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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강추위에 얼어붙었던 창문이 모처럼 따듯한 햇볕에 녹아 열린 틈을 타 부랴부랴 청소기를 돌리던 참이었다. 창가에 심어놓고 매일 정성껏 물을 주고 지지대까지 해주었던 토마토 대가 눈앞에서 힘없이 픽 쓰러졌다. 한 겨울 거실에서 주인의 정성을 먹으며 초록 잎과 붉은 꽃을 자랑하던 제라늄도 언제 그랬냐는 듯 도미노처럼 제 색을 잃는 게 눈에 보였다.

 

말로만 듣던 '냉해'였다. 딱 5분, 햇볕 좋은 한낮 딱 5분 열어놓은 창문에 몇 달을 정성 들여 키운 식물들이 시드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맞다, 여기는 미국에서도 가장 추운 곳, 노스다코타(North Dakota)지.

 

어쩐지 연초부터 카카오톡과 페이스북을 통해 안부를 물어오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춥다며?' '지낼 만은 해?' '얼어죽은 건 아니지?'

 

추운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새해 인사만 하기 어정쩡해 그냥 묻나보다 했는데… 한 순간 나의 토마토가 얼어 죽는 사건에 악명 높은 추위를 실감하기 시작했다. 미국 어떤 곳은 남극보다 화성보다 더 추웠다는 뉴스를 되새기며.

 

 

몬태나주 북동부 커머타운의 체감온도 영하 59도

 

코엔 형제(Coen brothers)의 영화 <파고>를 보면 주인공인 경찰서장 마지를 비롯해 모든 배우들이 양손으로 눈보라를 막으며 힘겹게 흰 눈 위를 걷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개봉 당시 신촌의 어느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이들의 과장된 액션이 걷잡을 수 없는 운명을 상징하는 우스꽝스런 메타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의 무대가 된 그 도시에서 두어 번의 겨울을 보내며 드는 생각은, 영화 <파고>는 매우 사실적이고 섬세한 영화였다는 것이다. 문 밖을 나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시골 경찰 서장 마지처럼 두 손을 들어 눈보라를 막고 있는 나를 본다. 언덕 하나 없는 대평원에서 거칠게 몰아치는 눈보라에 대처하는 자연스런 자세다.

 

올 초 하와이를 제외한 미 전역을 영하권으로 만든 추위의 정점은 몬태나 주 북동부 커머타운으로, 그곳의 체감온도는 영하 59도였다. 낮은 기온에 바람까지 거세게 불 때 나타날 수 있는 기온이라고. 요즘 분위기면 올 겨울 동안 노스다코타에서도 경험할 수 있을 온도 같다. 미국 국립 기상국은 이런 날씨에 외출은 생명에 위협을 가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런 위협은 나도 요즘 수시로 겪고 있는 공포다.

 

먼저, 영하 30도에 차가 없다는 것은 매우 위협적인 일이다. 버스를 이용하는 나는 차 시간에 맞춰 정류장에 가는 것부터 치열한 머리싸움을 해야 한다. 집에서 정류장까지는 다섯 블록, 거리로는 약 200m 정도다. 버스는 매 시각 5분에서 10분, 35분에서 40분 사이에 온다. 집에서 나가 정류소까지 걸어가는 시각을 정확히 계산해 맞추지 않으면 꼼짝없이 정류장에 서 있어야 하는데, 그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생명의 위협이다.

 

감옥에서 탈옥한 죄수가 추위 때문에 '자수'

 

첫 눈이 온 날, 미끄러운 눈길을 계산하지 못하고 평소와 같이 집을 나섰다가 저 앞에서 버스가 지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날씨만 좋다면야 팟캐스트를 들으며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30분 정도쯤 기다리면 되지만, 요즘 같은 날씨엔 어불성설. 바로 집으로 턴 해 빠른 걸음으로 돌아와 몸을 녹였다. 그리고 시계를 주시하고 있다가 아까보다 정확히 1분 빨리 나왔는데, 그래서 기다리지 않고 버스에 올라 탈 수 있었다.

 

이 추위에 잠시라도 밖에서 어슬렁거리다가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켄터키 주에서 탈옥한 죄수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자수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버스에 오르면 나만큼 꽁꽁 싸맨 사람들이 이미 추위에 지쳐 녹초가 되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가난한 사람에게 추운 날씨가 전쟁인 건 한국이나 여기나 똑같다 싶다.

