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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원숭이 그림자>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작품 무대는 '피스'라고 하는 숲이며, 부정선거로 당선된 숲통령 먹바위 딸과 평화를 염원하는 숲민들의 한 판 대결이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숲을 무대로 한 우화소설이지만, 지금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이자 저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연재를 무사히 끝낼 수 있도록 독자 여러분의 아낌없는 격려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필자말

남일당, 거기에 사람이 있었다!
▲ <용산참사 5주기 추모기간> 남일당, 거기에 사람이 있었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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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든 숲민이든 밟을 땐 확실하게...

매미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거칠게 살아온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았다. 십년을 기다려 성충이 되었지만 사랑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매미가 훨씬 더 많았다. 수컷매미는 자신이 그들에 비해 무척이나 운이 좋은 매미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발이 빠른 이들 몇이 안개를 헤치며 숲 요소요소로 이동했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걸음들이었다. 움직임이 하도 빠르고 은밀하여 그들을 수상하거나 이상하게 여기는 이는 없었다. 각자의 위치에 도착한 그들은 숲민들의 움직임을 살피며 자신들이 나서야 할 때를 준비하고 기다렸다.   

당황한 숲경찰과 숲얼단이 안개 속을 더듬어 보지만 누가 울고 있는지 찾아 낼 길은 없었다. 먹바위 궁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대체 숲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먹바위 딸이 숲장관들을 모아놓고 소리쳤다.

"안개가 숲을 장악하고 있는 터라 소관들로서도 어쩔 도리가……."

궁정장관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래도 그렇지. 숲경찰과 숲얼단은 뭘 하고 있기에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건지 말들 해봐."
"숲얼단이 울고 있는 놈들을 파악하고 있으니 안개만 걷히면 곧 검거 조치하겠습니다."

늑대가 나섰다.

"이봐, 늑대!"

먹바위 딸이 숲얼단 단장을 불렀다.

"예, 각하. 하명하십시오!"

늑대가 허리를 깊게 숙였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고 하는데, 왜 꿈틀대는지 알아?"

먹바위 딸이 물었다.

"저…그게……."

늑대가 허리를 숙인 채로 머리를 긁적였다.

"확실하게 안 밟아서 그런 거야. 지렁이를 밟을 때 죽을 정도로 확 밟아 비틀면 꿈틀댈 시간도 없이 죽어 버려. 지금 울고 있는 저놈들도 마찬가지야. '꽃바람 1호'가 제대로 작동되었으면 겁을 먹어서라도 감히 울 생각을 했겠어? 그러지 못했으니 마음 놓고 울고 있는 거 아냐. 이 먹바위 딸이 만든 '꽃바람 1호' 정도는 우습다 이거거든."
"송구합니다. 각하."

늑대의 등과 얼굴에 식은땀이 배기 시작했다.

"송구하다? 저놈들이 날 우습게 보는데 그저 송구하다?"

먹바위 딸이 안개로 덮인 숲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 송구하옵니다."
"호호, 정말 송구한 일이로군. 그럼 지금부터라도 저놈들을 죽도록 밟아봐. 알겠어? 자신 없으면 단장 자리를 내놓던가."

먹바위 딸이 딛고 있던 발에 힘을 주며 말했다. 먹바위 딸의 발을 바라보던 늑대가 허리를 더 숙이며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각하의 분부대로 놈들을 확실하게 밟아 놓겠습니다!" 

늑대의 음성엔 비장감이 배어있었다. 먹바위 궁을 나온 늑대는 피스 전역에 있는 숲얼단과 숲경찰에게 지시했다.

"숲통령 각하의 명이시다. 우는 놈들을 지금 당장 처분하도록! 다시 한 번 반복한다. 우는 놈들은 적발 즉시 처분한다!" 

늑대가 명을 내렸지만 명은 먹히지 않았다. 숲민들의 울음 소리는 더욱 커졌으며 그것은 마치 환청인 듯 늑대의 귓전을 어지럽혔다.

'꽃바람 1호'는 숲민들의 씨를 말리려는 음모

그때 숲 어디선가 단단하면서도 호소력 짙은 외침이 들려왔다. 

