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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초, 태국 정부는 '비자 런'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비자 런은 태국 거주 외국인들이 적법한 절차를 거쳐 비자를 받지 않고, 체류허용 기간이 끝나는 시점에 인근 국가인 캄보디아나 라오스 등을 잠깐 경유한 뒤 다시 재입국하면서 체류기간을 연장하는 걸 말한다. 한국 교민사회에서는 대개 '비자 클리어(Visa Clear)'라고도 불린다. 유명 관광지에 가보면 '비자 클리어 대행'이라는 여행사들의 광고 문구를 흔하게 볼 수 있다.

한국과 태국은 1981년 상호비자면제 협정을 해 90일간 무비자 체류가 가능하다. 브라질과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등 남미 국가를 제외하고 태국에서 90일 동안 무비자로 체류할 수 있는 아시아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대다수 선진국들도 무비자 체류기간이 고작 15~30일에 불과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대부분의 교민들은 적법하지만 번거롭고 비싼 비자발급 대신 비교적 저렴한 '비자 런'을 선택해 왔다.

한국의 일부 범법자는 태국으로 숨어들어와 이런 점을 악용하기도 한다. 2007년 발생한 안양환전소 살인사건의 주범도 태국에서 비자 런을 시도하다가 지난 2013년 미얀마 접경지역에서 검거된 바 있다.

입국 수속 강화... 한국 교민 입국 거부 사태 발생

태국이민청은 육로를 통한 비자 런은 전면금지하며, 대신 항로를 통한 비자 런 금지조치를 8월 11일까지 유예기간을 두겠다고 홈페이지를 통해 지난 5월 8일 발표했지만, 일부 교민들은 개인블로그와 인터넷 게시판에 최근 공항에서조차 입국을 거부당했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 캄보디아 인근 태국국경 아란야프레텟의 모습 태국이민청은 육로를 통한 비자 런은 전면금지하며, 대신 항로를 통한 비자 런 금지조치를 8월 11일까지 유예기간을 두겠다고 홈페이지를 통해 지난 5월 8일 발표했지만, 일부 교민들은 개인블로그와 인터넷 게시판에 최근 공항에서조차 입국을 거부당했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 유정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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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한인 교민들이 비자 런을 위해 선택하는 대표적 방법은 육로로 인접국가에 갔다 오는 것이다. 주로 이웃나라인 캄보디아나 미얀마, 라오스 등을 다녀온다. 이런 방법을 취할 경우 약 1~2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며, 비용은 대략 교통비와 인접국가 비자비용을 포함해 한화로 7만~8만 원 정도가 든다.

태국에서의 비자 런은 오랜 시간 동안 관행적으로 이어져 왔는데, 지난 1월 태국 정부가 입국 수속을 강화하면서 몇몇 교민이 입국을 거부 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리고 4개월 뒤, 태국이민청은 공지문을 통해 오는 8월 12일부터 '비자 런'을 전면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다. 다만, 육로 비자 런은 전면 금지하는 대신, 항공로를 통한 비자 런은 한시적으로 허용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8월 11일까지를 유예기간으로 못 박았다.

그러나 최근 수완나폼공항 등 항공 루트를 통해 제3국을 거쳐 입국을 시도하려던 일부 교민들이 입국을 거부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상당수 교민들은 '재입국이 거절당할 수 있다'는 공항당국의 경고에 제3국으로의 출국을 일찌감치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민들이 운영하는 개인 블로그와 SNS 등에는 입국거부 경험 사례와 태국 출입국관리들의 횡포를 비난하는 글이 속속 올라오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 포털사이트 다음의 아고라 청원방에선 지난 4월 17일부터 태국 주재 한국대사관에 대응책 마련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태국한인회와 태국 주재 한국대사관은 급작스런 '비자 런 금지조치'와 관련해 지난 4월 태국이민청 관료들을 초청한 가운데 설명회를 열었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대책회의를 거쳤지만, 별다른 대안은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태국정부의 갑작스런 조치에 대해 교민들은 몹시 당황해 하면서도 현실을 무시한 조치라며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 4년째 거주해 온 이진화씨는 "비자 런 금지조치 후 불안에 떠는 교민들이 많다"라며 "자칫 불법체류자로 몰려 가재도구 하나 못 챙긴 상태로 강제출국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김애영 태국한인회 사무실장은 "이번 사태에 적극적인 해결방안을 못 내놓고 있는 한인회에도 교민들의 불만이 빗발치는 상황이며, 정식 비자를 발급받은 교민은 태국에 남고, 그렇지 못한 교민들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비자 런 금지, 세수 확대 때문일까 보복성 조치일까

한편 오랜 기간 관행적으로 이어진 비자 런을 태국정부가 금지 시킨 이유에 대해 태국 교민 사회는 다양한 추측을 내놓고 있다. 일각에서는 실종된 말레이시아 여객기에 탑승했던 이란인 남성 2명이 태국에서 분실됐던 여권을 소지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또 다른 이들은 세수 확대를 위한 재정적 이유 때문이 아니겠냐는 의견을 냈다. 태국 내 한국계 여행사들이 많아지자, 태국여행사들이 태국정부에 압력을 넣는 바람에 생긴 조치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현재 교민사회에서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 설은 따로 있다. 한국에 입국하려는 태국인들이 집단으로 입국 거부된 사례가 많아지자 이에 대한 태국정부의 '보복성 조치'라는 것이다. 지난 5월 18일 <방콕포스트> 1면에 실린 관련 심층기사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지난해 10월 대한민국 법무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입국거부된 외국인은 중국이 가장 많았고 태국이 그 뒤를 이었다.

