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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주재 프랑스 대사관 전경.
 캄보디아 주재 프랑스 대사관 전경.
ⓒ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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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 17일,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즈가 수도 프놈펜을 함락할 당시 미처 도망가지 못한 론놀 정부 수뇌부들이 프랑스 대사관으로 몸을 피한 적이 있었다. 이들은 크메르 루즈에 의해 반드시 처단해야 할 '7인의 반역자' 명단에 올라 있던 주요 정치인들이었다. 캄보디아에서 프놈펜 주재 프랑스 대사관은 이들의 목숨을 구해줄 수 있는 유일한 안전지대였다.

75년 론놀 정부 수뇌부, 프랑스 대사관 밖으로 쫓겨나 공개처형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프랑스 대사관 부영사 장 디락(Jean Dyrac)은 크메르 루즈 군인에게 이들을 순순히 넘겨주었다. 결국, 프랑스 외교관의 이러한 비인도적 처사로 론놀 정부 마지막 총리 롱 보렛과 당시 정권 2인자이자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의 사촌 시릭 마딱 왕자 등 수뇌부는 문밖에 기다리던 크메르 루즈 군에 이끌려가 곧바로 공개 총살형을 당하고 말았다.

당시 프랑스 대사관 측은 이들이 대사관 밖으로 쫓겨나는 순간, 직면하게 될 운명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더 놀라운 진실은 훗날 대사관과 프랑스 외무부 사이 오간 25통의 전보를 통해 이것이 부영사의 독단적 결정이 아닌, 프랑스 정부의 지시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영국 <더 가디언> 2006년 1월 27일자 기사 참조)

프랑스의 용서를 받지 못할 악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영내로 피신한 현지인 수백여 명 역시 크메르 루즈 측에 고스란히 넘겨주었다. 론놀 정부에서 일하던 공무원과 그 가족들이었던 이들은 문밖으로 쫓겨나간 즉시 크메르 루즈 군에 의해 대부분 처형 당했다. 외국인 여성과 결혼한 캄보디아 남성들도 합법적인 결혼 서류가 있었음에도 대사관에서 쫓겨나 그들과 똑같은 운명에 처해야만 했다.

대표적인 인권 국가인 프랑스가 한낱 게릴라군에 지나지 않던 크메르 루즈의 요구에 별다른 저항 없이 무고한 생명을 사지(死地)로 넘긴 일은 지금도 믿기 어려운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동시에 오늘날 선진 인권국가를 자처하는 강대국의 가면 속에 숨겨진 이중적 속내를 보여주는 본보기이기도 하다.

최근 서구 강대국의 이러한 이중적인 양면성을 드러낸 유사한 사건이 또다시 발생했다. 선진 민주주의 인권국가를 자처해 온 호주 정부가 골머리를 앓던 파푸아 뉴기니 등 역외 수용소 내 난민 및 망명자 문제를 캄보디아 정부에 떠맡기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호주 정부, 역외 난민수용소 캄보디아 이전 요구

<더 시드니 모닝 헤럴드> 등 호주 주요 언론들은 지난 4일(아래 현지시각) 스콧 모리슨 호주 이민부 장관이 캄보디아 사 켕 내무부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호주 역외 난민수용소의 캄보디아 이전을 요구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호주 정부가 캄보디아에 이 같은 제안을 한 것은 지난 2월 22일 쥴리 비숍 호주 외무부장관의 방문 때 이어 두 번째다.

토니 애봇 호주 총리 역시 "캄보디아를 포함한 여러 나라가 (난민수용소 이전)과 관련하여 지원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영국 <가디언> 등 외신들도 지난 3일 일제히 보도했다.

보수진영 자유당이 이끄는 호주 정부는 그동안 이민정책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여 왔다. 토니 애봇 총리 정부가 작년 9월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인도네시아 등지로부터 건너오는 해상 난민을 일절 호주 땅에 들이지 않겠다"라고 공약한 덕분이라는 분석도 뒤따르고 있다.

현재 호주 정부는 이미 파푸아 뉴기니 및 나우르 같은 남태평양 도서 국가들에 난민 수용을 위한 구금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국제 인권단체들과 유엔(UN)은 이들 시설의 불안전한 환경에 관해 비판해 왔다. 급기야 지난 2월 파푸아 뉴기니 마누스 섬 수용소에서는 열악한 처우와 가혹행위 등 인권유린에 항의하는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었다. 그리고 진압 과정에서 난민 1명이 숨지고 77명이 부상하면서 호주 정부의 비인도적 난민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캄보디아 정부는 호주 정부의 이번 제안에 대해 즉각적인 답변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국내외 전문가들은 훈센 정부가 내부적으로는 '매우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 이유는 호주가 중국과 미국, 일본, 한국과 더불어 캄보디아의 주요 지원 국가 중에 하나이며 호주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 막대한 규모의 추가 지원이 따를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이다.

캄보디아는 지난해 국가투명성기구가 발표한 국가별 부정부패지수 순위에서 160위 최하위권을 차지할 만큼 부정부패가 심한 나라다. 그만큼 외국이 제공한 원조자금이 100% 사회간접자본 투자에 쓰일 거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캄보디아 정부가 눈 앞의 떡을 두고 그냥 침만 흘리고 말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도 거의 없다. 시기의 문제일 뿐 사실상 호주 정부의 요청을 수용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지난 4년 동안 호주 정부는 2억9700만 달러 이상을 캄보디아에 제공했다.