"숲민 여러분, 아직도 살아갈 힘이 남아 있습니까? 울지 않고도 목숨이 붙어 있으며 울지 않고도 살아갈 자신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주변에 있는 숲경찰과 숲얼단 놈들을 해치우고 먹바위 궁으로 갑시다! 그놈들은 먹바위 딸의 개들이자 우리의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들 입니다. 그들을 죽이고 먹바위 궁을 향해 나아갑시다!"

발이 빠른 사내가 소리쳤다. 숲민들은 안개 속이라 누가 어디에서 외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소리는 숲민은 물론이고 늑대와 숲경찰과 숲얼단의 귀에도 들렸다. 그 외침에 열기로 달아오르던 숲이 일순 고요해졌다. 사랑은 끝낸 수컷매미도 숨죽이며 숲을 응시했다. 늑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울기 위해 태어난 우리가 왜 울지 말아야 합니까. 울어야 사는 우리가 왜 우는 죄로 죽임을 당해야 합니까. 울지 못하면 우리는 현재도 미래도 없습니다. 울지 못하면 우리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먹바위 딸이'꽃바람 1호'를 공표한건 우리를 울지 못하게 하여 결국엔 우리의 씨를 말리려고 하는 음모이며, 부정선거로 숲통령이 된 자신의 죄악을 덮으려는 얄팍한 술책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모두 죽었을 때 이 숲은 저들의 숲이 될 것이고 끝내는 친원파들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수천 년 지켜온 우리의 숲을 저들에게 넘겨주어야 하겠습니까? 이 숲을 우리의 철천지 원수이자 피스의 평화를 파괴한 친원파에게 넘겨주어야 하겠습니까? 지금 당장 먹바위 딸의 음모를 막아야 합니다. 우리의 씨를 말리려는 먹바위 딸은 숲통령의 자격이 없습니다. 피스 숲민의 이름으로 먹바위 딸을 숲통령 자리에서 끌어내야 합니다! 자, 모두 떨쳐 일어나 먹바위 궁으로 갑시다!"

반대편에서 발이 빠른 누군가가 또 외쳤다. 공감이 가는 이야기라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늑대의 얼굴엔 또 다시 식은땀이 맺혔다. 숲민들이 안개 속에서 말을 주고받았다.

"'꽃바람 1호'를 만든 목적이 우리의 씨를 말리려고 했다니, 정말 놀랍군."
"그렇거니 생각은 했지만 먹바위 딸 정말 무서운 년이로구먼."
"이 정도면 저들은 우릴 숲민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거잖아? 으휴, 무섭네."
누군가 치가 떨리는지 말까지 떨렸다.
"맞아, 울다 죽으나 울지 못해 죽으나 그게 그거잖아."
"그렇지. 먹바위 딸과 싸우다 죽으나 울지 못해 죽으나 매한가지라면 싸우다 죽는 게 백번 낫지. 암!"

말과 말들이 안개 속을 떠다녔다. 누구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이보시오들! 각자 근처에 있는 먹바위 딸의 개들을 잡아 죽이고 먹바위 궁으로 갑시다!"

발이 빠른 누군가가 또 소리쳤다. 그의 말이 있자 여기저기에서 맞장구를 쳤다.

"그럽시다! 우리의 힘으로 먹바위 딸을 끌어내립시다!"

숲민들은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들고 숲경찰과 숲얼단을 찾아 나섰다. 숲민들은 평소에 아는 사이든 아니든 어깨만 걸면 짝이 되었다. 하나였을 땐 두려웠으나 둘이 되니 더 이상 무서울 것도 없었다. 여기저기에서 숲얼단을 찾았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숲얼단의 비명이 안개 속으로 퍼졌다. 수컷매미도 암컷과 함께 나섰다.

"우리도 갑시다. 곧 죽을 몸 먹바위 궁 구경은 하고 죽어야지요."

둘은 숲을 천천히 날며 숲경찰과 숲얼단이 있을만한 곳을 뒤졌다. 겁을 먹은 숲얼단과 숲경찰은 옷을 벗어 던지곤 줄행랑을 쳤다. 안개로 힘을 잃은 자들이 안개의 도움을 받으며 도망치고 있었다. 안개 속으로 달아나는 자들의 걸음은 다급해 보였지만 빨리 나아가지 못했다. 어떤 숲얼단은 숲민인 척 행동하며 어깨를 걸었다가 들통이 나 그 자리에서 맞아 죽기도 했다.

