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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게이션을 따라 차를 몰고 가다가 애먼 곳에 도착한 일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것입니다.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모두 함께 어우러져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미래의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인생의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해야 합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한 인생 내비게이션은 우리를 애먼 곳으로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기자 말>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 포스터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 포스터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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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사이트에 새로 가입을 할 때면 이런저런 개인정보를 입력하게 되는데 솔직히 가장 난감한 부분이 직업란입니다. 예전에 회사를 다닐 적에는 직업란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회사원을 선택하면 됐는데,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게 된 이후로는 인터넷사이트 가입 시 직업란에 작가라는 항목을 찾게 됐습니다.
그런데 우째 이런! 선택 사항에 아예 없더군요. 그나마 작가와 가장 비슷한 것을 찾아 선택하려고 눈을 부릅뜨고 찾아보니 두 가지가 들어옵니다.

'전문직'과 '기타'.

전문직이라니! 왠지 있어 보이는 단어라 호감이 갑니다. 의사나 변호사처럼 돈도 잘 벌고 부러움의 대상인 직업을 일반적으로 '전문직'이라는 용어로 부르지 않습니까? 이참에 나도 슬쩍 전문직으로 묻어가볼까 하는 생각이 소심하게 떠오릅니다. 딴에는 글을 '전문적으로' 쓰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요.

하지만 내가 과연 '돈도 잘 벌고 부러움의 대상'인가, 라는 심리적 장벽에 결국 '기타'를 선택하고 맙니다. 소심함 때문인지 정직함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저는 잉여스럽게 느껴지는 '기타'를 선택하고는 왠지 모를 비애감에 젖어듭니다.

'쳇! 인세라도 팍팍 들어오면 주저 없이 전문직이라고 했을 텐데.'

'기타' 남편과 결혼한 마누라는 가끔 욕조가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혼잣말을 공간적으로 꽤 떨어져 있는 나의 고막을 울릴 만큼의 에너지를 담아 뱉어냅니다. 특히 백화점 목욕용품 매장에서 욕조에 넣으면 거품을 일으키는 야구공보다 조금 작은 동그란 비누 비슷한 것을 볼 때면, 어김없이 '욕조 있는 집'이라는 특정 파형의 음파가 마누라의 성대를 떠나 나의 고막으로 돌진합니다. 만날 백화점에서 아이쇼핑만 해야 하는 분노까지 담겨 있어 그런지 파형이 무척 날카롭습니다.

'기타' 남편의 장점 살려 '유럽식 정원'이 있는 호텔로

이런 과정이 반복되어 마누라의 인내심이 임계치에 다다르면 저는 '기타' 남편의 유일한 장점 중 하나인 넘쳐나는 시간을 적극 활용합니다. 때는 2011년 5월 2일 월요일, 다른 이들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할 시간에 우리 가족은 마누라가 결혼할 때 가져온 칼로스 승용차로 경기도 포천시의 A호텔로 향하고 있습니다. 아직 돌도 안 된 딸아이의 어린이날을 기념한다는 핑계로 '욕조가 있는 집'으로 가고 있는 것이죠.

그야말로 완전한 비수기에다가 평일의 숙박. 이런 조건 때문에 조식을 포함하고서도 10만원이 살짝 넘는 완전 착한 가격에 우리 가족은 5층짜리 76개의 방에 멋진 유럽식 정원을 보유한 A호텔을 그야말로 전세 냈습니다. 5월의 첫 월요일에 A호텔에 묵는 손님은 우리뿐이니까요. 혹시라도 묵었던 분이 있다면 죄송합니다만 적어도 저희는 한 명도 못 봤습니다.

313호에 여장을 풀고 곳곳을 차분하게 살펴보니, 이 욕조가 있는 1일 '집'은 가격 대비 성능이 정말 탁월합니다. 객실에서는 인터넷을 무료로 얼마든지 이용이 가능하고, 베란다에서는 호텔의 자랑인 유럽식 정원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이곳은 포천시에서 '아름다운 건축물'로 선정할 정도로 멋진 유럽식 정원 덕택에 문근영이 출연한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의 촬영장으로도 사용됐습니다. 덕분에 유명세를 타기도 했지요.

엘리베이터 옆 벽에는 <신데렐라 언니> 출연진의 사인이 걸려 있습니다. 그 중에는 'A호텔.. 번창하시길^^'이라고 적은 문근영의 사인도 있죠. 객실 침대는 깨끗하고 화장실에는 당연히 깔끔한 욕조가 있습니다. 이미 말했듯이 우리에게는 욕조가 중요하지요. 돌이 안 된 아이를 위한 작은 침대도 따로 갖추어져 있습니다. 곳곳에 있는 편의시설들은 그야말로 텅텅 비어 있습니다. 우리 가족은 모든 시설들을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마음껏 누렸습니다. 우리 외에는 투숙객이 없으니까요.

