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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마이뉴스>와 참여연대, 생활정치실천의원모임이 함께 '나는 세입자다' 기사 공모를 실시합니다. 가슴 아픈 혹은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사를 기다립니다. 세입자와 관련된 사례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반지하나 옥탑방 이야기도 좋고 해외에서 경험한 사례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지하세계 같이 어두컴컴한 집, 낮에도 형광등을 켜고 생활해야 하는 집, 7~8계단은 내려가야 방이 나오는 집. 이런 집이 내가 1989년부터 3년동안 살던 셋집이었다.

요즘은 반지하라 해도 깊이가 심하진 않은 편이다. 그러나 1980년대엔 방으론 들일 수 없는 공간을 차고나 창고 등으로 준공승인을 받았다가 방으로 개조해서 세를 놓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살았던 곳은 말이 반지하지 완전 지하세계였다. 덕분에 전세는 그 당시 시세에 비해서 조금 싼 편이었다. 지금도 셋집을 면하진 못했지만 반지하에 살았던 기억은 잊을 수가 없다.

남편은 감옥에, 어린아이 데리고 간신히 구한 반지하방

지방에서 근무하다가 추석을 앞두고 서울로 발령이 났다. 생활의 근거지가 서울이고 남편이 서울에 있었던 탓에 지방 발령 3년 만에 서울로 귀환하게 되었다. 하필이면 남편은 사회과학 출판사를 하고 있었는데 1989년 여름에 보안법으로 감옥에 가 있고 일복 많은 나는 갓난애 데리고 방구하랴 돈구하랴 정신이 없었다. 아이까지 데리고 넉넉치 못한 살림에 집구하기도 어려웠거니와 돈도 부족했다. 시댁에서는 한푼도 보태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고, 친정집에서 빌린 돈과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긁어모아 간신히 집을 구했다.

추석연휴라 집구하는 일도 쉽지가 않았다. 퇴근후 어두워져서까지 발품을 팔았다. 돈은 부족하고 식구는 많고. 아이가 어리니 직장근처에 구해야 하고. 다행히 직장 근처로 구했다. 반지하였다. 방은 넓었다. 아니 방만 넓었다. 우리 3식구와 친정 부모님이 아이를 봐주시느라 5식구가 살아야 했다. 대문은 주인과 따로 썼지만 방 2칸에 부엌은 없었다. 대문 열고 들어와 예닐곱 계단을 내려서면 부엌문? 아니 현관문이다.

신발 벗고 들어가는 곳이 현관겸 주방이었다. 200L 짜리 냉장고를 간신히 들여놓고 세탁기 하나 들여놓고 싱크대 하나 들여놓으니 끝이었다. 손님이 많으면 신발도 문밖에 내놓아야 할 판이었다. 우선은 아쉬운대로 집을 구해서 이사를 하고 정리가 어느 정도 되자, 남편도 출소해서 3년의 주말부부 끝에 처음으로 한지붕 아래 가족이 모이게 되었다. 사주를 보진 않았지만 남편은 팔자가 좋은 모양이었다. 힘들 때는 국가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피서까지 시켜주는 곳에 있다가, 이사 끝나고 짐정리 끝나고 안정되자 가족품으로 돌아오니 말이다.

그때는 젊기도 했고 집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지금도 내집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긴 매한가지지만. 어디든 몸 눕히고 살면 내집이라고 참 편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던 터였다. 무던한 성격이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집보러 다니고 이삿짐 끌고 이사다니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인지라 웬만하면, 주인이 집비워달란 소리 안하면 한 집에 오래사는 스타일이었다.

