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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이 코 앞이다. 총선이든 대선이든 투표 시기가 다가오면 생각나는 만화가 있다. 바로 [드래곤볼]. 투표하는 것과 [드래곤볼]이 대체 무슨 상관이겠냐고 물을지도 모르겠으나 전혀 관계가 없는 건 아니다. 대선 후보들을 [드래곤볼] 속 캐릭터에 빚 댄 패러디물이 제법 많이 나오지 않았나.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드래곤볼]의 특정 장면이다. 거기엔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냉소적인 말투로 죄다 그 놈이 그 놈이며 거기서 거기라고 말할 때 보여주고 싶은 예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샤이어인들과의 전투 중에 죽은 친구들을 되살리기 위해 나메크 행성으로 날아간 크리링과 손오반은 극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우주 최강의 악당 프리더와 맞닥뜨리게 된다. 크리링은 지구인 중에선 최강의 전사이지만 우주적인 싸움꾼들과는 레벨의 차이가 있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긴 하나 손오반은 아직 어리다.

주인공 손오공은 기뉴 특전단과의 전투 중에 입은 부상을 치료 중이라 이들을 도울 수가 없다. 친구들을 구하기 전에 자신들이 먼저 죽을지도 모를 상황에 처한 크리링과 손오반의 곁에는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적이었던 베지터가 있다. 베지터는 지구를 침공해서 친구들을 죽게 만든 또 다른 악당이다. 그러나 그 역시 프리더에게 감정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베지터의 고향별을 침공해서 파괴하고 동족들을 노예처럼 부린 프리더는 그에게도 악당이며 약탈자이고 독재자이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 했던가. 최강의 악당을 마주한 위기의 순간에 베지터가 크리링에게 의외의 제안을 한다. 나메크 행성의 드래곤볼을 통해 용신을 불러 자신을 불사신으로 만들어주면 프리더와 맞서 싸워주겠다. 너희들은 헤치지 않겠다. 약속하마. 크리링은 기가 막힌다. 친구들을 살리기 위해 떠난 우주 여행길에서, 자신의 친구들을 죽게 만든 그 악당의 소원을 들어줘야 하다니. 크리링의 입장에선 프리더나 베지터나 둘 다 악당이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놈이 그 놈이며 거기서 거기라 할 수 있겠다. 위기의 순간에 받아 든 선택지가 이 정도로 고약하다면 자포자기 할 법도 하건만 크리링은 그러지 않는다. 냉소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둘 다 악당이라면 개중 나은 놈을 골라야겠다는 심산으로 베지터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결심한다.

왜? 어쨌든 선택의 갈림길에 놓인 상황에서 살길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서 거기이며 그 놈이 그 놈이라 할지라도 손톱만큼이라도 나은 자가 있기 마련이다. 조금이라도 말이 통하고 도움이 될 자가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개중 나은 자, 조금이라도 내게 도움이 될 자를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만화 [드래곤볼]에서 크리링이 한 것은 바로 그런 선택이었다. 만약 크리링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그거야말로 최악의 상황일 것이다. 베지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고도 다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허나 이것은 은유적인 예시이다. 어떤 갈림길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택의 폭이 생각만큼 그리 넓지만은 않다.

그렇다면 주인공이자 최강의 영웅인 손오공을 기다리면 되지 않았을까? 헌데 부상은 둘째 치고 사실 손오공도 생각만큼 그리 이상적인 영웅은 되지 못한다. 나중에 이어지는 셀이나 마인 부우와의 싸움에서 알게 되지만 손오공은 일종의 전쟁광이다. 그는 강한 적과 싸우는 쾌감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을 방조하기도 한다.

이건 심각한 문제이다. 선택의 폭은 좁다. 난세를 평정할, 이상적인 영웅은 아직 오지 않았거나 출격할 상황이 못 된다. 그런데 그 영웅도 완벽한 것은 아니며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도 있다. 어떤가? 어딘지 모르게 우리의 정치 현실을 환기시키는 에피소드 같지 않나? 주어진 선택지는 다 거기서 거기 같고 속 편하게 우리의 안위를 맡길 인물의 등장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설령 그런 인물이 등장한다 해도 문제점은 변함 없이 존재할 것이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그 놈이 그 놈이란 말이 나온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정치에 대해 갖는 자포자기한 심정과 냉소의 실체일지도 모르겠다. 분명 어느 한 사람이 현실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우리들에게 행복한 미래를 열어줄 것이란 믿음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차피 그 놈이 그 놈이니 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며 나자빠지는 것은 구태다. 물론 신기루에 의존할 순 없다. 그것은 결국 사람을 좌절시킬 뿐이다. 하지만 뒷짐만 지고 선 채로 구태에 빠져 있다면 그거야말로 진짜 절망적이다. 손톱만큼의 발전도 기대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서 있는 지금 이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탤 수 있는 것이 아주 작은 힘이고 그로 인해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아주 작은 변화일지라도 최소한 구태에 머무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나. 안철수 전 후보가 출마 선언 때 인용했던 격언처럼 미래는 이미 와있고 단지 널리 퍼져있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아직 퍼져있지 않은 그 미래와 조우하기 위해 우리는 무수히 많은 현실을 겪어내야만 한다. 또 현실을 딛고 한발자국씩 나가기 위해 선택을 해야만 한다. 악당과 더 나쁜 악당 사이에서 고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드래곤볼]의 크리링과 달리 우리는 100% 만족스럽진 않더라도 그 보단 훨씬 나은 선택지를 받아 들지 않았던가.

그 선택으로 이루어질 변화의 폭은 아주 미세할지도 모르나 그것이 모이고 모이면 변화의 폭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물론 많은 시간이 소요될 테지만.  以小成大(이소성대) 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이룬다는 뜻이다. 민주주의란 결국 이소성대를 향해 나가는 길일 것이다.

다시 만화 [드래곤볼]로 돌아가보자. 프리더와 셀을 물리친 손오공은 이젠 선계까지 넘나드는 진짜 진짜 끝판왕 마인 부우와 최후의 결전을 펼치고 있다. 과거로부터 소환된 마인 부우가 이긴다면 변화도, 미래도 없다. 현재도 온전치 못하게 된다. 손오공은 최후의 필살기 원기옥을 준비한다. 헌데 몇몇 전사들만으론 해낼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도와줘야 한다.

손오공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기를 보내오고, 허풍쟁이 미스터 사탄의 목소리를 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또 기를 보내온다. 전사도 아니고 전투력도 형편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목소리와 에너지들이 모이고 또 모이자 마침내 최강의 악당마저 물리칠 거대한 힘이 형성된다. 그들은 사소하게나마 변화를 꾀하고 미래와 조우하기 위해 힘을 보탰다. 자 이젠 우리가 기를 보낼 차례다. 포기해선 안 된다. 냉소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변화를 위해, 또 현실을 딛고 이미 와 있는 미래와 조우하기 위해. 우리가 행할 수 있고 반드시 행해야 하는 선택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태그:#정치, #투표,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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