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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작년에 이사를 했다.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비디오 테이프' 하나가 나왔다. 이름도 없이 먼지에 뒤덮여 있었다. 엄마한테 이게 뭐냐고 물었다. 엄마는 이삿짐을 나르다 말고 뭐하냐고 했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래서 틀어 봤다. 안 쓴 지 오래된 비디오가 덜컹거리면서 영상이 나왔다. 영상 속 주인공은 아기. 나는 아니었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동생이었다. 엄마가 저만치서 보시더니 말씀하셨다.

"OO 재활영상이네."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는 엄마한테 내가 들은 내 동생의 '출산'과 '재활'에 관한 이야기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1986년 8월 27일, 오전 10시경이었다. 이웃 할머니가 오셨다. 걱정을 하셨다. 새댁이 애를 낳을 때가 됐는데 아직 진통이 없다며 혀를 차셨다. 예정일이 1주일이 남았다고 말씀드렸지만, 할머니는 내 배를 보며 어루만지며 마음을 쓰셨다.

그렇게 집을 찾아 온 옆집 할머니와 몇 마디를 나눴다. 그런데 갑자기 아랫배에 신호가 왔다. 화장실로 향했다. 변기에 앉았다. 갑자기 밑으로 뭔가가 쑥 빠져나왔다. 할머니는 뭔가가 먼저 나오는 모습에 크게 놀라셨다. 나는 큰아이 천기저귀로 아이가 나오지 못하게 막았다.

"할머니! 할머니! 뭔가가 빠지네요."

급히 병원에 갈 준비를 했다. 119를 불렀다. 일하는 남편에게 다급하게 연락을 취했다. 배가 아려왔다. 구급차를 기다리다 못해 길 가던 택시를 잡았다. 갑자기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불안함이 엄습했다. 할머니에게 뭔가 잘못된 거 같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태어나자마자 병원에 있어야만 했던 둘째는 백일 사진과 돌 사진이 없다.
▲ 둘째의 해맑은 모습 태어나자마자 병원에 있어야만 했던 둘째는 백일 사진과 돌 사진이 없다.
ⓒ 정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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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성마비' 판정... 물이 차서 못 고친다고 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오전 11경에 들어간 수술실에서 오후 4시에서야 의식이 돌아왔다. 그 사이 친정 당숙모가 와계셨다. 당숙모는 정신을 막 차린 나에게 말했다. 큰일 날 뻔했다고, 죽다 살아 난 거라고 당숙모는 흐느꼈다. 난 물었다. 아이가 어떻게 됐냐고 여쭸다. 당숙모가 주저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전치태반'이었대. 죽다 살아난겨."

'전치태반', 나중에서야 알았다. 전치태반은 임산부가 갑자기 통증 없이 아이를 낳는 경우를 말한다고 했다. 혈관이 터져 조산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나는 그날 아침 화장실에서 자궁이 열린 것이라고 했다. 아무런 통증도 없이, 아픔도 없이 갑자기 아이가 나온 거라고 했다.

그리고 의사가 말했다. 내 아이가 태어날 때 머리에 물이 가득한 채로 나왔다고 했다. '뇌성마비'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만이 다가 아니었다. 고칠 수가 없다고 했다. 의사는 앞으로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얼마나 오래 살지, 어떻게 될지, 어떤 장애를 가지게 될지 아무것도 말해 줄 수 없다고 했다. 현재 국내 의료 기술로 뇌성마비를 전문적으로 치료할 수 없다고 했다. 의료기술이 없다는 말만 했다. 그래서 못 고친다고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내 아이는 유리벽 넘어, 작은 투명유리상자 속에 있었다. '인큐베이터'. 내 아이에게는 수많은 기계가 달려 있었다. 엄지손가락 굵기만한 튜브가 내 아이 몸에 여러 개 꽂혀 있었다. 연신 유리벽을 두들겼다. 간호사가 손짓했다. 두드리지 말라고 했다. 새근새근 자고 있는 다른 아이들. 결국 난 내 아이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태어날 때만 속 썩였지 둘째는 지금까지 언제나 온순하고 착했다.
▲ 언제나 감사하고 고마운 아이 태어날 때만 속 썩였지 둘째는 지금까지 언제나 온순하고 착했다.
ⓒ 정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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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포기한 순간에서 '희망'을

