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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라는 말이 최근 몇 년만큼 우리 사회에서 흔했던 때가 있었을까. 무상급식이 2010년 지방선거에서 쟁점으로 떠오른 이후, 복지는 시대의 열쇠말로 자리 잡았다. 총선과 대선이 잇따른 지난해에는 각 후보자와 정당마다 복지공약을 앞다퉈 내세웠을 정도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복지를 위한 증세에 찬성한다'는 답변이 절반을 곧잘 웃돌았다. 그만큼 한국이 복지국가로 거듭날 수 있을 거란 기대도 커졌다.

<나는 복지국가에 산다> 책표지.
 <나는 복지국가에 산다> 책표지.
ⓒ 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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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사실 복지국가는 우리에게 그저 '좋은 것'일 뿐이었다. 정작 복지국가가 무엇인지, 복지국가 삶을 어떻게 바꿀지는 분명치 않았다. 정치인들의 이야기는 구호에 그쳐 뜬구름 잡는 듯했고, 학자들의 이야기는 너무 어려웠다. 게다가 박근혜 대통령은 주요 복지공약이었던 '기초노령연금 20만 원' '4대 중증질환 100% 국가 책임'을 후퇴시키며, 복지국가를 향한 기대에 찬물을 끼얹기까지 했다.

한국이 복지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면, 복지국가에 대한 이해가 먼저라고 판단하는 까닭이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와닿을 수 있어야만, 복지국가를 향한 발걸음도 빨라질 수 있다. 이제까지 복지국가의 사례로는 흔히 노르웨이나 스웨덴 같은 북유럽 국가들이 꼽혔다. 그들이 펼치고 있는 복지정책들이 소개되는 일도 잦았다. 그러나 역시 어려운 게 문제다. 애당초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복지국가가 쉽게 이해되기는 어려울 터다.

6명의 교민들이 말하는 복지국가 노르웨이

우리가 바라는 것은, <서유견문> 스타일의 '문명 열강 따라 배우기'가 절대 아니다. 이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길에서 노르웨이 노동자들이 쟁취한 성과들을 하나의 참고틀로 삼아보자는 것이다. 꼭 오늘 날의 노르웨이와 같은 결과를 우리가 현실적으로 '지금 당장에' 따낼 수 있는 것도, 따내야 하는 것도 아니라 할지라도 그 결과를 향한 노르웨이 민중들의 움직임 속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대목들은 많다. - 박노자, <나는 복지국가에 산다> 책을 내며

<나는 복지국가에 산다>(꾸리에 펴냄)는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가 기획하고, 6명의 노르웨이 교민들(김건·백명정·이경예·정의성·조주형·최경수)이 쓴 책이다. 노르웨이에서 10년 이상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생생하고 쉬운 복지국가 이야기를 담았다. 더불어 노르웨이가 복지국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원동력과 그들이 지닌 과제를 통해, 우리 사회가 복지국가를 향하는데 고민해봐야 할 시사점도 전하고 있다.

글쓴이들은 복지국가 노르웨이의 밑바탕으로 한결같이 평등을 꼽는다. 어릴 적부터 교육을 통해 평등의 가치를 배워,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도 자연스럽게 내면화됐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음악교사인 백명정은 학생 체벌용 회초리를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로 만난 충격, 가르치는 학생에게 칠판을 지우라고 지시하자 "내가 도와주길 원하신다면 제게 예의를 차려서 부탁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대답에 놀라워했던 경험을 말한다.

노르웨이에서 아이가 있는 커플 혹은 부부들을 위한 가장 실질적인 혜택을 꼽는다면 '바네트리겐'(barnetrygden, 아동 보험/수당)을 들 수 있다. (…) 1946년부터 시행된 이 제도는 부유한 가정이든 가난한 가정이든 수입에 관계없이 같은 돈이 지급된다. 즉, 이 제도의 목적은 빈부격차를 줄이는데 있다기보다 아이가 있는 가정이 아이가 없는 가정에 비해 가질 수밖에 없는 경제적인 부담을 줄이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 조주형, <나는 복지국가에 산다> 58~59쪽

이렇게 '상식'으로 여겨지는 평등의 가치는 정책으로 실현된다. 예컨대 자녀가 있다면, 모든 부모는 국가로부터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가족구성의 형태나, 소득수준 등은 지원대상 선정과 전혀 무관하다. 덕분에 노르웨이는 2010년 기준으로 유럽에서 세 번째 높은 1.95명의 합계출산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물론 노동, 교육, 의료 등 전반적인 정책에서도 평등의 가치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글쓴이들은 그것이야말로 노르웨이에서 학습이 저조한 아이가 교사에게 더 관심을 받고, 목수가 석·박사보다 더 수입이 많으며, 자녀양육과 군 복무까지 양성평등으로 이뤄지는 게 자연스러운 까닭이라고 전한다.

노르웨이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사회와 정치에 대한 참여의식을 가르칩니다. 초등학교 7학년 교과서만 봐도 노동조합이 무엇인지 복지국가가 무엇인지, 노르웨이가 어떤 사회적 갈등 속에서 복지국가가 될 수 있었는지 하는 것들을 알 수 있습니다. (…) 보통 12~13세부터 정당에 입당할 수 있고, 고등학교부터 본격적으로 정당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덕에 사회 참여의식이 일찍부터 발달하고 자신과 사회의 문제에 대한 의식수준도 높은 편입니다. - 최경수, <나는 복지국가에 산다> 97~98쪽

노르웨이 국민들이 정치를 대하는 태도도 흥미롭다. 청소년 시기부터 정치에 참여하도록 권장된다. 덕분에 "각종 정당 당원의 상당수가 20대이고 대학생 중에 의원이 있(는)" 상황이 보편적이라고 한다. 복지국가를 위한 정책이 결국 정치로 귀결되는 만큼,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역시 자신들이 지닌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원동력일 것이다.