9월에 그 집으로 들어갔는데 겨울은 생각보다 따뜻하게 지냈다. 방이 큰 거(14자 짜리 정사각형에 가까운)에 비하면. 겨울을 넘기고 여름이 되었다. 그런데 워낙 깊은 지하인지라 비가 오면 창문을 열 수가 없었다. 창틀의 높이와 마당이 같았다. 창문위에 가림막 같은 것도 없어서 문을 열면 바로 비가 들이쳤다. 아이는 그때 3살이었다. 비오는 날 습하고 끈적거리는데 창문을 열 수 없는 그 답답함이란…

높은 계단 턱은 연로하신 노부모와 아이의 행동에 장애가 되었다. 방에서 밖으로 나가는 연결 계단 턱이 젊은 사람한테도 버거운 편이었다. 3살짜리 딸아이와 80을 바라보는 친정부모님한테는 더욱 높은 편이었다. 화장실도 대문간에 딸려있어서 화장실 갈 때마다 오르내리는 부모님한테 죄송하기 그지없었다. 결혼한 후에도 독립을 못하고 불편한 집에서 아이마저 맡기며 동거한다는 것이 내내 걸렸다.

밤중에 화장실가는 것은 곤욕이었다. 추운 한겨울이거나 비오는 여름날엔 특히나 그랬다. 혹시 어둡고 턱높은 계단에서 넘어지시기라도 할까봐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에게도 두려운 대상이긴 마찬가지였다.

비오는 날엔 개비린내까지 풍겨... 잊을 수 없는 시절

이 집에 사는 동안 비가 안 올 땐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그런데 비오는 날은 가관이었다. 특히 장마철엔 대책이 없었다. 비를 각오하고 창문을 조금 열어놓았다. 빗물이 창틀에 부딪치면서 들어오는 것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것은 따로 있었다. 주인집에서 개를 키우는데 빗물과 개오줌이 섞인 개비린내는 정말 참기 힘든 것이었다. 비위약한 나는 주인한테 뭐라 하지도 못했다. 왜 그땐 그런 걸 말도 못했는지…

아이의 연한 피부엔 땀띠가 나 물르고, 아이는 보채고 집엔 대가족이 북적이고 몸은 힘들고, 개비린내는 코를 뜰 수 없게 만들고… 게다가 친정 오빠네가 돈암동 재개발로 몇 달 동안 3식구 갈 데가 없다고 들어오면 안되냐고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남편과 의논을 한 끝에 들어와 살라고 했다. 8식구가 방 2칸에서 복닥이게 된 것이다. 그 해 여름은 정말 잊을 수가 없다.

비는 오지, 덥기는 하지, 한 집에 8식구가 복닥이지, 선풍기로도 더위와 습한 기운은 날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살았는지 모를 정도였다. 벽 한 쪽에 쌓아둔 책에 곰팡이가 피었다. 비싼돈 주고 사놓은 '문화재 도록'이 서로 달라붙어서 떨어지지도 않고 습기를 머금어 원래 두께보다 훨씬 불어서 배가 불룩해졌다.

그리고 반지하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듯했다. 어디가 특별히 아픈 것도 아니었건만어떤 기운에 눌리는 것이었을까? 아님 햇빛을 못 받아서일까? 직장 갔다오면 라면가닥 퍼지듯 몸이 무거웠다. 솜먹은 물처럼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었다. 아이는 어려서 손도 많이 가는데 간신히 뒷바라지하고 직장다니는 것도 힘에 버거웠다. 그 와중에 둘째까지 임신했다. 걱정이었다. 안 낳을 수도 없고, 아이 둘 아니 조카까지 셋이었다. 9명의 식구가 어떻게 살았는지. 물론 오빠네는 6개월 후에 집을 구해서 이사를 갔고 우린 그 집에서 3년을 살고 나왔다.

성격도 바뀌는지 그 집에 사는 3년동안 남편하고 무던히도 싸웠다. 우울하고 짜증나고. 그 이후 결심한 것이 하나 있다. 다시는 반지하에 살지 않겠다고! 배부른 소리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군 살고 싶어 사냐고. 그래도 난 반지하에 살거냐 멀더라도 지상에서 살거냐 묻는다면 당연히 출근거리가 멀어지더라도, 방이 좁아지더라도 지상에 살 것이라 다짐했다.

아직도 셋방살이를 면하지 못하고는 있지만 다행히 지금은 낮에 형광등 안 켜도 되는 집, 햇빛 잘 비치는 집에 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나는 세입자다> 에 응모합니다.



태그:#반지하셋방, #전세, #세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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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으며 오늘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을 추구하고 무디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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