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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고용노동자는 노동계 추산으로 약 250만명(정부 기준 2010년 현재 115만명)에 이르지만, 개인사업자로 분류돼 '유령 노동자'로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노동관계법의 근로자가 아니기 때문에 노동3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4대보험에도 원칙적으로 가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2013년 1월 국민권익위원회와 2007년 국가인권위원회는 특수고용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 위한 관련법을 제정토록 고용노동부에 권고했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는 상황입니다. 한편 노동계는 근로기준법의 노동자 개념을 특수고용노동자에게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250만명이 넘는 특수고용자들의 생생한 일상을 통해 그들의 노동자로서 삶을 들여다보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특수고용노동자들의 글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너 내 남편이랑 바람 피웠지?!"

휴대폰 너머로 여성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렸다. 텔레마케터로 일하면서 현희숙(58)씨가 가장 당황스러웠던 순간이었다. 고객에게 개인 연락처를 알려준 것이 화근이었다. 남편의 휴대폰에 저장된 낯선 여자이름을 보고, 부인이 한밤중에 전화를 건 것이다.

콜센터 번호는 담당상담원과 바로 연락이 안 돼 짜증나니, 직통 번호를 알려달라는 고객의 요청에 따른 일이었다. 현씨는 전화한 부인의 남편이 보험에 가입했고, 담당자와 바로 통화하길 원해 연락처를 알려줬다고 해명했지만 상대는 믿지 않았다. 오히려 거침없이 욕을 퍼붓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중에도 사과는 받지 못했다. 현씨가 말했다.

"우리 일에 욕은 거의 기본이에요. 누가 잘못했느냐는 상관도 없죠. 텔레마케터들에게 '내 정보를 어떻게 알았느냐', '무조건 당신 잘못이다'라고 소리치면서 화풀이 하는 거예요. '내가 누군 줄 아냐'면서, 경찰에 고발하겠다고 협박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죠."

텔레마케터는 전화로 고객에게 상품을 홍보하거나 판매하는 직업이다. 흔히 인바운드와 아웃바운드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인바운드는 홈쇼핑 ARS나 고객센터처럼 고객이 걸어 온 전화를 응대하고, 아웃바운드는 고객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상품을 판촉한다.

최근 '라면상무' 문제나 LG유플러스고객센터에 걸려온 고객의 "LG에 불났어요?" 녹취록이 화제가 되면서 재조명되고 있는 감정노동의 어려움은 이들이 매일 마주하는 현실이다. 텔레마케터들은 통화를 하며 무차별적인 폭언에 시달린다. 성희롱을 당하는 경우도 잦다.

특히 목소리가 상냥한 사람들에게는 "따로 만나고 싶다", "사귀자"는 수작이 끊이지 않는다. 실상 폭언과 성희롱의 피해자지만, 먼저 전화를 끊지도 못하고 잘못을 비는 것도 이들이다. 고객과 언쟁하거나 먼저 전화를 끊었을 경우 근무 평가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텔레마케터, 유망직종에서 고용불안직종으로

폭언을 일삼는 전화에 텔레마케터들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이는 우울증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
 폭언을 일삼는 전화에 텔레마케터들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이는 우울증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
ⓒ 박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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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씨가 텔레마케터로 일하기 시작한 것은 14년 전, 친한 친구의 권유때문이었다. 텔레마케터 자격증도 따로 없을 때라 큰 준비가 필요하지 않았고, 일을 배우기도 비교적 쉬워 보였다. 살림에 보탬이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씨는 그렇게 생명보험 본사에서 5년, 보험 대리점에서 3년, 홈쇼핑에서 3년 등 약 13년가량 텔레마케터로 일했다.

"그땐 텔레마케터가 유망 직종이었어요. 전화판촉(텔레마케팅)이 막 등장하던 때라, 일도 지금보단 할 만했죠. 보험사 정규직원은 아니었지만, 필요한 사람들에겐 건강보험 직장가입 혜택도 지원해주곤 했었죠."

