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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마이뉴스>와 참여연대, 생활정치실천의원모임이 함께 '나는 세입자다' 기사 공모를 실시합니다. 가슴 아픈 혹은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사를 기다립니다. 세입자와 관련된 사례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반지하나 옥탑방 이야기도 좋고 해외에서 경험한 사례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원룸촌. 건물이 옹기종기 붙어있어 꼭대기층이 아니면 햇볕이 들지 않는다. 이렇게 방이 많지만 '내 방'을 얻기는 힘들다.
▲ 서울 흑석동 원룸촌 일대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원룸촌. 건물이 옹기종기 붙어있어 꼭대기층이 아니면 햇볕이 들지 않는다. 이렇게 방이 많지만 '내 방'을 얻기는 힘들다.
ⓒ 박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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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이사를 했다. 한 달 넘게 친구방 한 켠에 쌓여있던 내 옷과 책들이 드디어 제자릴 찾아간다. 밥, 빨래, 설거지, 화장실 청소까지 하며 눈치 보던 신세를 벗어난다니, 시원하다.

얹혀 산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겉으로는 당당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미안하고, 점점 소심해진다. 머리 감을 때 보일러 켜는 것조차 여러 번 고민할 정도로. 그래서 이 찬바람 부는 가을에도 나는 찬물로 머리 감았고, 시키지 않아도 빨래와 방 정리를 했다. 생각 같아서는 "월세 반 공과금 반 내고 같이 살자"고 말하고 싶지만, 주머니 사정은 늘 사람을 조용하게 만든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인 8월 갑작스럽게 내가 서울 길바닥에 나앉기로 결정한 것은 LH전세임대주택 덕분이었다. 올해 초 신청했는데 8월 중순에 "추가 선정 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놓칠 수 없는 기회였지만, 지난 2월에 1년 계약한 자취방이 걸림돌이었다. 과감히 이사할 방도 찾아놓지 않고 1년 계약한 자취방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했다. 방학이 지나면 자취방 수요가 급감하기 때문이다.

과감한 결정 덕에 내 짐들은 나와 함께 염치없이 친구방으로 들어갔다. 처음 예상은 일주일이었는데 생각만큼 LH전세임대주택을 구하고, 계약한 뒤, 잔금 처리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국 한 달 넘도록 친구에게 신세를 졌다.

LH전세임대주택은 LH에서 시행하는 대학생 주거안정정책이다. 간단히 말하면 학생이 전세로 계약할 집을 LH가 대신 계약하고, 학생에게 보증금과 월세를 받는 제도이다. 학생이 LH에 내야 하는 보증금(저소득층 학생은 100만 원, 일반가구 학생은 200만 원)과 월세가(최대 17만 원) 서울에서 직접 방을 구하는 것보단 매우 싸다. 이와 함께 전세임대주택의 가장 큰 매력은 전세 계약이 2년 이라는 점이다.

나는 대학을 다니기 위해 매년, 매학기 '메뚜기족'이 되어야 했다. 시험기간에 도서관 자리를 맡지 못한 학생들이 빈자리를 돌아다니며 공부하는 '메뚜기족'이 되듯, 나는 서울에서 내 한 몸 뉘일 곳을 찾아 4년간 9번 이사를 했다. 

집 근처 학교를 다니는 대학생들은 모르겠지만 집에서 먼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에게 '방'은 가장 큰 스트레스다. 기숙사는 제약이 많고, 친척집과 고시원은 불편하며, 원룸은 비싸기 때문이다. 방을 못 구하면 학교도 다닐 수 없다.

2009년 제천학사로... 저렴했지만 제약이 많았다

대학에 입학하고 내 첫 이사지는 2009년 2월에 이뤄졌다. 그때 대학에 다니기 위해 '제천학사'에 입사했다. 제천학사는 충북 제천에서 수도권으로 대학을 온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지어진 기숙사다. 강원도, 제주도, 충청북도, 전라남도, 경기도 등도 비슷한 학사를 운영하고 있다. 일명 '학사' '학숙'으로 불리는 이 지역기숙사는 대부분 지자체에서 운영비를 부담하기 때문에 매우 저렴하다. 그런 이유로 입사 경쟁률이 높다. 지금은 비용이 조금 올라갔겠지만, 2009년 제천학사는 아침과 저녁을 제공하면서 한 달 월15만 원을 받았다.

