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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사람의 자살을 처음으로 경험한 것은 내 나이 스무 살 때였다. 현충일 휴일의 나른한 초여름이었다. 기숙사에서 늦잠을 자고 있었다. 인터폰이 울렸다. 3층에 있는 학과 동기였다.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은균아, 래전이 형이 분신했어."

민족민주열사 박래전(1964~1988) 형. 그는 내가 다니던 대학의 인문대학 학생회장이었다. 내가 속해 있던 국문과 4학년 선배이기도 했다. 래전 형은 내가 기거하던 기숙사 방의 방장 형과도 흉허물 없이 지냈다. 방에서 함께 라면을 끓여 먹기도 했다. 형은 오랫동안 밀린 옷가지를 기숙사로 가져와 빨래를 해 가기도 했다.

그런 형이 학생회관 옥상에서 분신을 했다. 라면을 끓여 내오던 내게 '미안하다, 고맙다'며 수줍은 미소를 짓던 그 여리고 순한 형이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다. 무섭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형이 외친 건 단 세 마디였다.

"광주는 살아 있다.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군사파쇼 타도하자."

대학에 입학한 지 고작 4개월째였다. 역사와 정치는 스무 살의 내겐 아직 너무 거창한 주제였다. 그런데 고작(?) 스물 다섯의 나이에 래전 형은 기꺼이 그 역사의 제단 앞에서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나는 무섭고 두려웠다. 형의 직계 후배인 우리에게는 '시신 사수대'라는 중대한 임무가 부여되었다. 정치적인 파문이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고 시신을 탈취해 가려는 경찰의 기습이 공공연히 일어나던 시대였다. 그런 경찰을 막아내야 하는 우리 손엔 고작 쇠파이프 하나가 쥐여졌을 뿐이다.

장례식을 치를 때까지 내내 가슴이 떨렸다. 짙은 의문과 회한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살밖에 길이 없었을까. 형을 위해 해야 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또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고 해야 하는 일은? 그런 생각 속에서 세상을 향한 분노가 치솟았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나는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의 목록을 줄이기까지 했다. 두려워서였다. 형을 죽게 한 사회가, 알지 못할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 무서워서였다.

수많은 우리가 모두 '자살생존자'였다

<자살론> 표지
 <자살론> 표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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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론>은 '한국에서의 자살'과 '고통과 해석의 역사'를 다룬다. 그 역사는 저자가 '자살의 근대'로 표현한, 오늘날에 그대로 연결된 근과거다. 저자에 따르면, '자살의 근대'는 주체성과 사회적 문제상황의 변화뿐만 아니라 통치성과 자살에 대한 문화적 의미화의 변화를 통해 주어진다.

흔히 자살은 실패한 '개인'의 문제로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일반적인 시각을 버리고 자살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살피는 데 초점을 맞춘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자살의 근대'에 대해 문화론과 문화사적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이 책에서 독특하게 사용되는 개념이 하나 있다. '자살생존자'다. 자살 시도로부터 생존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전 세계 자살 1등 국가의 국민답게 주변에서 자살자의 유족이나 친구, 동료를 발견하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이렇게 주변의 자살자 때문에 충격을 받거나 트라우마를 받게 된, 자살자의 유족·친지 등을 가리키는 개념이 자살생존자다.

2000년대의 자살률은 십 년 사이에 두 배 이상 커졌다. 2001년 6911명(10만 명당 자살자 수 14.1명)이던 자살자는 2010년에 이르러 1만5566명(10만 명당 자살자 수 31.2명)으로 늘어났다. 저자의 말처럼 자살은 '흔한' 사건이 돼버렸다. 자살생존자는 그렇게 '흔한' 자살자로 인해 극심한 심리적 문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래전 형의 죽음으로 나는 한동안 무력감에 빠졌다. 전형적인 자살생존자의 모습이다. 그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래전 형의 동기와 선·후배(그들은 모두 나의 동기이자 선·후배였다), 그리고 래전 형과 동시대를 살았던 또 다른 수많은 '우리'가 모두 자살생존자였다.

자살생존자 수는 자살자가 유명인일 경우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파급력도 커진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그 극명한 사례다. 저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만큼 그 이유와 후과가 정치적인 자살은 없다고 단언한다. 저자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그 죽음의 원인을 제공한 자들이 '노무현의 유령'과 싸우느라 온 힘을 다해야 할 어떤 것이다.

