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문 규범은 그 전모를 알기가 힘들다. 규범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는 것과 그가 아는 것이 다를 때가 많다. 예를 들어 보자. 지금 나는 앞 문장에서 '다르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누군가에게는 여기에 '틀리다'를 쓰는 것도 크게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그가 알고 있는 1930년대의 국어사적(國語史的)인 지식에 따르면, 당시에는 '틀리다'와 '다르다'가 혼용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문 규범의 대표가 표준어다. 표준어는 정말 어렵다. 정확히 말하면 어렵다기보다 헷갈린다. 표준어를 가르는 기준은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 말'이다. '교양'의 기준을 명확하게 정하는 것은 누구일까. 표준어 사정은 주로 국어학자들이 한다. 이들은 그 어떤 한국학 연구자들보다 용어를 엄정하게 쓰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내 머리를 굴려봐도 '교양'이라는 말의 개념을 정의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 같다.
한때 '자장면'만 표준어가 되고 '짜장면'은 안 된 시절이 있었다. '택견'도 '태껸'에 밀려 표준어 목록에서 빠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 광범위한 쓰임새가 인정되어 2011년 8월 31일에 표준어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보면 도대체 표준어가 왜 우리를 이다지도 괴롭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그저 자신이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면 되는 일 아닌가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어떤 단어의 표준을 정하지 않게 되면 사뭇 심각한 일이 발생한다. 예를 보자.
이 항행(航行) 중에 하루는 일행이 평북 창성 땅인 압록강변 한 농촌에 들어가서 아침밥을 사서 먹는데 조선 사람의 밥상에는 떠날 수 없는 고추장이 밥상에 없었다. 일행 중의 한 사람이 고추장을 청하였으나 고추장이란 말을 몰라서 그것을 가지고 오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가지로 형용을 하였더니 마지막에는 "옳소, 댕가지장 말씀이오"하더니 고추장을 가지고 나온다. (40쪽)국어학자 이극로가 표준어 사정을 비롯하여 국어 연구에 매진한 생애 역정을 중심으로 쓴 <고투사십년(苦鬪四十年)>의 일부다. 이 글을 보고 고추장이 대수인가 하겠지만, 실상 표준어가 없으면 사회 전체적으로 엄청난 혼란이 생긴다. 법률의 제정이나 적용 등에서 단어를 제멋대로 쓰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판사들이 판결문을 쓸 때 단어를 제멋대로 쓰거나 하면, 사법부의 혼란을 넘어 나라 전체가 아수라장에 빠질 것이다.
맞춤법 통일안 또한 어문 규범의 대표격에 해당한다. 거칠게 말하면 맞춤법은 글쓰기에 적용되는 표준어 규정이다. 표준어는 말의 차원에 국한되는 것이다. 말은 소리로 옮겨지는 것이니, 그 소리가 공중에서 사라지고 말면 표준어를 썼니 안 썼니 하고 따지는 일이 별로 큰 의미가 없다. 사라지는 그 순간에 존재하는 말 덕분에 표준어 문제는 그다지 크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맞춤법은 다르다. 맞춤법은 소리를 담는 글자의 문제와 관련된다. 그 글자가 모인 글의 '품격'을 좌우하는 게 맞춤법이다. 그 글이 대외적으로 공개되는 공식적인 글이라면 이 '품격'의 문제가 더욱 크게 다가온다. 당신 글을 본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다. "이 따위 맞춤법으로 무슨 글을 쓴단 말인가?" 이런 말을 듣고 계속 용감하게 자신만의 어문 규범에 따라 글을 쓰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맞춤법 규범은 글쓰기를 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히 넘지 못할 벽이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고민들이 우스운 것일 수 있다. 그에게 표준어나 맞춤법과 같은 어문 규범은 시대착오적인 획일주의에 다름 아니다. 그는 다양성을 생명으로 여기는 시대에 규범에 따라 글을 쓰는 것은 스스로를 도태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여긴다. 그는 스스로 만들어낸 말과 표현에 자부심을 느낀다. 자, 우리는 이들 문제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원광대학교 최경봉 교수의 <한글 민주주의>는 '민권(民權)', '자주(自主)', '평화(平和)'라는 세 개의 열쇠어를 통해 이들 문제에 접근한다. '한글과 더불어 성장한 민주주의'(제1장), '한글로 지켜야 할 주체성의 한계'(제2장), '한글의 평화적 공존을 위한 모색'(제3장) 등은 그러한 접근의 구체적인 내용을 잘 보여준다.