박쥐와 교대했던 까치는 난추니들에게 잡혀 현장에서 즉사했고, 나무 등걸에서 자고 있던 박쥐는 놀라 도망치다 늑대거미가 쳐놓은 거미줄에 감겨 죽었다. 숨이 끊어지면서 박쥐는 먹바위 딸의 개로 사느니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중얼거렸다.

물푸레나무에 숨어있던 숲경찰은 매미도 아는 자였다. 숲경찰은 수컷매미에게 살려달라고 두 손을 싹싹 빌었다. 수컷매미는 살려달라며 비는 숲경찰을 살려주지 않았다. 수컷매미는 숲경찰 둘을 더 죽이고는 먹바위 궁으로 향했다.

"곧 바람이 분다, 어서 떠나라."

흥분한 숲민들이 먹바위 궁으로 몰려갈 때 산비둘기는 피스 동쪽으로 향했다. 현장을 떠난 산비둘기는 잠시 후 느릅나무 후손이 살고 있는 마당에 내려앉았다. 숲 옆으로는 열사들의 무덤이 있고 무덤 앞으로는 동쪽 강이 푸르게 흐르고 있었다. 느릅나무 후손은 안개로 덮인 느릅나무 숲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엔가 잠겨 있었다.
  
"선생님, 다녀왔습니다."
"그래, 숲은 어떠하더냐."

느릅나무 후손의 시선이 열사들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옮겨졌다. 열사들의 무덤은 원숭이 강점 때부터 시궁쥐가 숲통령을 할 때까지 피스의 독립과 평화를 위해 싸우다 죽은 이들의 넋이 묻혀 있는 곳으로 숲민들에겐 성역과도 같았다. 느릅나무 후손은 안개 덮인 무덤을 바라보며 오늘은 아버님께서 포근하시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숲민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랬구나."
"울지 못하면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며 먹바위 궁으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울지 말라는 건 죽으라는 말과 같을 것이니……."

느릅나무 후손은 이어지는 말을 아꼈다.

"'꽃바람 1호'가 숲민들의 씨를 말리기 위한 음모라며 숲민들이 먹바위 딸의 하야를 외치고 있습니다."
"저 안개가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을 것인데 걱정이구나…….."

느릅나무 후손이 열사들의 무덤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숲이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자유와 평화를 위한 걸음도 힘찹니다. 숲민들은 부정선거를 지휘한 막바위 딸을 숲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 생각엔, 이 기회에 선거무효를 선언하여 숲민들의 가열 찬 투쟁에 힘을 보태주시는 게 어떨지……."  

산비둘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뜨거워진 숲이야 찬물 한 바가지면 식어 버린다. 내가 선거무효를 선언하여 불난 숲에 기름을 부었다 하자 그 불이 저 안개보다 오래 가겠느냐? 나는 그리 보지 않는다." 
"선생님, 숲민들은 지금 선생님께서 나서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나 하나 죽는 것이야 서럽지 않으나 저들의 억울한 죽음은 누가 감당하겠느냐. 가서 전해라. 안개가 곧 떠날 것이니 분노하는 마음 가라앉히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그게 사는 길이라 전해라."

느릅나무 후손이 바람이 불어오는 동쪽 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님, 지금이 먹바위 딸과 친원파들을 몰아낼 절호의 기회가 아닙니까."
"안개만 걷히면 저들은 숲민들을 다 도륙 낼 것이다. 벌써 바람이 불어오는구나. 어서 떠나라."

느릅나무 후손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느릅나무 후손이 그렇게 말했지만 산비둘기는 먼 강에서 새로운 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강기희 기자는 소설가로 활동중이며 저서로는 장편소설 <은옥이 1.2>, <개 같은 인생들>, <도둑고양이>, <동강에는 쉬리가 있다>, <연산> 등이 있으며, 청소년 역사테마소설 <벌레들> 공저로 참여했습니다.



태그:#박정희, #박근혜, #긴급조치, #국정원,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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