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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호섭 국민대 시각디자인과 명예교수.
 윤호섭 국민대 시각디자인과 명예교수.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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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아이의 심장 뛰는 소리가 힘차게 들린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뱃속에서 웅크린 태아를 찍은 초음파 영상이다. 초음파 사진이 작아지면서 비로소 전체 모습이 드러난다. 방사능 고위험 지역과 핵폐기물에 붙이는 '방사능 마크' 속에서 아이가 움직이고 있다. 사진 속 아이는 꿈틀거리며 묻는 듯하다.

'엄마, 그때 정말 원자력발전밖에 대안이 없었나요?'

'국내 1호 그린 디자이너', 그리고 매주 일요일마다 티셔츠에 친환경 그림을 그려주는 '인사동 티셔츠 할아버지'로 알려진 윤호섭(71) 국민대 디자인대학원 명예교수의 작품이다.

방사능 표시 마크에 태아의 초음파 사진을 합성하고, 왼쪽에는 나라별 핵발전소 숫자를 넣어 포스터와 영상을 만들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이렇게 물어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마크 아래에 쓰인 문구가 보는 이에게 질문을 던진다.

3·11 후쿠시마 원전 사고 3주기를 앞둔 7일, 북한산 아래 있는 작업실에서 윤호섭 교수를 만났다. 미래 세대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는 작업실에서도 태양광 발전 장치를 통해 '최소한의 전기'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제자들에게 <나무를 심은 사람> 필사 시키는 이유  

윤호섭 국민대 시각디자인과 명예교수.
 윤호섭 국민대 시각디자인과 명예교수.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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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업실이 꽤 추운데 히터도 없고, 자가 발전을 해서 전기를 쓰시네요. 집에서도 냉장고를 사용하지 않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친환경도 좋지만 여러모로 불편하실 것 같은데요.
"전혀요. 제 생활이 불편해 보여요? 제가 추위를 잘 타는 편인데 옷 입고 지내다보니 그것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집에 있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 24시간 끊임없이 돌아가는 게 냉장고더라고요. '아, 저런 전기들을 쓰느라 원자력 발전소를 짓고 그러다 사고가 나는 거구나'. 그렇게 느낀 뒤로는 아내와 상의해 안 쓰고 있습니다. 처음엔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없이도 행복하게 잘 살아요. 자동차도 마찬가지고요. 

저는요, 사람들이 전기를 발생시키는 원자력 관련 지식은 있으면서 그게 나의 일상과 연결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습니다. 제가 냉장고를 없애고 나서 당장 아쉬운 게 차가운 물 한 컵이더라고요. 그런데 그거 먹자고 전기를 펑펑 쓰고, 원전을 지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실천하고, 이런 개인들이 모일 때 나은 세상이 될 거라고 봐요. 저희 대학원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첫 과제로 <나무를 심은 사람>을 필사시키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묵묵히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보여주거든요."

<나무를 심은 사람>의 원제는 '희망을 심고 행복을 가꾼 사람'. 어느 늙은 양치기가 매일 매일 나무를 심고 가꿔, 황무지였던 지역을 숲으로 바꾸는 이야기다. 윤 교수는 강연에서 만난 사람들이 필사본을 보내오면 그 사람은 물론 가족들도 입을 수 있도록 티셔츠 3,4장에 그림을 그려 보내준다고 한다. 책을 따라 쓰면서 내용을 깊이 음미했으면 좋겠다는 취지다. 그는 <오마이뉴스>의 독자들의 참여도 적극 환영한다고 밝혔다. (☞공식홈페이지 바로가기).  