 

뒷마당에 있는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나 차고에 있는 물건들을 가지러 갈 때, 난 거의 우사인 볼트인 듯 전력 질주를 해야 한다. 밖에 있는 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초인적인 능력이다. 매번 쓰레기 봉투를 들고 현관문을 나가는 순간, 각오를 가뿐히 넘는 차가운 공기에 후회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시댁이 있는 강원도 횡성의 싸한 공기와는 차원이 다른, 뼈를 아리게 하는 추위다.

 

얼마 전 오하이오 주에 살던 할머니가 눈에 묻힌 차를 빼내다 숨졌다는 뉴스, 제설 작업 중이던 주민이 세 명이나 사망했다는 시카고 얘기가 진정 공감되는 요즘이다. 이웃 무어헤드(Moorhead)에서도 동사한 노숙자 뉴스가 전파를 타기도 했다. 주차장 한편에서 발견된 노숙자 건으로 인해 파고시 노숙자센터가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이처럼 어떤 경우라도 거리에 나와 있는 일은 목숨을 거는 일이다. 며칠 전엔 버스에서 내려 집에 돌아가는 길에 희귀한 부엉이가 날아가기에 장갑을 벗고 사진을 찍었다가 며칠간 손가락이 간지러운 동상 초기 단계를 경험하기도 했다. 방송에서 누누이 나왔던, 피부가 노출된 상태로 5분 이상 있지 말라는 경고를 잊은 탓이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경고음... 에너지난이 바꾼 일상

 

TV를 보다 보면 띠띠띠~ 하는 경고음이 시도 때도 없이 울린다. 눈 폭풍이 몰려오니 조심하라는 내용이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겨우 2주가 지났는데, 벌써 날씨로 인한 두 번의 전체 휴강과 한 번의 임의 휴강이 있었다. 한 학기 일곱 번 휴강했던 지난해 경우를 능가할 태세다. 영하 30도는 이제 익숙한 온도가 됐고, 한국 뉴스에도 추운 지방의 대명사로 종종 나오는 노스다코타 마이넛(Minot)은 -45도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이는 에너지 문제도 야기한다. 미국 전역이 폴라 보텍스(Polar Vortex: 캐나다 북부의 차가운 극 소용돌이)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올 연초부터, 에너지 소비 급증은 예상됐다. 제일 먼저 천연가스 부족 문제가 발생했다. 지난 25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Los Angeles Times)>는 앨라배마주 제프 헴스(Jeff Helms)의 말을 인용해, 농장주들이 닭들이 얼어 죽을까봐 걱정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23일과 24일, 난방을 하지 못해 학교 문을 닫은 테네시주의 필립 왈레스(Phillip Wallace) 교장도 연료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책정한 예산과 달리 프로판 가격이 37%나 올랐기 때문이다. 미 전역 약 600만 가구가 천연가스를 연료로 사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갑작스런 강추위로 재고가 지난해 대비 42%나 줄었기 때문이다.

 

오하이오 공공재 위원회(The Public Utilities Commission of Ohio : PUCO)는 다시 찾아온 두 번째 한파로 27일 밤부터 29일까지 에너지 소비가 급등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이에 따라 PUCO는 지난 27일 에너지 절약 관련 소비자 제안을 내놓았다.

 

- 스토브, 식기세척기, 빨래 건조기 등 전기 소비가 많은 제품은 에너지 사용이 적은 한 낮이나 밤 시간 이용

- 이른 아침 시간 천연가스 기구의 사용 제한

- 조명 등 필요치 않은 가전제품의 전원을 끔

- 차고의 문을 포함해서 가능한 모든 문과 창문을 꼭 닫기

- 사용하지 않은 방 봉쇄

- 낮엔 해가 비치는 남쪽 방향의 창과 커튼 블라인드를 열어놓고 밤에는 꼭 닫아 에너지 비축하기

 

우리에겐 당연하고 일상적인 이런 조치들이 절약이란 말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미국인들의 일상을 얼마나 바꿀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118년 만에 최저 기온을 기록한 뉴욕이나 103년 만에 얼었다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며 자연의 경이와 무서움, 그리고 관용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풍요와 낭비가 혼재하는 미국인의 삶이 기록적인 이 추위 앞에서 조금 겸손해지는 계기가 될 수 있길 바란다.


태그:#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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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부터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뉴욕 거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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