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나 주말의 짧은 여행을 떠날 때 계절에 상관없이 가방 안에 꼭 들어가는 게 한두 권의 책이다. 배낭의 무거움을 최소한 줄이면서 '비움'의 미학을 발휘해야 하는 배낭여행이나 자전거 여행은 책도 조금은 달라서 일반 책보다 가볍고 얇은 문고판 형식의 책을 선호하게 된다.
그런 책들 가운데 추천할 만한 것이 열화당에서 나온 사진문고 시리즈다. '포켓사이즈'라 얇고 가볍고 한 손에 쏘옥 들어오는 느낌이 어릴 적 읽었던 문고판 책들을 떠오르게 한다. 임응식, 최민식, 구본창 등 한국작가의 사진집 15권과 유진 스미스, 앙드레 케르테스, 사페이, 도마쓰 쑈메이 등 외국 사진가의 사진집 24권이 발간되었다. 사진문고 시리즈는 매년 계속되고 있어 여행자는 물론 주머니가 가벼운 사진 애호가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책장을 펼치자마자 나오는 마음을 훈훈하게 때론 가슴을 알알하게 하는 사진들과 그에 어울리는 작가의 짧고 진솔한 아포리즘(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의 성찬으로 볼거리, 생각거리가 풍성하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독자들을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하는 요~물" 같은 책들이요, 사진 예술의 작은 박물관이다.
평범함을 특별함으로 바꾸는 사진, 전몽각
왜 장가 못 가느냐고 주변에서 핀잔 받던 내가 어느 사이엔가 1녀 2남의 어엿한 가장이 되었다. 아이들을 낳은 후로는 안고 업고 뒹굴고 비비대고 그것도 부족하면 간질이고 꼬집고 깨물어가며 그야말로 인간 본래의 감성대로 키웠다. 공부방에 있다 보면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소리가 온 집안 가득했다. 그 소리에 이끌려 나도 몰래 아이들에게 달려가 함께 뒹굴기도 일쑤였다. 그야말로 사람 사는 집 같았다. 나는 이런 사람 사는 분위기를 먼 훗날 우리의 작은 전기(傳記)로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집에만 돌아오면 카메라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 사진집 가운데사진 애호가가 되면서 멋들어진 풍경과 감동적인 찰나의 순간을 찾아 출사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사진 동호회 활동을 하기도 하지만 정작 자신 곁에 있는 식구들이 좋은 사진 주제가 된다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하기가 쉽다. 사랑이란 흔한 테마외에도 공존, 아픔, 이별 등 나라의 역사처럼 가족사에도 다양한 이야기가 존재한다. 큰딸이 태어나서 결혼하기까지의 성장과정에 대해 기록한 사진 애호가 전몽각의 사진집은 내 곁에 있는 식구들에게 관심과 시선을 돌리게 하는 책이다.
사진집은 갓난아기 때 모습부터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결혼하여 부모 곁을 떠나갈 때까지 아이의 성장과정을 아버지의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다. 한 가족이 살아오며 그려낸 기쁨과 행복, 슬픔과 이별이 담긴 삶의 갖가지 풍경을 보면서 삶의 의미와 함께 사진의 의미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가족이 해체되는 시대, 가슴이 따뜻해지고 떨어져 살고 있는 식구들이 보고 싶어지는 사진집이다.
저자인 전몽각 선생(2006년 작고)은 직업 사진가가 아니다. 빼어난 구도도 번쩍이는 아이디어도 선명한 화질도 아니지만, 그의 사진집은 진정한 아마추어리즘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렌즈 너머 대상을 바라보는 사진가의 따뜻한 시선과 끈기라는 것을….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익숙한 것을 특별한 것으로 발굴해내는 작업은 비단 프로 사진작가가 아닌 사진 애호가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함께 선물해 주셨다.
유진 리처즈(Eugene Richards, 1942~ )
한 남자가 눈을 부릅뜨고 아이의 목을 조르고 있으며 아이는 신문지가 깔린 바닥 위에서 혀를 내밀고 괴로워하고 있다. 그리고 사진작가 유진 리처즈의 메시지, "사랑은 힘들 수도 있고, 사랑은 잘못될 수도 있고, 부모가 아이를 잔혹하게 다루면서도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곳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도 알아야하기 때문에 사진을 찍는다." - <학대>라는 제목의 사진에서영화 <뱅뱅 클럽 (2012)>은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 시절의 분쟁을 사진으로 담고 있던 사진가 네 명의 활약과 고뇌가 담긴 이야기다. 가난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나라에 사는 국민들의 실상을 세상에 알려 참여와 도움을 구하기도 하지만, 사회적 약자들이 겪는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사진을 골라 찍어서 돈과 명예를 얻는 포토저널리스트라는 직업의 애환을 알게 되기도 했다.