- 지난 2월에는 환경단체 그린피스와 함께 '후쿠시마 증언자 투어'에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농부, 낙농업자 등 직접 후쿠시마 사고의 피해자들과 만나셨는데 어떤 것들을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후쿠시마현 안에 살았던, 혹은 살고 있는 피해자 다섯 명과 만나 증언을 들었습니다. 상황은 비참했습니다. 그 분들께서 '우리는 버려져 있다', '지금 우리는 내비게이션이 없는 배다'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특히 그 중 세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 한 분께서는, 흙을 밟고 뛰어놀던 아이들이 이제는 방사능 때문에 매일 방 안에만 있다며 '저는 제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고 호소하시는데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우리가 한 행위 때문에 다음 세대가 숲에서 놀지 못한다? 아이들이 밖에서 자연을 만날 수 없다는 걸 저는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내 책임이 아니다, 저 멀리 떨어진 일본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죠. 사실은 우리가 저지른 일이고, 우리 모두의 책임인 겁니다. 또 일본과 비슷한 징후들이 여기서도 일어나는데 한국은 원전 사고가 안 난다고 누가 장담합니까? 그렇다면 저는, 우리는 뭘 할 수 있을까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림을 그리고 포스터를 만들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그리고 의식주에서부터 환경 문제를 최소화하는 삶을 사는 겁니다. 단지 편하다고 해서 자원을 낭비하는 게 옳은 일은 아니잖아요."

"모든 생명체와의 공존 고민해야"

- 사람들도 환경 문제를 고민하긴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기가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좀 더 쉬운 방법은 없을까요? 
"저는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때 미리 반찬을 조금만 달라고 말합니다. 남기는 것도 쓰레기가 될 수 있으니까요. 또 한겨울에는 북쪽 베란다를 냉장고 대신해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에요. 아니면 최소한 여름에 전력 피크 때만이라도 한 5분 정도 냉장고 코드를 뽑아놓는 건 어떨까요. 그렇게 해도 냉장고 안 냉기는 계속 남아있거든요. 절약도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습니다. 각 개인이 5분, 10분씩만 코드를 뽑아 전기를 절약해도 그 양이 엄청날 겁니다.

밀양 송전탑 문제도 결국 원자력 발전과 연결됩니다. 지금 씀씀이대로면 당연히 전기는 부족해질거고, 대안으로 원자력 발전을 내놓은 거니까요. 그렇게 보면 밀양 송전탑은 탑이 아니고 발전소나 마찬가지예요. 원전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문제가 생기기 전에 이런 것들을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작업실을 가리키며) 저는 가끔 제가 이런 것들을 다 가져도 되나 싶어요. 딱 이만큼만이라도 무언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나, 오히려 너무 많은 소유로 인해 폐를 입히는 건 아닌가 싶어서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지역에 사는 일본의 세 남매에게 보내줄 티셔츠를 들고 있는 윤호섭 교수.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지역에 사는 일본의 세 남매에게 보내줄 티셔츠를 들고 있는 윤호섭 교수.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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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는 11일이면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사고가 일어난 지 3주기가 됩니다. 우리는 어떤 것들을 기억해야 할까요.   
"모두들 공존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게 다문화 정도로만 그치는 게 아쉬워요. '공존'이라는 건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포괄하거든요. 거리도, 이념도, 경계도 뛰어넘는 개념이에요. 그게 1km든 1000km든 상관이 없는 거죠. 원전도 비슷한 게, 부산 쪽에서 사고가 나면 바로 일본에서도 문제가 생길 수 있거든요. 고리 원자력발전소에서 사고가 나면 일본이 바로 피해자가 될 거예요.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내 주위 이웃을 돌아보고, 어떻게 함께 잘 살 수 있는지 고민해봤으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마친 윤호섭 교수는 우체국으로 간다고 했다. 방사능 오염으로 인해 방 안에만 있는 일본의 세 남매들에게 웃고 있는 해와 달, 별이 그려진 티셔츠를 보내주기 위해서다. 아이들이 집 안에서나마 자연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직접 그렸다.

그는 8일 오후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리는 '탈핵문화제' 행사를 시작으로, 이달 30일부터 인사동 차없는거리·혜화동(대학로) 필리핀마켓에서 매주 일요일마다 티셔츠에 무료로 그림 그려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2002년부터 이런 활동을 해온 그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티셔츠를 건네받는 사람들이 기뻐하는 걸 보는 게 즐거워서"라고 답했다. 친환경, 탈핵에 대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그만의 '오랜 기쁨'은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다.


태그:#후쿠시마 원전사고, #311 후쿠시마, #윤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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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플러스 에디터. 여성·정치·언론·장애 분야, 목소리 작은 이들에 마음이 기웁니다. 성실히 묻고, 세심히 듣고, 정확히 쓰겠습니다. Mainly interested in stories of women, politics, media, and people with small voice. Let's find 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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