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비는 오늘 응가 열일곱 덩이를 눴어."
친구의 '산책 무용담'엔 자랑 겸 탄식이 섞여있다. 일곱도 아니고 열일곱 덩이라…. 그런데 그것이 가능할 것도 같다. 동물이 많이 사는 곳에 이사를 오니 가을이는 산책 때마다 호기심 천국이다. 집 앞의 냄새도 실시간 업데이트가 되고 매번 들르는 가로수에도 새로운 체취가 남아 있다. 같은 길을 같은 패턴으로 가도 다채로운 냄새의 향연에 흥미로워한다.
예전엔 무미건조한 콘크리트 바닥을 직진, 직진만 하다 어렵사리 숲 덤불을 찾아 겨우 응가 한 번 눴다면, 요즘엔 다른 친구의 흔적에 자신의 흔적을 덧씌우느라 신나게 누고 또 누고 한다. 밥을 좀 더 많이 먹이면 밤비의 기록을 깨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동네에 코 맞추고 인사하는 친구들이 많아져서 참 기쁘지만 안타까운 경우도 종종 본다. 거대한 철문 뒤에 묶여 코만 내놓고 있는 개들. 집 지키는 어명을 받아 성실히 수행중이렸다. 그래도 얼마나 뛰어놀고 싶을까 싶다. 가을이가 하루에 세 번씩 발랄하게 골목을 나다니는 동안 그 아이들은 좁은 틈으로 바깥 분위기를 살피다 목이 졸려 컥컥대곤 한다.
유리문 안에서 갇혀 지내는 애들도 있다.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다 산책 나온 친구들을 향해 험하게 짖는다. 가게의 문이란 문은 꼭꼭 닫혀있고, 에어컨은 가동 중일 텐데 환기는 자주 시키시려나 오지랖이 앞선다.
마당에 짧은 끈으로 하염없이 묶여 있는 개도 있다. 마당 있는 집을 갖는 건 모든 견주들의 소망일진대, 어찌 마당이 있는데도 저 개는 한 자리만 지켜야할까 속이 상한다. 가까이 가보면 물그릇은 바싹 말라있고 밥그릇엔 털이 수북이 빠져 있곤 해서 몇 번 갈아주기도 했다.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걸까. 요즘 내가 골똘히 빠진 망상의 주제이다. 이 땅에 태어난 건 잘 살라는 이유임에는 분명하다. 과연 어떻게 나이 들어가야 할까. 이 세상 수많은 생명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아침 산책 길에서 만난 아기 고양이 한 마리
며칠 전 잊지 못할 사건이 있었다. 평소처럼 가을이와 아침 산책을 다녀오는 길인데 그날따라 색다른 길로 가보고 싶었다. 낯선 골목에서 집으로 향해 가던 중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어린 아기가 아주 호소력 짙게 우는 것으로 보아… 고양이다! 직관을 믿고 소리를 향해 달려가 보니, 폐가전제품들을 쌓아놓은 묘한 골목의 한 구석이다.
소리만 들릴 뿐 고양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야옹아, 부르면 대답하듯 바로 반응을 보였다. 우선 가을이를 집에 데려다 놓고 의자를 들고 나왔다. 그 기묘한 구석의 담이 내 목 정도까지 올라와서 의자의 도움 없인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난간을 딛고 내려가 조심스럽게 텔레비전 뚜껑 같은 것들 사이로 발을 내려놓았다. 어둡고 냄새나는 곳에서 고양이는 계속 울고 있었다.
두려운 마음도 잠시, 손바닥보다 작은 생물이 꿈지럭 거리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배꼽엔 탯줄과 태반이 한 뭉텅이 걸려있고, 옆엔 회색 털뭉치가 웅크리고 있는데 움직임이 없었다. 어미인가 싶어 슬쩍 건드려보니 딱딱하게 굳어있다. 그 와중 아기 고양이는 네 발을 꼬물락거리며 고통스럽게 울고 있었다. 수건으로 아기를 조심스럽게 싸서 병원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가까운 동물병원에 도착하여 상황 설명을 하기도 전에 의사선생님이 하는 말은,
"어차피 죽을 거예요."힘이 쭉 빠졌다. 고양이는 버둥대며 울고 있는데 들여다보지도 않고 하는 말이다. 손사래를 치며 그런 애들 처치곤란이라며 "알아서 처리하세요"라고 한다. 나는 강아지만 다뤄봤고, 게다가 눈도 못 뜬 신생아인데, 병원에서는 겨우 분유와 젖병을 사왔을 뿐이다. 집에서는 설상가상으로 가을이가 이 작은 생명을 물려고 든다. 고양이를 키우는 지인들은 오늘따라 전화를 안 받는다.
고양이의 우는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 뭐라도 먹여야 할텐데 어떻게 해야 하지? 집근처 책방에서 고양이를 키운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다시 아기를 안고 책방에 들어선 순간 서러움이 복받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책방의 수컷 고양이는 아기 고양이 냄새를 맡고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주인 아저씨 또한 이렇게 갓 태어난 아기는 처음이라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셨다.
또 몇 분간 주변에 도움을 청하느라 헐레벌떡 했지만 역시 아기에게 분유를 먹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동물병원에 마지막 희망을 갖고 전화를 했다.
"예, 데려오세요. OO구에서 구조한 유기동물은 저희가 보호합니다."살았다! 택시를 잡아타고 고양이를 데려갔다. 신생아용 젖병을 물려주니 꿀떡꿀떡 잘 넘긴다. 항문을 자극하여 응가도 시원하게 누이고 핫팩으로 따뜻하게 잠들 수 있게 해주셨다. 10일간 고양이를 보호하며 그 후엔 분양을 하든가 보호소에 보낸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잃은 경우는 살 확률이 낮다고 넌지시 알려준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보살펴 주신다니 마음이 놓인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다, 살자
그때부터 내 마음은 온통 아기 고양이에게 가 있었다. 잘 있나 찾아가기도 하고 전화로 묻기도 하고. 너무 자주 의사선생님을 귀찮게 구는 것 같았지만 하루 종일 붙어있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름대로 이름도 지어줬다. 조르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따왔다. 부디 그렇게 강한 의지로 살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고양이를 맡긴 지 3일째 되는 날 오후에 병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설마…?
"아기 고양이가 방금 떠났습니다. 아침부터 우유를 잘 못 먹더니…." 80g의 조르바는 너무 빨리 엄마 곁으로 가버렸다.
산다는 게 대체 뭔지 조금은 비관적으로 생각해오던 내게 조르바가 나타났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조르바에게 '꼭 살아라' 하고 외치고 있었다. 비록 우리 곁에선 3일밖에 못 살고 갔지만 조르바는 분명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꼭 감은 눈, 분홍색 코, 입을 벌려 우유를 삼키고 발톱에 힘을 꽉 줘서 매달리기도 했었다.
때로는 생각한다. 내가 가을이를 조금만 늦게 데려왔으면 어떻게 됐을까. 가을이 몸속의 심장사상충이 활개를 치고 다녔겠지. 이렇게 내 곁에서 코에 윤기를 내며 쳐다보고 있을 수 없었겠지. 아침마다 왼발을 들어 나를 깨우는 귀여운 모습도 볼 수 없었겠지…. 삶은 소중하다.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생명은 고귀하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다,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