유진 리처즈는 현대 포토저널리즘에서 가장 뛰어나고 중요한 작업을 해낸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사진가다. 작가 지망생이었던 그는 카메라를 손에 쥘 때부터 예술사진보다는 길거리의 거친 것들을 즐겨 찍기 시작했고, 직업 사진가가 되고서부턴 사진으로 사회적 정의와 현대적 삶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노력하고 있는 포토저널리스트다. 중산층의 백인이었지만 그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가난하거나 병에 걸린 흑인들이었다. 리처즈의 그런 마음은 그의 렌즈를 통해 분노의 침묵으로 우리 앞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이 세계를 카메라에 담겠다는 것과 사진으로 이야기를 전하겠다는 것, 회사(사진 잡지사)가 원하는 않는 이미지이더라도 계속해서 그것을 그려나가겠다는 것, 사이버 시대에도 사진을 고집하겠다는 것 등. 사진집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말할 수 없지만 느낄 수는 있는 신의 혹은 신념이 사진들 속에 담겨져 있다.
풍요로움과 성급하게 맞바꾼 골목의 기록, 김기찬
내 사진 테마는 골목안 사람들의 애환, 표제는 골목 안 풍경, 이것이 내 평생의 테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러한 나의 결정을 한 번도 후회해 본 일이 없다 - 사진집 가운데가난과 행복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 시대에 가난했지만 행복했다고 좋은 시절이었다고 느껴지는 사진들이 차곡차곡 포개져있다. 서울 만리동, 공덕동, 도화동, 문래동, 아현동…. 내게도 익숙한 동네들 이름과 친숙한 사진들이 펼쳐진다. 몸만 시간에 쫓겨 바쁘게 허덕일 뿐, 마음은 오히려 공허해지고 있는 사람들에겐 치유와 같은 사진집이다.
그의 사진 속 배경이나 등장인물들 대부분이 쾌적하지 않고 가난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햇살이 양지를 만들어 이불을 보송보송하게 말리는 장면, 개구쟁이 아이들의 장난기 어린 웃음소리와 강아지들의 짖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웃 간에 술 한 잔을 놓고 어려움을 나누는 인정이 사진 속에 녹아 있어 결코 불쌍하거나 '구려'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풍요로움과 성급하게 맞바꾼 소중한 것들이 그 속에 남아 있다는 강한 이끌림에 그의 골목 안 사진을 구석구석 찬찬히 살펴보게 만든다. 그는 포토그래퍼 이전에 따뜻한 마음과 정겨운 시선으로 이웃을 감싸 안는 휴머니스트였던 것 같다. 그의 사진의 남다른 따스함은 그의 사람됨과 진정성에서 나온 듯싶다. '쓸쓸함'과 '훈훈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김기찬의 사진의 매력이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골목 안에서 자신의 고향을 보았고, 가난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인간의 따뜻한 본성을 느꼈다고 한다. 골목 안 주민들과의 오랜 유대감을 바탕으로 진행된 그의 골목 안 작업은 타계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사진가 김기찬은 그가 반평생 사진으로 담았던 서울의 골목들이 거의 다 사라져버린 2005년에 돌아가셨다. 아마 골목은 그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나 보다.
이외에도 <열화당 사진문고>는 한국의 사진가 강운구, 주명덕, 김녕만, 민병헌 등과 세계적인 사진가 베르너 비쇼프, 워커 에번스, 낸 골딘, 도로시아 랭, 요세프 수데크 등의 작품을 작가의 연대기와 함께 실은 작품집 시리즈다. 현재까지 39권이 나왔다. 손바닥 만한 크기지만 작가들의 작품이 시대별로 꼼꼼히 실려 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좋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하듯, 좋은 사진을 찍고 싶다면 우선 좋은 사진들을 많이 보아야 한다. 사진사에서 평가받고 있는 사진가들의 작품을 많이, 자세히, 자주 보는 일은 사진에 대한 안목과 실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림을 공부하는 이들이 명화를 자주 보는 것처럼.
덧붙이는 글 | <전몽각> 전몽각 (사진), 이문강 (글) | 열화당 | 2013년 1월 | 14,000원
<유진 리처즈> 유진 리처즈 (사진), 찰스 보든 (글), 이영준 (옮김) | 열화당 | 2013년 1월 | 12,000원
<김기찬> 김기찬 (사진), 정진국 (글) | 열화당 | 2011년 8월 | 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