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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는 감시대상자, 요주의대상자를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범죄자에게 어울리는 단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불의에 저항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했어요. 우리는 한 발 더 나아가 우리 생각 깊숙이 들어와 있는 '왜곡된 생각'도 발견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나의 생각까지도 검열하게 만드는 '생각의 블랙리스트'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것의 실체를 파헤치고, 맞서보려 합니다. - 기자 말

1997년 12월 3일 세종로청사에서 캉드쉬 IMF 총재가 지켜보는 가운데 당시 임창렬 부총리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가 IMF 긴급자금지원 의향서에 서명하고 있다.
 1997년 12월 3일 세종로청사에서 캉드쉬 IMF 총재가 지켜보는 가운데 당시 임창렬 부총리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가 IMF 긴급자금지원 의향서에 서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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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라트비아 국민 400여명이 러시아 갑부 로만 아브라모비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조국 라트비아가 파산했다. 현재 국제통화기금(IMF)에 105억 달러를 주고 나라를 팔려는 협상을 진행 중이다. 이 나라를 살 수 있는지 고려해주기 바란다. 우리 국민은 성실하며 깨끗한 환경을 지닌 나라다. 당신의 요트를 세워 둘 곳도 많다.

이에 앞서 라트비아 국민 2000여명은 스웨덴 정부에 라트비아를 복속시켜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라트비아어를 공용어로 쓰는 인구 300만명도 되지 않는 작은 나라지만 민족의 몰락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보여줍니다.

2013년 4월에 컨설팅그룹 매킨지가 15년 만에 한국보고서를 냈습니다. 매킨지는 섬뜩한 표현으로 한국에 경고합니다. "지금 한국 경제는 뜨거워지는 물 속의 개구리와 같다", "북한 핵보다 경제성장이 멈춰버린 게 한국의 진짜 위기다", "이대로 가면 한국 경제는 성장을 지속할 수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사실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2013년 현재 국내 중소 조선사 23곳 중 한 곳을 제외한 22곳이 구조조정 중입니다. 2012년에만 문 닫은 자영업자가 83만명입니다. 20대 후반 27%가 비경제활동인구이란 통계청 자료는 4명 중 한 명은 아예 일할 의욕을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청년고용률은 23%로, 국가 파산에 직면한 스페인의 24.1%, 포르투갈의 27.1%보다 낮습니다.

국민 2명 중 한 명이 4대보험을 연체하고 있고 저소득층의 빚 연체율은 2012년 하반기부터 8개월 새 2배로 늘었고, 공교롭게도 쌀값은 2년새 31%나 올랐습니다. 비정규직 1000만의 가족, 영세 자영업자의 가족, 중소기업 종사자의 가족 모두가 생계의 벼랑에 몰려 있습니다. 이들이 벼랑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하면 구조조정이란 칼날에 밀려 대기업 종사자들의 가족들도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예외가 되는 이들은 태생부터 다른 정몽구, 정의선, 이건희, 이재용 정도 아닐까요.

분단과 세계화가 낳은 '자해성 인식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2009년 9월 미국의 골드만삭스가 펴낸 '통일 코리아, 북 리스크 재평가'엔 한반도가 통일되면 G7을 능가하는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나옵니다. 통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000년 남북 정상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서로 신뢰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현실의 흐름은 반대로 가는 듯합니다. 정권과 언론은 날마다 무슨 '북한 책임'을 말하는데 그래서 남북대결이 지속되면 그 피해는 결국 우리 민족 모두가 지게 됩니다. 최근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2013년 통일의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북한이 남북관계에서 어떠한 대상인가'라는 질문에 '적대대상' 혹은 '경계대상'이라는 응답 비율은 20대가 43.2%였고, 30대는 35.6%, 40대는 35.1%, 50대 이상은 37.3%였습니다.