복지국가 노르웨이가 지닌 그늘

외국인 노동력의 필요성에 대해 대개의 노르웨이인들은 인정하고 있지만, 과연 외국출신 인구를 노르웨이 사람들이 하려고 하지 않는 일들을 대신 해주는 '용병'쯤이 아니라 '내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 정의성, <나는 복지국가에 산다> 132쪽

객관적인 지표로 보면 복지국가 노르웨이는 분명 행복한 이들이 살고 있는 나라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행복지수에서 세계 2위이며, UN 인간 개발지수에서는 세계 1위다. 이밖에도 노르웨이가 '삶의 질'을 나타내는 지표에서 최상위권에 자리 잡고 있는 경우는 무수히 많다.

하지만 글쓴이들은 그러한 노르웨이에도 그늘이 존재하고 있음을 전한다. 예컨대 이주민들을 향한 노르웨이인들의 불편한 시선을 보여 사회적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지역에 이민자가 증가하면, 백인들이 떠나가 버릴 정도다. 2011년에는 백인 인종주의자 브레이빅이 노동당 모임에 집결한 청소년에게 총기를 난사한 사건도 발생했다. 69명의 희생자를 낳은 이 참사는 마찬가지로 이주민들에 대한 적개심이 원인으로 꼽힌다.

본인 부담금 상한선이라는 것은 질병의 종류나 총 진료비의 액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감기에 걸려서 가벼운 진찰만 받은 환자, 값비싼 항암 화학치료를 받는 암환자, 합병증으로 고생하는 당뇨병 환자, 희귀난치성 질환에 걸린 환자, 이들 모두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본인 부담금의 최대액은 상한선으로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개인이 지불해야 할 치료비가 몇 천만 원은커녕 몇 백만 원이 되는 경우도 없어서 이에 따른 부담도, 그리고 불안도 없어진다. - 김건, <나는 복지국가에 산다> 161~162쪽

노르웨이는 의료비에 본인 부담금 상한선이 있어, 국가의료보장성이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책에서는 OECD 통계를 빌려 노르웨이와 한국의 의료비 본인부담률을 비교한다. 2010년 기준으로 노르웨이는 15.3%, 한국은 33.8%로 우리 사회가 두 배 이상 본인부담률이 높다. 때문에 한국에서는 전체 가구의 80% 정도가 사실상 민간보험 가입을 강요받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잘 갖춰진 노르웨이 의료체계에도 문제점은 있다. 한국은 일반적으로 환자가 원하는 병원과 의사에게 찾아가 진료를 받는다. 반면 노르웨이는 지역마다 일하는 '지역 주치의'를 통해 1차 진단이 이뤄지고, 이를 바탕으로 다음 단계의 의료 절차가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짧으면 몇 주, 길면 몇 달이라는 긴 시간이 소모된다는 것이다. 공공 의료체계의 긴 소요시간 때문에, 질병치료를 위해 비싼 돈을 들여가며 외국을 갔다 오는 경우까지 있다고 한다.

한국은 노르웨이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개선할 것인가

우리가 노르웨이 민중처럼 잘 조직되고, 지배자들을 위력적으로 압박하고 그들로부터 쟁취할 것을 쟁취할 수 있으면 당연히 좋겠지만,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노르웨이'가 아닌 인간에 대한 착취와 차별, 그리고 이윤추구가 완전히 없어진 신사회를 상정해야 할 것이다. - 박노자, <나는 복지국가에 산다> 총론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재원이다. 책에서는 노르웨이가 지닌 복지국가를 위한 재원 마련 방식으로 크게 두 가지가 꼽힌다. 첫째는 북해 유전 개발을 통해 마련한 7300억 달러의 국가석유기금이고, 둘째는 총국민생산(GNP)에서 43%를 차지하는 세수다. 두 가지 모두 한국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한국에서 유전 개발이 가능할 리도 없고, GNP에서 세수가 차지하는 비율도 26%에 그친다.

더불어 노르웨이는 노동당이 1928년에 집권했을 정도로 정치적으로도 복지정책을 강하게 펼칠 수 있을만한 여건이 마련돼 있었다. 앞서 언급된 대로, 정당을 통한 정치참여나 노조조직율도 우리 사회와는 비할 바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노르웨이를 답습하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노르웨이처럼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글쓴이들이 두루 지적한 것처럼, 노르웨이 역시 인종차별이나 관료화 등 제반문제를 안고 있다. 즉 복지국가 노르웨이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때문에 책은 노르웨이가 지닌 양면을 참고틀로 삼는 일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우선 우리 사회가 복지국가가 무엇인지, 복지국가가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되짚어보자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 역시 복지국가를 만들어갈 까닭과 방향을 분명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복지국가를 향한 발걸음 역시 그 지점에서 더 나아갈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나는 복지국가에 산다>, 박노자 기획, 김건·백명정·이경예·정의성·조주형·최경수 씀, 꾸리에 펴냄, 2013년 10월, 1만 6천원.



나는 복지국가에 산다 - 노르웨이의 한국인들이 말하는

박노자 외 지음, 꾸리에(2013)


태그:#서평, #복지국가, #<나는 복지국가에 산다>, #노르웨이, #박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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