그동안 캄보디아 훈센 정부는 전 세계 최악의 '인권탄압국가'라는 오명에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그다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때문에 호주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 직면하게 될지도 모를 국제사회의 비난이나 우려의 목소리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삼 랭시가 이끄는 통합야당(CNRP) 역시 호주 정부가 야당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해 온 만큼, 이 문제에 관해 말을 아끼고 관망하는 자세다. 아직 특별한 논평조차 없다. 

반면, 호주 정부의 난민정책에 대해 호주 야당과 국제 인권단체들의 비난은 거세다. 골치 아픈 이민자 문제를 가난한 나라에 떠맡기려고 한다는 게 주요 골자다. 더욱이 그 대상국가가 "하필이면 캄보디아냐"라는 문제 역시 호주 정부로 하여금 더 큰 비난의 화살을 맞게 하고 있다.

자국민 인권도 보호 못하는데... 난민 수용소라니

호주의 주요 인권단체들은 지난 3일 스콧 모리슨 장관의 캄보디아 방문을 두고 강력 비판했다. 인권단체들은 캄보디아가 망명 신청자들을 다루기엔 전문성이 부족하다면서 자국 내의 인권 문제들에나 대처하라고 비난했다.

휴먼 라이츠 와치(Human Rights Watch) 아시아 담당 부이사 필 로버트손 역시 호주 <더 시드니 모닝 헤럴드>와 지난 4일 한 인터뷰에서 "토니 애봇 정부의 인권을 유린하는 이러한 난민정책은 명백히 부끄러운 짓이며, 스콧 모리슨 장관의 이번 프놈펜 방문 역시 호주 정부의 책임을 캄보디아에 떠맡기려는 철저히 나쁜 아이디어가 살아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캄보디아 내부 사정에 정통한 인권단체 '리카도'(Licadho)의 암 삼 앗 선임조사관도 지난 2월 22일 'RFA 크메르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우려를 표명했다.

"캄보디아는 아직 망명 신청자들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아직도 이민법과 국적법을 효과적으로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민자들을 수용하려면 더 나은 법률적 준비가 필요하며, 더욱이, 캄보디아는 아직도 인권유린에 직면해 있다."

인권단체 관계자의 우려처럼 캄보디아는 세계적으로도 인권탄압 문제가 심각한 나라다. 권력자와 재벌기업에 의해 '벙칵호수 강제철거'를 비롯해 전국적인 토지 수탈이 심각하다. 또, 민간인을 상대로 한 폭력과 인권 유린이 빈번한 이 나라에서는 자국민 보호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런 가운데 호주 정부를 대신해 제3국 난민을 보호하겠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더욱이 파푸아 뉴기니 마누스 섬 수용소와 마찬가지로 캄보디아 정부 관리 하에서도 열악한 처우는 물론이고, 인권유린과 더불어 생명의 안전마저도 보장받을 수 없음은 자명하다.

당시 프랑스 대사관의 검정색 철문은 생과 사의 죽음를 가르는 운명의 문이었다.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킬링 필드> 속에도 여권위조에 실패한 주인공 '디스 프란'이 크메르 루즈군이 버티고 있던 대사관 문밖으로 홀로 나오는 장면이 나온다.
▲ 캄보디아 주재 프랑스 대사관의 차임벨을 누르는 현지 여성의 모습 당시 프랑스 대사관의 검정색 철문은 생과 사의 죽음를 가르는 운명의 문이었다.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킬링 필드> 속에도 여권위조에 실패한 주인공 '디스 프란'이 크메르 루즈군이 버티고 있던 대사관 문밖으로 홀로 나오는 장면이 나온다.
ⓒ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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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캄보디아 정부는 과거 난민 처리 방식과 관련하여 씻을 수 없는 전과(?)를 가지고 있다. 지난 2009년 중국을 탈출, 캄보디아로의 망명을 요청한 위구르 난민 20명을 중국정부 측에 즉각 송환시킨 전례가 있다.

그 대가로 3일 후인 그 해 12월 22일 당시 중국 국가부주석이었던 시진핑 주석이 캄보디아를 전격 방문, 무려 12억 달러 규모의 원조와 차관을 훈센 정부에 지원하는 협정을 체결한 바 있다. 이는 중국으로 강제송환 시켜 버린 위구르 망명자들의 운명처럼 이들을 원하는 다른 나라들의 요구가 있으면 캄보디아 정부가 언제든지 송환시켜 버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살기 위해 도망쳐 나온 난민들을 캄보디아 정부에 슬쩍 넘기려는 지금의 호주 정부의 모습은 40여 년 전 무고한 사람들을 문밖 죽음의 구렁텅이로 양심의 가책 없이 내쫓아 낸 프랑스 대사관의 처사와 다를 바 없다.


태그:#캄보디아, #박정연, #PHNOM PENH, #프랑스 대사관, #호주 난민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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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캄보디아 뉴스 편집인 겸 재외동포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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