다. 이제는 머슴도 두고 송아지도 기르는 중농의 위치에 올랐다. 해마다 논밭을 사서 재산이 늘어난 것이었다.

그런데, 그만 일제치하 36년에서 해방을 맞이하면서 맏아들이 건국준비위원회 가입했다. 남북이 하나 되는 조국을 바라는 여운형 선생의 지도에 따랐다. 군청과 효지면에 근무하면서 조직을 만들었다. 그러나 건준을 좌익으로 몰아위기에 처했다.

1년 만에 건준에 가입한 인사들은 좌익으로 몰려 피해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여순사건이 일어나면서 그 지하조직으로 요시찰 인사가 되었다. 자수를 하여 보도연맹에 가입을 종용했지만 맏형은 고집을 꺾지 않고 면에도 출근하지 않았다.

집안은 맏아들로 인해 요시찰 대상이 됐다. 맏아들은 22세인데도 장가도 들지 않고 좋은 세상이 오면 그때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맏아들은 잘 생기고, 면에 다니며 집안도 좋은 여건이기에 혼처 자리가 많았으나 당사자가 피해 이뤄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청상과부이신 시어머니와 꿈인 손자를 간절하게 바랐으나 1949년 2월에 체포되어 경찰서에서 아들을 만났다. 조직을 불라는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아들은 조직을 불지 않아 결국 재판도 없이 경찰의 총 세발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집안 기둥을 잃은 슬픔은 어머니를 비롯한 온 식구들이 을씨년스런 세월을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1년을 넘어 잊을 만 했을 때에 한국 전쟁이 일어났다. 집을 찾아온 인민군관동무는 큰아들 죽음을 추모하며 아버지를 면 위원장에 임명했다.

"맡지 않으면 반동"이라는 그들의 언사에 아버지는 위원장이 되고 19살 둘째 아들은 인민의용군에 입대하고 초등생인 셋째 아들은 소년의용단에 가입했다. 그러나 인민군 주둔은 3개월도 되지 않아서 물러가고 있었다. 여기에 아버지와 아들도 피했다.

아버지는 무등산으로 입산하면 빨치산이 되는 것이고 아들은 인민군 따라 북으로 가야 했다. 그런데 군관장교는 "분단조국에 형이 희생되었는데 동생까지 희생은 안 된다"며 남에 남기를 권했다. 아버지는 처자식을 생각해서 산에 입산을 포기했다.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부역자가 되어 자수를 했다. 그리고 1.4 후퇴가 되면서 부역자수자를 모조리 잡아들여 즉결 처분을 당하고 있었다. 다섯 번이나 경찰의 체포에 피해 다니고 아들은 역으로 국군에 자원입대하는 결정을 하고 입대했다.

어머니는 큰 아들 잃은 것도 억울한데 이제는 남편과 작은 아들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했다. 자원입대한 아들은 중부전선에서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후방으로 후송된 아들을 면회했다. 중상의 상처를 치유하고 다행하게도 다시 전선이 아닌 상이 제대했다.

전쟁이 끝나고 휴전협정이 체결될 즈음, 어느 날 아버지는 경찰에 연행됐다. 어머니는 한 달 경찰 고문을 받고 있는 아버지의 죄명이 무고한 사람을 위원장의 지시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백방으로 아버지 석방을 노력했으나 안 됐다.

결국 무고하게 고발한 당사자가, 자신의 죄를 아버지에게 씌워 고초였으나 결국 그가 자백하여 아버지는 무고로 풀려났다. 이때 어머니는 큰 자식 때문에 갖는 고통을 그리고 남편이 무고하게 일제하의 그런 고문을 한 달이나 당해 슬프기만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유월 전쟁 이전에 큰아들 잃고, 전쟁으로 인해 친정의 동생이 경찰에 죽었다. 그리고 바로 밑에 제부가 전쟁와중에 종친들끼리 사상싸움이 되어 또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경찰에 쫒길 때 6살의 막내딸을 잃고 말았다.

어머니에게는 '참적의 슬픈 운명'이었다. 하마터면 남편도 몇 번이고 운명할 뻔 했지만 그 때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겨우 목숨을 유지했다. 그런 어머니의 고통을 바라보던 셋째인 필자는 1965년 2월, 가면 죽는다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정한수를 날마다 떠다놓고 무사귀환을 빌었단다. 몇 번의 실전 교전이 있었지만 그러나 13개월 만에 살아 귀국했다. 덩실 덩실 춤을 추신 할머니와 어머니께 효도를 한 샘이지만, 무려 한해를 넘게 걱정을 드린 점은 불효였다. 

어머니의 참적의 84세의 삶은 모두가 분단으로 인한 것이었다. 내 사랑하는 고향의 선산 종중 분묘에 함께 잠들고 계신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큰아들 막내딸 영혼의 한 가정을 이루고 계신다. 부디 평안히 영면하시기를 소자는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참적의 슬픔만이 아닌 조국의 수많은 동포들의 슬픔도 함께 달래려면 어서 빨리 분단에서 통일이 이뤄져야 한다. 물론 평화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한반도 전쟁이 아닌 진정한 평화통일만이 어머님의 영혼을 위로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나의 어머니' 공모 기사입니다.

파란만장한 어머니 일생에서 일제하에서부터 해방정국, 그리고 건준과 여순사건으로 맏아들 잃고 6.25로 말미암아 남편이 인민위원장 둘째 아들이 인민의용군에서 살기위해 국군이 되어 중부전선에서 부상을 당하고 남편은 무고죄로 한달을 일제하고문을 당하는 참적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생제부 막내 딸까지 잃은 슬픔의 생애를 살아온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태그:#분단조국 , #한반도 분단, #참적의 삶, #재판도 없이 죽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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