맞춤법을 만든 시기(필자 주-한글맞춤법 통일안이 최초로 만들어진 1930년대 초반)의 전후 맥락을 보면 맞춤법 제정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는 무분별하게 쓰이던 한글을 통일성 있게 쓰기 위해 통일의 원칙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우리말 쓰기의 전범이 될 수 있는 국어사전을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사전에 수록할 말의 표기 원칙을 정하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맞춤법은 표기의 통일 원칙이었고, 이러한 통일 원칙을 만든 목적인 사전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이다. (85쪽)저자가, 맞춤법의 제정 과정과 목적에 관한 역사적 자료를 살핀 후 정리한 내용이다. 그런데 위의 내용에 따라 사전에 새로 단어를 올려야 할 경우에 문제가 생긴다. 그 단어가 두루 쓰이고 있는 말이긴 하지만 표기의 원칙에 맞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표기법 제정의 핵심 문제는 원칙이나 원리의 문제가 아니라 조정과 타협의 문제가 될 것으로 본다. 이렇게 되면 규범은 조정과 타협, 가령 복수 표준어의 인정과 같은 방침을 통해 제한적으로만 인정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전에 올라가는 표제어가 표기법의 근거가 될 것이다. 이는 획일적인 규범보다 일반 국민의 언어권을 중시하자는 입장이다. 저자가 제1장의 제목을 '민권'으로 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제2장의 제목에 있는 '주체성의 한계'는 '한글 민족주의'에 관한 저자의 핵심 시각을 담고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제2장의 머리글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언어 문제에 민족정신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 민족정신이 필요 이상으로 강조되는 사회는 국수주의적인 파시스트가 기생하기 쉬운 조건을 제공하며, 이는 언어 문제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민족정신이 가치 있을 때는 그 민족정신이 민주사회를 만드는 원동력이 될 때뿐이다. (95쪽)나는 수업 중에 국어 '순화어(純化語)'를 자주 소개하는 편이다. '홈페이지'를 순화한 '누리집이나 '블로그'를 순화한 '누리사랑방' 같은 것들은 아이들에게 호응이 좋은 편이다. 이때 나는 이들 단어를 '순화어'라고 부른다. '순화어'란 '순수하게 만든 단어'라는 뜻이다. '순수하게'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말을 쓸 때마다 배타적인 언어 순혈주의가 나(우리)의 의도와 무관하게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한글은 세계적으로 우수한 문자로 평가된다. 이때에는 거의 상투적으로 한글의 과학성과 체계성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하지만 이들 과학성이나 체계성을 제대로 아는 이는 거의 없다. 그저 남들이 말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여길 뿐이다. 그러고는 성급하게 한글을 제외한 다른 민족(국가)의 문자를 열등한 것으로 폄훼한다. 한글이 유일무이한 세계 최고의 문자 지위에 등극하곤 하는 이유다.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강박적 찬양은 "한글을 세계의 문자로, 한국어를 세계 공통어로"라는 무모한 주장과 "한국어를 세계 공통어로 쓰면 좋겠다는 토론이 있었다"라는 근거 없는 보도를 낳았다. 이를 통해 언어와 문자에 대한 비이성적 찬양의 귀결점은 나르시시즘이거나 제국주의적 탐욕이라는 점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222쪽)저자의 말마따나 언어의 문제는 언어의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 하지만 다만 그것뿐일까. 저자는 '한자를 쓰면 안 된다, 한글만 써야 한다, 외래어는 고유어로 바꿔야 한다, 한글 표기는 이렇게 해야 한다, 자랑스러운 한글을 세계에 수출하자….' 등의 논쟁들 속에 한글과 관련한 역사적 경험과 상처가 깔려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과 상처는 언어 문제를 언어의 문제가 아닌 '정신'과 '가치관'의 문제로 바꾸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언어 문제의 해결은 기본적으로 언어의 본질에 대한 탐색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언어 문제는 언어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정신'과 '가치관'의 문제이기도 하다. 언어가 우리의 정신과 가치관의 대부분을 담는 그릇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정신과 가치관을 가질 것인가. 그것은 곧 우리가 언어를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당신이 이 문제를 성찰하고 해결할 때 <한글 민주주의>가 멋진 길잡이 노릇을 하리라 확신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