그리고 '북한이 한반도 평화에 가장 위협적인 국가다'라는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답한 비율은 56.9%로 2012년 47.3%보다 상승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누구의 책임인가를 떠나서 남북 화해를 위한 상당한 노력이 필요함을 알 수 있으며, 20대가 가장 부정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미래를 열어가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하진 않을 겁니다. 강대국의 의해 분단된 나라가 조금이라도 잘 살기 위해서는 강대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통일하는 것, 말고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의 앞날이 달린 일조차 '누구 책임', '누구 탓' 앞세우며 결국 남(미국, 일본 등) 좋은 일만 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민족은 이미 낡은 개념이다', '북한은 원래 그렇다', '우리는 약소민족 아니냐'라는 인식 때문입니다. 분단과 세계화가 낳은, 우리 스스로 공격하는 자해성 인식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맞서는 순간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됩니다.

우리 민족은 스스로 발전할 수 없었나요

교과서포럼공동대표 이영훈(오른쪽 두번째) 서울대 교수가  2008년 3월 25일 오전 서울 세실레스토랑에서 '대안교과서'로 완성한 '한국 근ㆍ현대사' 공식 출간과 관련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영훈 교수는 대표적인 식민지근대화론 옹호 학자다.
 교과서포럼공동대표 이영훈(오른쪽 두번째) 서울대 교수가 2008년 3월 25일 오전 서울 세실레스토랑에서 '대안교과서'로 완성한 '한국 근ㆍ현대사' 공식 출간과 관련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영훈 교수는 대표적인 식민지근대화론 옹호 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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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의 발전을 촉진시켰고, 그 역사적 경험이 해방 이후 한국 자본주의 성장의 기반이 됐다는 견해입니다. 놀라실지 모르겠지만 이런 주장을 하는 학자가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를 하고 있습니요. 학계, 정치계, 경제계에 있는 상당수의 실력자들이 동의하니까 가능할 테지요. 이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못 배우고 무능력한 조선 사람들에게 일본이 철도도 놓아주고, 공장도 지어줬다는 것입니다.

명백한 사실부터 보겠습니다. <한국의 역사>(조선사연구회 엮음, 조성을 옮김, 한울)를 보면 1931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간도에서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는 조선사람 4만명을 학살했다고 나옵니다. 또 군량미로 쓰기 위해 쌀 생산고의 43.1%(1941년), 45.2%(1942년), 55.7%(1943년), 63.8%(1944년)을 빼앗아 간 기록도 나옵니다.

브루스 커밍스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김주환 옮김, 청사)에서 인용한 1932년 3월 27일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덕원(함경남도 소재)에서만 2만 명이 굶어죽어 가고 있다. 집 안에 앉아서 죽음만 기다릴 수는 없기에 20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은 거리를 헤매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총독부의 보고의 의하면 1938년 농촌인구의 80%가 소작인이었는데 최고 9할에 이르는 소작료와 고리대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당시 실업률은 50%가 넘는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노예노동에 시달린 사람이 1945년에 236만5000여 명에 달했습니다. 과연 누가 원한, 누구를 위한 '근대화'일까요?

물론 조선은 문제가 많은 봉건국가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힘으로 충분히 발전할 수 있었어요. 사대적이고 무능력한 왕조와 새 시대를 갈망하는 민중들은 엄연히 달랐습니다. 동학농민운동 얘기를 해 볼게요. 1894년 7월 6일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이 합의한 폐정개혁안에는 "탐관오리의 그 죄목을 조사하여 하나하나 엄징할 것", "횡포한 부호들을 엄징할 것", "'노비문서는 태워버릴 것", "무명잡세는 모두 폐지할 것", "왜와 내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공사채를 막론하고 지난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하게 할 것" 등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것은 지금도 시행되지 못할 정도로 진보적인 것들이지요. 이런 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자 전라도 전역(나주 제외)에, 경상도, 충청도에 집강소를 설치해 개혁안을 실행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수도 한양으로 진격하던 중에 왕이 끌어들인 일본군대의 화력 앞에 쓰러졌습니다. 민중이 사회를 개혁하고 나서면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법입니다. 이걸 막은 게 바로 일본과 반민족세력입니다. 결론은 우리가 못 배우고 무식한 것이 아니라 침략당한 것입니다. 일본이 방해한 것이죠.