텔레마케터에 아웃소싱과 특수고용직(위촉계약직)이 만연하게 된 것은 2000년대 초반. 현씨의 기억에 따르면 외국계 보험회사가 국내에 진출하면서 ARS보험가입이 일반화되던 때였다. 회사에서 '위촉계약서'를 내밀며 서명을 요구했다. 담당 매니저는 "일하는데 달라지는 건 없다"며 "사인하지 않으면 일할 수 없다"고 했다. 그때부터 현씨와 동료들은 특수고용직이 됐다.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표한 '간접고용 활용실태 및 간접고용 근로자 근로실태 조사·분석'에 따르면 현재 콜센터 상담원의 절대다수는 비정규직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콜센터 비정규직에도 계급이 나뉜다. 직접고용 무기·장기계약직, 단기계약직, 간접고용 외주업체 소속 정규직, 비정규직, 위촉계약직 순이다.

보통 인바운드는 간접고용 비정규직이고, 아웃바운드는 위촉계약직이 대다수다. 위촉계약직은 쉽게 말해 하청에 하청으로 특수고용직이다. 갑을관계로 치면 을병정의 '병'정도 되는 셈이다. 좋게 말하면 자유롭게 일하고 수당을 받는 프리랜서지만, 결국 열심히 일해도 성과가 없으면 '땡전 한 푼 받아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한다. 현씨는 말했다.

"그땐 그 계약서가 별 것 아닌 줄 알았죠."

감정노동보다 더 심한 실적관리

텔레마케터 모집공고. 흔히 적게 일하고 많이 벌 수 있어 주부들에게 좋다는 식으로 광고한다. 하지만 텔레마케터는 대개 임신을 하거나 아이 문제로 회사를 쉬는 일이 많으면 바로 잘리기 쉽다.
 텔레마케터 모집공고. 흔히 적게 일하고 많이 벌 수 있어 주부들에게 좋다는 식으로 광고한다. 하지만 텔레마케터는 대개 임신을 하거나 아이 문제로 회사를 쉬는 일이 많으면 바로 잘리기 쉽다.
ⓒ 박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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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업무 환경이 변한 것은 거의 없었다. 사무실도, 전화기도, 컴퓨터도 기존대로였다. 하청업체가 운영한다고 하지만 사무실이나 집기 등 모두 원청업체의 것을 그대로 썼다. 아침 9시쯤 출근해 오후 6시쯤 퇴근했고, 점심시간과 쉬는 시간은 센터별로 고정되어 있었다. 쉽게 휴가를 쓰지 못하고 실적을 압박하는 관리감독도 약해지지 않았다. 진짜 프리랜서가 되었다면 관리감독은 줄어야 하는 데 그렇지 않았다.

텔레마케터들이 일하는 콜센터들은 보통 몸이 아파도 휴가를 쉽게 쓰기 어렵다. 전화기가 쉬면 통화량이 줄고, 실적도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특수고용직 텔레마케터들은 출근하지 못한 날의 기본급은 수당에서 제외된다. 기본급 70만 원을 받을 때 하루 나오지 않으면 3만5000원 가량 떼이는 식이다.

이런 휴가마저도 맘껏 쓸 수 없다. 현씨와 같이 아웃바운드 텔레마케터로 일하는 A씨는 출근 준비를 하다 화장실에서 쓰러진 적이 있다. 창문이 별로 없어 환기가 안 되는 콜센터 사무실에서 장기간 일해 몸이 상해 있던 탓이다. 그 즈음 A씨는 자리에서 일어날 때 현기증을 자주 느꼈었다. 건강검진의 필요성을 느꼈지만, A씨는 그날 하루 밖에 쉬지 못했다.

"매니저들은 우리가 쉬는 걸 너무 싫어해요. 좀 쉬고 싶다고 하면, '건강관리도 사회 생활'이라면서 '그것 하나도 못하면 때려치우라'고 하죠. 실제로 아파서 입원이라도 해야 하면 바로 잘려요. 임신도 마찬가지죠."

