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세상네트워크 빈곤층건강권사업단에서는 <오마이뉴스>와 함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통해 건강권에 대한 실태를 살펴보는 '가난한 사람들도 건강하게 살 권리가 있다'라는 주제로 기획연재를 시작합니다. [편집자말] |
"몸이 아프니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수입은 줄었는데 생활비와 병원비는 감당할 수 없고… 불안감이 날마다 커져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어요." 10년 전, 남편과 이혼한 뒤 두 명의 자녀를 키우던 윤씨는 올 1월 갑작스럽게 대장암 판정을 받았다. 병원에 입원한 뒤 지난 3개월 동안 윤씨가 병원에 낸 진료비는 간병비를 포함하여 월 평균 800만 원을 넘었다. 콜센터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며 월 180만 원 정도의 소득으로 두 명의 자녀와 함께 생활하던 윤씨는 병원에 입원한 뒤 직장도 그만 두게 되었다.
소득이 줄자 병원비도 감당할 수 없었다. 윤씨는 기초생활수급신청을 해보았지만 선정에서 탈락되었고 몇 십만 원이라도 지원 받기 위해 구청과 여러 민간지원단체 등을 알아보았지만 이조차 여의치 않았다. 결국 그녀는 8000만 원짜리 전세를 반지하 월세로 옮긴 뒤에야 병원비와 생활비 등의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아직도 몇 번의 항암치료가 더 남아있기 때문이다. 윤씨는 여기서 그만 치료를 포기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환자를 빈곤으로 추락시키는 고액진료비윤씨와 같은 암환자의 경우,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치료는 총 의료비의 5% 정도만 부담하면 된다. 하지만 상급병실료, 선택진료비, 간병비 등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부분이 진료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비급여를 포함한 고액진료비가 발생하면 윤씨처럼 빈곤으로 추락하는 경우가 다수 발생한다.
한국은 모든 국민이 건강을 누리고 필요할 경우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권리를 건강보험이라는 사회보험으로 보장하고 있다. 가난한 이들의 의료 이용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지원해주는 공공부조 형태의 의료급여제도가 운영되고는 있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의료 현실은 중환질병에 걸리면 가계가 파탄나고 가족들의 삶까지 파괴된다. 병원비 때문에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참극이 벌어지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안전망은 너무나도 허술하다.
1998년 IMF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소득불평등은 점점 더 심화되고 사회적, 경제적 위험으로부터 사회구성원을 보호해야 하는 사회안전망 구축이 절실해졌다. 건강보험이 전 국민의 의료안전망으로서 기능해야 하지만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은 낮은 보장 수준과 과도한 본인 부담으로 많은 문제를 낳고 있다.
아래표를 보면 OECD 국가 중 네덜란드, 프랑스, 아일랜드가 10% 정도의 본인부담률을 보이고 있다. 거의 무료로 병원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평균 35.7%의 본인부담률을 부담하고 있다.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점점 더 떨어지고 있으니 앞으로 의료비에서 본인이 부담해야 할 금액은 더 높아질 것이다.
우리나라의 의료안전망이라 함은 건강보험이 1차 안전망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원되는 의료급여 제도가 2차 안전망이다. 그 외에 국가가 정한 최후의 의료안전망은 최고 300만 원까지 지원되는 긴급의료비 지원 정도이다.
사실상 의료급여 대상자가 아니면 건강보험 이외에 다른 의료안전망은 없다고 보면 된다. 의료급여는 그 자격조건과 대상자 선정이 매우 까다로워 의료급여가 필요한 빈곤층을 모두 포괄하지 못하고 있는 처지다. 그러다보니 보장 수준이 높지 않고 고액의 병원비로 인한 환자들의 고통은 갈수록 심각한 상황이다. 그나마도 민간에서 모금을 통해 지원되는 정도이니 의료안전망에 대한 대책은 매우 시급한 형편이다.
누군가 그랬다. 질병의 고통은 누구에게나 평등하지만 제도는 그렇지 않다고. 이렇듯 본인부담 지불 능력이 취약한 빈곤층에게 감당할 수 없는 병원비는 아파도 병원 문턱에서 치료를 포기하게 만든다. 돈이 없으면 자신의 목숨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생명과 존엄의 가치보다 돈이 더 중요한 비정한 사회를 원망할 뿐이다.
최소한의 건강 유지할 수 있는 의료안전망 시급
의료안전망은 생명과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원칙에서 가난한 이들의 인간다운 삶을 최소한으로 보장하기 위한 사회안전망의 한 축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회구성원들에게 '의료안전망'은 생명과 직결된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 이들의 생명을 담보할 만할 의료지원체계는 부실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가구의 소득에서 보건의료지출이 40%를 넘으면 '재난적 의료비'로 규정하고, 각 국 정부가 적극적인 의료안전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것을 권고한다. OECD 역시, 자력으로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운 사회 구성원들이 정상적인 노동 및 사회 활동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돕는 사회적 장치가 의료안전망이라고 규정했다.
한국의 경우 의료안전망에서 제도적으로 벗어나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는 건강보험 체납자가 이미 200만 명을 넘었다. 또 비급여 등 고액 진료비 때문에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있는 의료비 과중 가구가 약 900만 명(2008, 건강보험자료)에 이르고 의료급여에 포함되지 않는 저소득층에 대한 제도적 안전장치 역시 전혀 없다.
그나마 존재하는 의료비 지원사업은 법정본인부담금 지원 중심이어서 본인 부담을 가중시키는 비급여 지원은 제한적이다. 또 건강보험료나 소득 및 재산기준, 질병종류 등에 따라 대상자 선정 기준이 매우 복잡하고 지원한도가 설정되어 있어, 진료비가 많이 발생하는 이들에게는 불리하다.
유럽 의료복지국가의 경우 자격조건과 대상의 폭을 넓혀 저소득층의 의료안전망을 보장하고 있다. 사실상 무상의료에 가깝고 의료 뿐만아니라 다른 사회적 안전망이 위기에 처한 국민들을 보호한다. 한국처럼 중증질환에 걸리면 가계가 파탄나는 일은 없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의료안전망을 만들어야 한다.
우선 부끄러울 정도로 낮은 공공재정의 비율을 높여야 한다. 그리고 건강보험 보장성을 강화하고, 공공부조인 의료급여의 수급 기준을 완화하여 제도에서 탈락해 지원체계에서 소외된 이가 없도록 수급권자의 수를 늘려야 한다. 동시에 비급여 등 고액 진료비에 대한 실질적인 보장 범위도 넓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