8·15 해방은 미국의 원자폭탄 덕분일까요

우리는 원자폭탄 투하로 8·15 해방이 왔다고 배웁니다. 원자폭탄을 터뜨린 게 미국이니까 38선 이남을 미군이 점령한 게 뭐 이상한 일이냐는 논리도 있습니다. 이러다 보면 우리 민족의 힘이 약해 미국의 힘을 빌어 해방을 맞이한 게 됩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미국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인식도 있지요.

하지만 <한국의 역사>에 따르면 조선총독은 "조선이 가령 제2전선의 화약고인 이상 전황이 불리하게 되면 언제고 폭동화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라고 우려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조선민족의 독립열망이 커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의 역사>에 나오는 조선총독부의 통계에 따르면 1931년에서 1936년까지의 '항일무장대'의 출몰 회수는 2만3928회, 전투에 참여한 연인원은 136만9027명, 탈취한 총기는 3179정에 이르렀습니다.

<한국전쟁의 기원>에는 1930년에 접어들어 약 16만명의 항일 무장부대가 만주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식민지 조선 인구의 9할은 농민이었습니다. <1930년대 민족해방운동>(거름)이란 책에 당시 농민조합의 규모와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가 나옵니다. 함경도 내 정평군에서는 자작농의 21%, 소작농의 54%, 자작농 겸 노작농의 29%가 농민조합에 가입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비합적 지하운동 형태를 취하고 있었던 점에 비추어 본다면 결코 낮은 수준이라 볼 수 없습니다.

해방 직후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한국현대사1>(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연구반, 풀빛)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인민위원회에 대해 가장 선구적이며 포괄적 내용을 갖는 것은 브루스커밍스의 연구이다. 남한의 군(郡) 중 거의 50%에 이르는 군에서 인민위원회가 실질적인 통치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1945년 9월엔 1000명이 넘는 대표들이 모여 '조선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선포하고, 일본 제국주의 법률 폐지, 친일협력자 및 민족반역자 토지 몰수, 철도 통신 금융기관의 국유화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기도 했어요. 여기서 한 가지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남한의 50% 이상 지역에서 통치력을 발휘하고 '공화국'까지 선포한 자발적인 민중들의 건국역량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일까요? 브루스 커밍스의 연구에 따르면 경북 영양군의 군민 80%는 인민위원회 소속이었다고 하는데 이런 조직적 토대를 가지고 일제에 숨죽이고 가만히 있었을까요?

답은 의외로 간단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인민위원회 조직들은 1946년 미군정에 의해 말살당하게 됩니다. 그들은 미군정에 예속되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분명히 인민위원회는 민족의 자주·자치 역량이었던 겁니다. 이 외에도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힘든 자료들이 많습니다. <한국경제의 뿌리와 열매>(박세길, 돌베게)에는 당시 신문자료를 인용해 1945년 11월 남한에 728개의 공장관리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거기에 8만8천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당시 노동자의 수는 10만 명 정도로 추산되니 그 에너지가 상상이 갑니다.

해방 이전에 조선총독도 조선 땅을 '제2전선'이라고 걱정할 만한 민족자주 에너지가 우리에겐 있었습니다. 그것을 탄압한 세력이 공교롭게도 '우리를 해방시킨' 미국이었구요. 그렇다면 8·15 해방이 원자폭탄 덕분이라느니, 미군 덕분이라느니 하는 것은 누가 만들어낸 말인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 다음 편에서는 가장 민감한 '미국의 경제원조'에 대한 '자해성 인식'을 파헤쳐 보겠습니다.
* 글쓴이는 예술과철학(주) 연구원입니다.



태그:#블랙리스트, #생각, #철학, #사회,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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