홀로 삼년상을 치르기 위해 검은 양복만 입었다는 김어준씨가 잘 보여주는 것처럼,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애도감정 또는 죄책감은 이명박정권에 대한 증오와 곧장 연결된다. (중략) 이 사회적 양가감정은 때로 왜곡된 진보 대 보수의 대결로 번역되기도 해서 문제인데, 이는 만연한 자살(자)에 대한 오늘날 우리 한국인의 감정 중에서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는 집단무의식이다. 그리하여 2012년 대선이나 2013년의 NLL 소동에서 보는 것처럼, 그 죽음의 '원인'을 제공한 간교한 자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같이 그 죽음의 후과에서 여전히 허우적거려야 한다.(32쪽)

오늘날 자살은 사회학과 심리학, 정신의학의 주요 문제 대상 중 하나로 광범위하게 다뤄지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근대 이래로 '자연과학'으로 무장한 정신의학은 자살충동과 행위를 '개인'에게 일어나는 '병'으로 간주했다. '자살의 근대'의 과학적 차원이다. 근대의 자살 인식은 처음부터 의학 담론에 의해 구성됐으며, 자살을 '의료화'했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의학 담론으로서의 자살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원용되는 것이 '우울증'이다. 실제 우리는 자살자에 관한 담론(가령 언론 보도)에서 거의 예외 없이 "자살자가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라는 상투적인 진술을 들을 때가 많다. 과거 배우 최진실씨나 이은주씨의 죽음을 전하던 언론 보도들도 그 우울증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저자 역시 우울증을 자살이라는 사회 현상에 관한 한 가장 강력하고 거부하기 어려운 표상이자 '과학적' 패러다임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저자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우울증 패러다임'은 '원인의 원인'을 말하는 데 매우 무능하다는 것.

당연한 말이지 않은가. 이런 질문을 상기해 보라. 그 사람은 왜 자신을 자살에 이르게 한 그 우울증에 걸리게 됐을까. 결국 '우울증 패러다임'은 자살의 '진짜 원인'을 은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저자가 우울증이 때로 그 의미를 지나치게 확장하고 있다면서 '만유 우울증론'을 경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명예자살'이라는 이데올로기

총론 격에 해당하는 1장을 넘어서면 '자살의 근대'의 본격적인 통사가 모두 6개 장에 걸쳐 서술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2장과 7장이다. 2장은 조선시대 사람들의 '마음의 봉건'에 기대고 있는 근대 이전의 자살을 다룬다. 7장은 근대국가와 사회가 자살 문제에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살피고 있는 부분이다.

'마음의 봉건'은 '뼛속까지 봉건'으로 바꿔 부를 수 있을 테다. 저자가 드는 예를 몇 가지 살펴보자. 갑신정변의 주역 중 하나였던 홍영식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과 달리 일본으로 도피하지 못해 대역죄인으로 처형을 당한다. 그 와중에 그의 아버지 홍순목(대원군 집권 시절 영의정을 지냄)은 어린 손자를 독살한 후 자살했다. 홍영식의 부인도 자결했다. 자살은 홍씨 집안의 씨를 말렸다.

처참한 죽음의 행렬은 홍씨 집안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박영효의 아버지 박원양은 열 살 된 어린 아들을 죽이고 자살했다. 서재필의 아내와 아버지도 연이어 목숨을 끊었다. 저자는 이러한 끔찍한 연쇄 동반자살이 조선식 공포정치와 봉건적 법체계가 지닌 잔인성을 보여준다고 분석한다. 동시에 이들 죽음에는 '마음의 봉건'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 있다. 스스로 '연좌'의 그물에 몸을 내던져 죽음을 맞이하는 봉건적인 사고 방식의 결과라는 말이다.

이 책에서 만나는 '마음의 봉건'의 가장 극적인 사례는 정조 임금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계몽 군주로 알려진 정조는 실상 '뼛속까지 봉건'의 실천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저자가 바라본 정조는 철두철미한 '조선 남자'였다.

그는 남성에게 성폭행(책에서는 '순결'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바꾸었다-기자)을 당한 여성이 자살하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강간을 당한 것은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할 일인데, 단지 강간을 당할 뻔했지만 목숨을 끊었기에 '열 배나 훌륭하다'며, 가까스로 강간을 모면한 뒤 자결해버린 충청도 면천의 한 여성을 '칭찬'한 일까지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시대는 여성들의 절개와 정절을 매우 강조했다. 저자에 따르면, 이런 분위기는 조선후기 사회로 오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일종의 도그마가 돼버린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의 폐해 때문이었다. 조선후기의 많은 여성이 '열녀'라는 이름으로 '공식적인'(?) 자살자 대우를 받았다.

그녀들의 자살은 심지어 권장되기까지 했다. '열녀'들이 남긴 유서는 엘리트 남성들이나 가문의 명예를 높이고자 한 후손들에 의해 그 행장기와 함께 책으로 묶임으로써 보존되기도 했다. 저자는 그녀들의 죽음이 성리학적 젠더 윤리의 진정성을 증명하고 '모범'이자 살아 있는 '증거'였다고 본다.

'미망인(未亡人)'이라는 말이 있다. 아직 따라 죽지 못한 사람이란 뜻으로, 남편이 죽고 홀로 남은 부인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이 단어의 한자를 눈여겨 보라. '아직 미(未), 죽을 망(亡)'의 '미망'이다. 죽어야 하는데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 말이 되는가. 그렇다. '미망인'이란 말은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어야 했던 조선시대 봉건 여성들의 질곡을 그대로 담고 있는 '살벌한' 말이다.