태국이민청 파누 껏랍폰 국장은 이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비자 런' 관행을 가장 많이 악용하는 외국인이 '한국인들'이라고 밝혔다. 그는 "태국에서 은퇴이민 생활이나 취업 혹은 사업을 하려는 외국인들은 적절한 관련 비자를 취득해야만 하며 관광객을 위한 제도를 악용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오랫동안 (비자 런 관행을 악용하는 외국인들에게) 지나치게 친절했고, 그래서 출입국 시스템이 유린 당해 왔다. 또한 1900바트(우리돈 6만6500원) 비용으로 발급되는 취업비자가 세수 증대에 도움을 줄 것이고, 정부 역시 어떤 방식으로든 수입을 늘려야만 한다."

그는 또 이민청이 그간 이 문제에 관해 많은 민원을 받았다고 밝혔다. 대다수 민원 내용은 한국과 베트남, 러시아 사람들이 비자 런을 이용해 관광가이드로 일하거나 식당 등을 경영해 태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것이었다.

태국 정부의 까다로운 비자발급조건

태국 수완나폼 공항 내부 전경
 태국 수완나폼 공항 내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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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국 태국북동부지역 묵다한 도사무소' 소장인 상콤 탓소 경찰 중령은 <방콕포스트> 일요판인 <스펙트럼>과 한 인터뷰에서 "소속 직원들이 이미 지난 2주일 동안 변경된 입국심사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면서, "그 대상은 주로 '한국인들'"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러나 이와 관련 재태국한인회(회장 채언기) 측은 "보복성 조치설은 근거 없는 소문"이라고 일축했다. 한인회는 "1월부터 강화된 입국심사는 내년 출범하는 아세안경제공동체 출범과 관련하여 출범 전 제3국에서의 불법입국을 위한 조치"라고 교민대책회의 결과보고서를 통해 밝혔다.

문제는 태국정부가 요구하는 비자발급조건이 까다롭다는 데 있다. 태국 정부는 학생비자, 취업비자, 은퇴비자 등을 제시하고 있지만, 교민 상당수는 여행사나 관광쇼핑센터, 관광식당 등을 운영하는 영세업자들로 한국인이 현지인 기업에 취업해서 취업비자를 받기 어렵다. 또 법인을 직접 설립해 비자를 발급 받으려면 1인당 7000만 원 이상의 자본금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현지인을 4명 이상 의무 고용해야 한다. 은퇴 비자도 만 50세 이상에 연간 2800만 원 이상이 현지은행에 예치되어 있어야 하는 등 까다롭다.

현재 태국한인회가 추정하는 교민 수는 대략 3만 명 정도지만, 실제 거주 교민 수는 이보다 조금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중 적법한 체류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는 자격요건을 갖춘 교민은 전체 교민수의 20~30% 내외일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나머지 1만~2만명의 교민들은 당장 적법한 서류를 준비해서 비자를 발급받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 또 다른 편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에 일부 태국교민들은 태국어학원에 1년치 수강료를 내고 받는 교육비자로 체류기간을 연장하고 있다. 하지만 연중 4개월 이상 수업을 받아야 하며 주 4일 2시간 이상 수업을 받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달려 있어 이미 직업을 가진 교민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경찰의 불시 단속이 이뤄질 수 있어 어학원에 등록만 한 채 수업에 출석하지 않고 비자를 연장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가장 걱정스러운 점은 이런 취약한 상황을 악용하는 불법 브로커들이나 사기꾼들의 등장이다. 부패한 경찰에게 뇌물을 줘서 감시를 피하는 방법으로 체류를 연장할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개운치 않은 불법적인 체류방법이다.

태국에 이미 정착한 교민들의 입장에선 한국으로의 철수도 힘든 결정일 수밖에 없다. 대부분 한국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온 이들이다. 따라서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새 직장을 구하거나 사업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태국 내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보이는 한국인 관광가이드의 경우, 이미 태국 정부가 불법으로 금지한 직업이기 때문에 당장 태국을 떠나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이웃나라 캄보디아 교민들도 이번 태국정부의 조치에 벌써부터 불안감을 나타내고 있다. 언제 캄보디아로 불똥이 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캄보디아 교민 김석화씨는 "태국의 정책들이 캄보디아 정책에 영향을 미쳐온 사례가 많다"라며 "내년부터 아세안경제공동체(AEC)가 출범하기에 캄보디아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한다"라고 우려를 표했다(참고로, 캄보디아는 미화 286달러만 내면 사업이나 취업여부와 상관없이 1년짜리 장기체류 상용비자를 받을 수 있으며, 제3국 경유 없이 무기한 연장도 가능하다).

비자 런 금지 관련 관계 당국의 대책 마련이 필요해 보이지만, 한국 외교부는 수개월 동안 별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비자 런 전면 금지가 불과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지금, 태국 교민사회는 쉽게 풀 수 없는 고민에 빠졌다. 8월 12일 이후, 태국 교민들은 어떤 상황을 맞이할까.


태그:#태국, #박정연, #비자 런, #비자 클리어, #태국한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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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캄보디아 뉴스 편집인 겸 재외동포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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