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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만의 가뭄이라는 이곳 캘리포니아엔 지난 주말 단비가 내렸다. 2년치 가뭄을 단박에 해소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미친듯이 쏟아지는 장대비. 지진 대비를 위해 벽돌 대신 나무재질을 써서 세워진 집의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와 처마 밑 낙수 소리가 요란하기 그지없다.

이런 비가 흔치 않은 사막에 살고 있는 때문인지, 이렇게 장대비가 내리는 날이면 여지없이 서울의 광화문 풍경이 생각나곤한다. 직장이 있었던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변호사협회빌딩, 삿포로 우동집, 콩나물밥집, 전주집 그리고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몇시간을  떼우던 죽순이가 따로 없었던  맘 좋았던 지하 카페의 사장님 미쓰고언니, 그리고 친구들이 있었다.

사랑, 그거 참 뭔지 모르겠다. 적어도 나에겐.
 사랑, 그거 참 뭔지 모르겠다. 적어도 나에겐.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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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여 년 전 서울을 떠나던 해 봄엔 여름철 장마 같은 비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렸었다.심지어 선머슴 같은 단발머리를 어거지로 파마해서 면사포 쓰고 폴짝거리며 좋아했던 결혼식 날. 하객들은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보며 비가 내리니 엄청나게 잘 살거라며 한마디씩 거들었으니까.

엄동설한 추위에 얇은 검은색 바바리 코트에 실크 스카프까지 맨 어설픈 딴따라 같은 남친을 믿을 순 없으셨을 것이다. 대충 사귀다가 남자가 미국으로 가버리면 끝나겠거니 했던 일말의 희망을 가졌지만, 내가 우격다짐으로 미국 연주 여행을 밀어붙이고 미국가서는 서류상으로 결혼을 했다는 통보에 경악을 하셨다. 결국 맘 약한 엄마는 나의 혼수를 위해 동대문으로 남대문으로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내게 끌려다니셨다.

그렇게 부모님이 탐탁해하지 않은 결혼을 위해 피붙이보다 정겨운 친구들을 포함해 모두 내던지고 날라리 신랑을 따라 이역만리 나고 자란 땅을 벗어났다. 그로부터 10년 후 나는 국적까지 바꾸고 미시민권자가 되었다.

여느 부부가 그렇듯, 알콩달콩 살던 시절, 기저귀값이 없어 신용카드로 부식을 사고, 양념이 없고 김치가 없으면 없는 대로 버티던 시절이 지났다. 나나 아이들 아빠나 먹고살 만큼 벌게 되고 웬만큼 아이들이 커서 스스로 학교에 다니고 부모의 행동지침이 더이상 먹히지 않게 될 즈음에 남편과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살기 바쁘고 싸워도 도망칠 친정도 없는 시절엔 차마 못했었던 말들이 오가고, 며칠동안 눈길도 맞추지 않는 날들이 심심치 않게 이어지던 우리는 결국 결혼 25년 만에 각자의 길을 달리해야했다.

아이들과 달랑 셋이 남겨진 좁아 터진 셋집에서 밤마다 혼자 소주병을 기울이고 어느 때 부터인가 죽음을 간간히 생각할 즈음, 우연히 산을 다니기 시작하게 되었고 야생과 닮은 모습을 한 누군가를 또 만나게 되었다.

질리도록 긴 인연을 만나 끊기까지 힘들었던 때문인지, 이젠 이놈도 저놈도 거기서 거기라는데 생각에 신경이 꽂혀 있기도 하고, 뭔가 새로운 인생을 계획하고  행복을 도모하고 하는것은 더이상 거추장스럽다라는 느낌마저 든다.

'사랑엔 국경이 없다'라고 했던가? 나에겐 아니다, 난 막말로 국경을 넘어 국적까지 바꿨던 사랑을 했었지만 그놈의 사랑 때문에 잃은 게 너무 많다. 살을 떼어줄 수도 있을 만한 친구들, 살가운 동생들 그리고 목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그렁그렁하신 것이 눈에 선한 늙디 늙은 부모님.

병원에 한 번 모시고 가본 적도, 따뜻한 아침밥 한 번 지어드린 적도 없는 큰딸의 결혼이 이렇게 끝날 줄 뻔히 아셨으면서도 큰소리 한 번 내서 반대하지 않으셨던 내 부모님들의 미련한 사랑. 내 부모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국경없는 사랑을 하시는 반면, 난 바로 그 국경없는 사랑때문에 지독히도 외로운 밤을 빠짐없이 나곤한다.

덤으로, 이젠, 사랑 그놈…. 잘 못 믿겠다라는 의심병까지 얻었다.

사랑, 그거 참 뭔지 모르겠다. 적어도 나에겐.

덧붙이는 글 | 사랑이 뭐길래 응모글



태그:#국경, #사막, #캘리포니아, #시민권자,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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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깎이 세상구경과 집밥사이에서 아슬아슬 작두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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