물론 문제가 없진 않았다. 제천학사가 위치한 곳은 성북구 안암동이고, 내가 다니는 학교는 동작구 흑석동에 있다. 대중교통으로 최단시간 50분, 최장 2시간 정도 걸린다. 1교시 수업에 지각하지 않으려면 오전 6시에 일어나 7시에 지하철을 타야했고, 아무리 중요한 동아리 행사가 진행중이어도 밤 12시 통금에 맞추기 위해 10시면 학사로 향해야 했다.

처음엔 '이런 제약 쯤이야' 했지만 학교를 다니다보니 점점 힘들었다. 수업 조별 프로젝트 발표 준비를 하다보면 종종 밤 11시가 넘었고, 대학 학보사 활동을 하다보니 예기치 않은 일도 발생했다. 밤 12시 통금에 맞춰 들어갈 수 없는 날에는 미리 외박 신청을 하고, 학교 휴게실이나 친구방에서 신세를 졌다. 미리 외박 신청을 못해 쌓인 벌점에 퇴사 직전까지 놓여 가슴을 쓸기도 하고, 일주일에 5일을 학교 휴게실에서 자면서 '방이 있는데 왜 나는 못 갈까'하며 서러웠던 적도 있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기숙사 수용 인원이 100명 밖에 안 되다보니 매해 새로 신청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이전 입사생에게 가산점을 주지 않는다. 그나마 학기 단위로 신청을 받는 학교 기숙사보다 나았지만, 새로 입사신청서를 내고 선발자 발표가 날 때까지 살얼음 위를 걷는 듯했다.

이사 하려고 문 앞에 빼놓은 내 짐. 이 많은 짐과 함께 나는 약 1개월 동안 친구에게 '짐'이었다.
 이사 하려고 문 앞에 빼놓은 내 짐. 이 많은 짐과 함께 나는 약 1개월 동안 친구에게 '짐'이었다.
ⓒ 박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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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2010년에도 제천학사에서 살아도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통금은 여전했고, 정신없는 대학생활도 이어졌다. 바쁜 학교생활 탓에 한 달의 절반만 학사에서 자고, 학사에서 자더라도 오전 6시에 등교해 밤 12시에 하교하는 일이 빈번해 눈물을 머금고 학사를 떠나기로 했다. 딱 한 학기만 학교 앞에서 살기로 한 것이다.

기숙사를 신청했지만 떨어지고 어렵게 네 달 동안 살 수 있는 방을 구했다. 부엌과 화장실을 공용으로 쓰고, 학교에서도 먼 방이었다. 보증금이 적기도 했지만 네 달 계약을 받아주는 방은 이곳 밖에 없었다. 제천학사에 살 땐 통학시간만 줄어도 좋을 듯했다. 늦게라도 집에 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살아보니 불편함은 여전했다.

부엌과 화장실을 공용으로 쓰는 집이어서 청소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부엌에서는 늘 오묘한 양념 썩은 냄새가 났고, 화장실은 수시로 막혔다. 4개월 동안 이 불편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그해 9월 추석 때, 강남역이 잠길 정도로 큰 물난리가 났다. 내 방은 마당 문을 열고 다섯 계단 내려오는 1층에 있었다. 결국 방바닥에 놓인 책들은 사망선고를 받았다. 10월엔 방바닥에서 물이 계속 세어 나와 방을 옮겼고, 11월엔 1층 보일러가 멈췄다. 결국 한겨울에 샤워를 하기 위해 남자들만 사는 2층으로 들락거려야 했다. 12월엔 집주인의 실수로 화장실 옆방에 남학생이 들어왔다. 방음도 제대로 안 되는 집이어서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거나, 씻을 때 이만저만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4개월간 자취를 하며 별일을 다 겪은 뒤 겨울방학엔 과감히 제천 고향집으로 내려왔다. 방세를 내며 서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보다 방세를 안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안 벌고, 안 쓰자'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영어학원을 다니거나 자격증 공부하기에는 제천은 그리 좋지 않았다.