울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난 울고 또 울었다. 신(神)을 원망했다. 하느님이 원망스러웠다. 왜 이런 일이 나한테 있는지 묻고 또 물었다.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래도 물었다. 묻고 또 물었다. 모든 게 다 내 잘못인 것만 같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살아있는 매 순간이 원망스럽고 죄스러웠다.

그렇게 몇 주를 병원에 있다가 퇴원했다. 아이를 인큐베이터에 놔둔 채 나만 퇴원했다. 태어난 지 한 달이 지날 때까지 아이는 호전되지 않았다. 뇌성마비 아이를 낳았다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난 그 당시에 이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쉬쉬했다. 출산을 축하해주러 많은 사람들이 왔지만, 난 전혀 기쁘지 않았다. 난 두려웠다. 삶의 무게가 감당이 안 됐다. 그래서 이사를 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야반도주하듯 집을 옮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삶은 무기력해져만 갔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의미 없는 삶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TV를 봤다. KBS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가 나왔다. 방송은 끝이나가고 있었다. 채널을 돌리려고 TV에 다가섰다. 그런데 그 때, 화면 밑으로 자막이 한줄 지나갔다.

'뇌성마비 조기 치료기술…독일에서 온 00박사 내한…안내전화 …… 7XX-1XX6'

눈이 번쩍 뜨였다. 곧 바로 전화 번호를 눌렀다. 안내원이 전화를 받았다. 상담했다. '뇌성마비 임상실험' 대상자를 뽑는다는 것이었다. 연락처를 건넸다.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희망을 가지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렇게 내 아이는 '국내 1호' 임상실험 대상자가 됐다. 독일의 선진 의료기술을 적용하는 첫 번째 케이스가 됐다.

벗겼다. 의사들이 내 아이를 발가벗겼다. 그렇게 의사들은 백일도 지나지 않은 내 아이를 입원 시켰다. 물리치료를 시작했다. 젊은 여의사가 치료하는 과정을 비디오로 촬영했다. 난 뒤에서 묵묵히 따르며 지켜봤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다. 11가지를 검사를 했다. 하지만 두 번째 검사결과도 '뇌성마비' 확진이었다.

그렇게 실험과 치료가 이뤄졌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처음엔 1주일에 한 번 병원을 갔다. 그러다 2주일에 한 번 병원을 갔다. 그렇게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 그리고 6개월에 한 번 병원에 가게 됐다. 나아질 거다, 아무렇지 않게 될 거라고 생각하며 치료에 임했다. 그리고 담당의사가 말해줬다.

"다 나았습니다. 이젠 안 오셔도 됩니다."

천운(天運)이라고 했다. 운이 좋았다고 했다. 독일의 선진의료기술이 아이를 살렸다고 했다. 조기에 치료를 받지 않았으면 평생 장애인으로 살았을 거라고 했다. 불가능해 보였던 6개월간의 치료는 그렇게 '기적'이 되었다.

그 아이는 지금껏 모른다. 28년 전의 자신이 겪었던 힘들었던 그 시절을... 많이 아팠던 아이. 하지만 어느덧 내 키를 훌쩍 넘겨 커 버린 내 아이. 그동안 미안한 마음에 말하지 못했다. 아이를 볼 때마다 고생 시켰다는 생각에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언젠간 말하려고 미루고 미뤄왔던 얘기를 이번 기회를 통해 말하고 싶다. 어깨를 두드리며 말해주고 싶다.

"장하다 내 아들, 견뎌줘서 고마워, 살아줘서 고마워."

덧붙이는 글 | 출산, 그 아름다운 이야기 공모



태그:#출산, 그 아름다운 이야기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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