그나저나 그 여자들은 왜 '아직' 죽지 않은 것인가. 이유를 보면 더 기가 막힌다. 저자는 '미망인'들이 죽은 남성(남편)의 부모에 대한 효와 집안의 대를 이을 자식 키우기라는 막중한 의무 앞에서 잠시 죽음을 미뤄둔 '집행유예'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비유한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여성들에게 '삶'이나 '사랑'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일부러라도 '미망인'이라는 이름을 삼가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사대부 여성들에게나 해당되었던 그런 '명예자살'이, 조선 후기의 끝자락으로 오면서 평민층에까지 널리 퍼지면서 하나의 이데올로기처럼 작용했다는 점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한국인이 (남성이 아니라) 유독 여성의 '정절'과 '순결'을 강요하는 집단무의식에 빠져 있다. 이러한 집단무의식도 국가가 죽음을 '권장'한 것처럼 보이는 열녀 제도(?)와 같은 역사적 배경의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무반응'이야말로 죽음의 가장 유력한 원인

서울 대한문에서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정문 앞으로 옮겨온 쌍용차 희생자 분향소는 이제 사측의 성의있는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 영정으로 다시 돌아온 평택 공장 서울 대한문에서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정문 앞으로 옮겨온 쌍용차 희생자 분향소는 이제 사측의 성의있는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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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자살이 '내 탓'이나 '내 가족의 탓'이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에게 자살은 말 그대로의 사회 현상이자, 우리 삶과 사회의 한계 자체를 보여주는 일상적이고 '만연한' 사건이다. 한국사회의 모든 모순, 곧 한국 자본주의의 한계뿐 아니라 인권·교육 및 노동의 상황, 그리고 한국식 가족주의와 효 윤리의 허상, 한국식 가부장제와 젠더 상황의 모순을 폭로하는 기초적인 '팩트'들이 바로 자살 사건들이다.

몇 개의 징후적인 사건들이 떠오른다다. 앞서도 언급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한국정치의 지리멸렬한 현재와 불길한 미래를 표상한다. 나는 죽은 대통령을 무덤에서 불러내 모욕하는 '막장 정치'의 끝을 상상하기가 두렵다. 막장 정치가 정치 혐오를 가져오고, 그런 정치 혐오가 정치·사회적인 기득권 세력의 입지만을 강화하는 악순환 때문이다.

지난 7월, 일대 파문을 일으켰던 남성연대 성재기씨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그의 죽음이 인터넷을 통해 예고되고 실시간으로 중개됐(다시피 했)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그의 죽음은 외설적이고 부박한 대중문화의 현상 자체로서 소비되었다. '삶/죽음'이 돈과 미디어에 완전히 둘러싸인 현실에서, 자살이 미디어에 의해 발설되고 해석되고 또 교육되는 수준을 넘어 미디어를 '매개로' 기획되고 중재되는 사례가 된 것이다.

또 다른 한편에는 그 죽음에 우리 사회가 '무반응'으로 대응(?)하는 노동자(들!)의 자살이 있다. 저자는 잇단 노동자들의 자살이 다뤄지는 '문화'를 파헤친다. 쌍용자 노동자와 가족 들의 죽음도 무려 스물 몇 사람이나 되었기 때문에 겨우 정치적 쟁점이 되었다. 저자는 이런 '무반응'을 언급하면서, 그런 '무반응'이야말로 잇단 죽음의 가장 유력한 사회적 원인이며 결과라고 말한다. 오늘날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죽음 문화의 가장 선명한 한 형식이라고 규정한다.

신자유주의적 속물지배가 정치 그 자체가 되고, '자기계발'하는 경영(학)적 사유가 주체성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 되고, '인간 됨'이 호모이코노미쿠스 외의 다른 가능성을 갖지 못하는 상태가 선연하다. (중략) 이 과정에서 죽음은··· 더 멀리 추방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추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만연한 죽음들 속에서 살고 있지만, 멈출 단 한 시간의 마음의 여유도 도무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어딘가에 달라붙어 기생하고, 웅크리고 있다. 트라우마처럼, 암처럼. 그러다가 우리는, 바우만이 말한 것처럼 죽지(die) 않고 죽음을 당한다(killed). (332, 333쪽)

그 '만연한 죽음들' 때문일까. 한국은 수년째 자살률 1위 국가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2012년 한 해 자살자는 1만4779명이었다. 하루 평균 40여 명 꼴이다. 오늘도 어디에서 마흔 개의 목숨이 세상을 하직할까. 암담한 세상이다.

덧붙이는 글 | * <자살론> (천정환 지음 | 문학동네 | 2013. 11. 18 | 373쪽 | 14,000원)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을 예정입니다.



자살론 - 고통과 해석 사이에서

천정환 지음, 문학동네(2013)


태그:#<자살론>, #천정환,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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