게다가 다음 학기는 어디서 지내야 할지도 고민이었다. 학교 기숙사, 제천학사, 충북학사, 농어촌 학생을 위해 만들어진 농협장학관, SH공사의 유스하우징. 2011년 1월, 나는 3학년 1학기를 다니기 위해 기숙사 다섯 곳에 신청서를 냈다. 학교 앞 자취방보다 싸다면 무조건 신청하는 게 내 방식이었다.

꿩 먹고 알 먹는 일?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신이 나를 버리진 않았는지 제천학사에 추가로 합격했다. 하지만 문제는 늘 엉뚱한 곳에서 생긴다.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았더니 학기 중에 용돈이 많이 부족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려니 수업시간이나 통금시간, 등하교 거리 때문에 쉽지 않았다. 때마침 언니가 실직해 기숙사비 외에 용돈을 요구할 상황도 아니었다.

그때 학교 커뮤니티에 '고시원 총무'를 뽑는다는 글이 올라왔다. '사무실에 앉아만 있으면 되고, 공짜로 방을 준다. 공부하면서도 일할 수 있는 환경.' 학교 앞에서 잘 수도 있고, 돈도 벌 수 있는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순진했다. 공짜로 잘 수 있었지만 오후 10시 이후 잠자는 시간에도 고시원생이 전화하면 일을 해결해야 했다. 형광등을 갈아주거나, 더러운 부엌을 청소하거나, 깜빡하고 화장실 갈 때 문을 잠그고 나온 방문을 열어주거나….

오후 5시부터 사무실을 지켜야 하니 조별 모임에 폐를 끼치기 일쑤였고, 주말에도 쉴 수 없었다. 더군나 일요일엔 하루종일 사무실을 지켜야 했고, 사무실에 있을 때도 고시원 방을 보여주느라 공부할 시간은 없었다. 자연히 친구들과 멀어졌다. 만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네 집에 얹혀 살기 전 내 자취방. 두 평이었는데, 없는 게 없었다.
 친구네 집에 얹혀 살기 전 내 자취방. 두 평이었는데, 없는 게 없었다.
ⓒ 박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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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창문이 없어 빛이 들지 않고, 환기도 되지 않아 건강도 나빠졌다. 시험기간이라고 일을 쉴 수 없으니 시험기간 내내 밤을 새야 했다. 급기야는 방에서 공부하다 졸았는데 날이 밝은지 몰라 시험시간이 끝난 뒤 깨는 일까지 벌어졌다. 결국 중간고사 끝난 뒤 일을 그만두었다. 이번엔 경기도 안양에 사는 이모네 집으로 방을 옮겼다.

이모네 집→자취방→친구네 방→자취방

내 인생 주거사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한 해를 고르라면 올해가 아닌가 싶다. 이모네 집에서 두 평짜리 자취방으로, 그리고 다시 친구네 방에서 전세방으로 네 번이나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이모네 집은 가정집이기 빨래나 청소 걱정도 없고, 햇볕도 잘들어 살기 좋았다. 하지만 친척 어른과 함께 사니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잘해 주시는 것도 부담이고, 잘해 드리기 어려운 것도 부담이었다.

결국 3년간 모은 돈과 고시원 총무 아르바이트 하며 방세 아낀 돈을 보태 두 평짜리 방을 구했다. 겨울방학 한 달을 꼬박 바쳐 구한 방이라 그런지 참 알찼다. 두 평이었지만, 부엌도, 화장실은 물론이고 심지어 세탁기와 에어컨도 있었다.

그럼에도 전세임대주택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옮긴 건 '더 좋은 곳'에 살고 싶은 인간의 본능 때문이다. 더 싸고, 햇볕이 잘들고, 바람이 잘 통하며 더 오래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집을 향한 욕망 말이다.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나는 이 '주거 분투' 속에서 적어도 2년은 '벌었다.' 2년간은 햇볕도 보고, 환기도 되는 집에서 이사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그래서 이사하는 날 비가 온다는 예보를 봐도 행복했다. 물론 계약이 끝나는 2년 후에는 또 걱정을 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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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나는 세입자다 응모글입니다.



태그:#대학생 주거, #흑석동 원룸촌, #고시원, #지역 학사, #친척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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