초록색 잔디로 뒤덮인 정원에는 성인 키 정도 폭의 길이 뺑 둘러 나 있는데 호텔 건물을 바라보고 오른편에는 호수가 있고 정원 곳곳에 갖가지 색의 꽃들이 노련한 정원사의 손길을 느낄 수 있게 가지런히 피어 있습니다. 사람의 눈, 코, 입 모양 장식물을 붙여 놓은 나무들은 정원의 분위기를 한층 유쾌하게 만들어 줍니다.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정원 한쪽에는 수영장 건물이 있는데 그 안에는 아이를 위한 실내놀이터가 있습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장난감은 많은데 아이는 한 명도 없는 그런 어색한 공간이었는데, 딸아이보다는 오히려 마누라가 더 즐거워합니다. 특히 마누라는 기모노를 입은 인형이 무척 맘에 들었는지 아이에게 쥐어주고 사진도 여러 번 찍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기모노 입은 인형의 머리가 좀 길어 일본 공포영화 <링>에 등장하는 우물 속에서 기어 나오는 귀신같은 느낌이 드는데 말입니다.

집 살 생각 없어요... 세계가 내 집인걸요

호텔 로비에는 흰색 영창 그랜드피아노가 놓여 있습니다. 집에서 사용하는 피아노는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그러니까 1983년 혹은 1984년에 산 영창 업라이트피아노입니다. 무척 오래 된데다 피아노줄이 하나 끊어져 있고 돈 아끼려고 조율을 잘 안 해서 옥타브를 짚으면 맥놀이가 심합니다. 그런 이유로 멀쩡한 피아노 소리에 대한 욕구불만이 있던 차에 흰색 그랜드피아노까지 만나니 도저히 치지 않고는 배겨낼 수가 없었습니다.

투숙객도 없으니 호텔 직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피아노 의자에 앉았습니다. 딸아이에게 들려주기 위해 로베르트 슈만의 피아노 소품 <어린이를 위한 앨범> Op.68 중 13번째 곡 <즐거운 5월, 벌써 그곳에(Mai, lieber Mai, Bald bist du wieder da!)>를 연주했습니다. 이 곡은 결혼식 때 참석한 하객을 위해 당시 신랑이었던 제가 연주한 곡이기도 합니다. 그래요. 결혼식도 5월이었군요.

'욕조 있는 집에 오길 정말 잘 했어!'

마누라가 313호실 욕조에 들어가 나올 줄을 모를 동안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가족이 현재 일 년 중 대부분을 보내고 있는 서울 금천구 독산동 산꼭대기 욕조 없는 빌라는 사실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전세를 내서 살고 있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2011년 5월 2일에 우리 가족이 지낸 욕조 있는 A호텔 역시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거주 기간의 차이가 있다곤 하더라도 둘 다 우리 것이 아니라면, 뒤집어서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욕조 없는 독산동 빌라도 타인 소유의 '우리 집'이듯이 경기도 포천시의 A호텔 역시 타인 소유의 '우리 집'이라고 말이죠.

이렇게 관점을 바꾸니 저에게는 가서 머물 수 있는 세상 모든 곳이 내 집이 됩니다. 몸 뉘어 쉴 수만 있다면 그곳이 바로 집인 거죠. 누가 소유하고 있느냐가 본질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대한민국 곳곳에, 더 나아가 세계 도처에 집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신혼여행 가서 묵었던 오버워터(overwater) 방갈로도 내 집이고, 체코 여행을 가서 묵었던 한인 민박집 역시 내 집이고, 20대 시절 사과박스를 깔고 잠을 잤던 어느 대학교의 강의실도 내 집인 것이죠.

이 사실을 깨닫게 되니 한적한 교외의 멋스러운 카페나 갤러리를 방문하면 이제는 그곳에서 일하는 분들이 제 별장의 집사처럼 느껴집니다. 직원을 보면서 '아무개 집사, 별장 관리를 잘 하고 있구먼. 특히 청소 상태가 아주 양호해' 하고 마음속으로 칭찬을 해줍니다. 물론 서로 간에 불편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삼가기 위해 직접 소리 내서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들도 특별한 말이 없이 응당 저를 주인으로서 아주 깍듯하게 대우합니다.

더욱 고마운 것은 전기세, 수도세, 가스비 등 관리비 일체를 알아서 조달하면서 언제든 저를 맞이할 수 있도록 관리하고 있다는 겁니다. 만약 제가 소유하고 있었다면 그 비용들을 제가 직접 지불해야 했을 텐데 말이죠. 완전 손 안대고 코 풀기죠? 그래서 저는 당분간 집을 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세계가 내 집인걸요.


태그:#문근영, #신데렐라 언니, #아도니스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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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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