콜센터에는 보통 월별, 일별로 목표량을 세운다. 이를 1인당 콜 수나 시간으로 할당하고, 조를 짜서 몇 개의 상품 판매 실적을 올리면 될 지 분배한다. 이 시간이나 실적을 채우지 못하면 매니저가 야근을 강제한다. "오늘은 10건을 못 채웠으니 오후 9시까지 가지마세요"하는 식이다.

심지어 일과 시간에 휴식이나 전화 통화 방식까지 꼼꼼히 모니터링을 한다. 고객 상담을 할 때 정보를 검색하기 위한 업무 프로그램 상에 화장실 다녀오는 시간까지 입력하게 하는 것이다. 실적이 좋지 않은 사람의 통화 녹음 파일을 다시 듣고 지적하거나, 실시간으로 통화 방식을 점검하기도 한다. 출근에서 퇴근까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조정하는 셈이다.

이런 콜센터의 관리 방식은 감정노동만큼이나 텔레마케터의 업무 스트레스를 높이는 주요인이다. 2009년 국가인권위원회 용역보고서에 따르면 설문지에 응답한 텔레마케터의 75%이상이 관리자의 관리감독 행위에 신경이 쓰이고,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답했다.

또한 이런 모니터링이 부당한 감정노동을 강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관리자가 모니터링 하면 폭언이나 성희롱을 당해도 전화를 끊거나 그에 대응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해고통보, 퇴직금도 없어

현씨가 위촉계약서의 '위력'을 깨달은 것은 지난해 직장에서 해고통보를 받으면서다. 그녀는 2011년부터 한국교직원공제회 위탁업체와 위촉계약을 맺고, 공제회 콜센터에서 일했다. 지난해 초, 콜센터 간부가 지인에게 보험가입 문의전화를 몰아준 의혹이 제기됐다. 현씨는 이 과정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제기하고, 동료들과 노조결성을 시도했다.

이후 8월 그녀와 동료 2명은 곧바로 위탁업체로부터 계약해지(해고) 통보를 받았다. 현씨는 곧바로 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했고, 지난해 10월 관할 지방노동위로부터 '부당해고'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올해 1월 중앙노동위는 '계약기만 만료'를 인정했다. 결론적으로 위촉계약서를 작성한 텔레마케터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특수고용직 텔레마케터에겐 고용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위촉계약은 1년 단위로 재계약된다. 1년 동안 실적이 좋지 않으면 계약이 유지되지 않을 수 있다.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4대 보험도 적용되지 않고, 퇴직금도 없다. 오히려 해고 당하기 전 판매한 보험상품 관리가 어려워졌다는 이유로 수당이 떼인 월급을 받았다.

노동자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노동조합도 협상능력이 없다. 부당한 계약관계나 관행에 대해 사측에 항의하고 협의할 수 있는 공식통로를 만들기 어렵다. 실제 위탁업체는 올해 1월 중노위 판결이 내려진 이후, 전국사무연대노동조합 교직원공제회 콜센터 지부에 현씨가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교섭의무가 없다고 밝혔다.

"아플 때 쉬지도 못하고, 사무실에서 감시받으면서 일해야 하는 자영업자가 말이 되나요?"

현씨가 말했다. 그녀는 중노위 판결 이후 특수고용직 텔레마케터의 노동자성을 인정받기 위해 민사소송을 준비 중이다. 또한 지난해 8월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 여의도 교직원공제회관 앞에서 복직투쟁을 하고 있다.

전국사무연대노조는 감정노동과 실적압박·고용불안에 시달리면서, 노조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특수고용직 텔레마케터를 약 4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5일 전국사무연대노조와 한국교직원공제회 콜센터 지부가 여의도 교직원공제회관 앞에서 '콜센터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집회를 열고 있다.
 5일 전국사무연대노조와 한국교직원공제회 콜센터 지부가 여의도 교직원공제회관 앞에서 '콜센터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집회를 열고 있다.
ⓒ 박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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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텔레마케터, #나는 노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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