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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5일 오후 쌍용차 평택공장에서 아이를 안은 어머니가 노동자들의 공권력 침탈 대비 훈련 모습을 걱정스러운 듯 지켜보고 있다.
 2009년 6월 5일 오후 쌍용차 평택공장에서 아이를 안은 어머니가 노동자들의 공권력 침탈 대비 훈련 모습을 걱정스러운 듯 지켜보고 있다.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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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난 늘 두려웠습니다. 2009년 쌍용차 평택공장에서 덩치가 산만한 용역깡패들과 싸워나갈 때, 헬기에서 쏟아져 내리던 최루액을 피하려고 이리 저리 뛰어다닐 때, 주먹만한 볼트가 내 머리를 향해서 날아올 때 난 두려웠습니다.

이길 수 없을 거라며 밤사이 몇십 명씩의 동료들이 공장 밖으로 나갈 때, 사측에서 민주노총도, 금속노조도 너희들을 버렸다고 밤새도록 선무방송을 할 때도 난 두려웠습니다. 경찰특공대가 내 동료들을 짐승처럼 곤봉으로 내리치고, 방패로 찍고, 발로 걷어찰 때, 이제 버티면 죽겠다는 공포가 공장 안팎을 뒤덮을 때 참 두려웠습니다.

공장 밖으로 쫓겨난 뒤 쌍용차 해고자와 동의어인 '빨갱이', '폭력시위자', '불법파업'이라는 낙인 때문에 죽어간, 25명의 죽음을 목도할 때마다 두려움은 커져만 갔습니다. 그 죽음들이 이어질수록 내 싸움의 미약함이 두려웠고, 방법을 찾기 위한 몸부림 또한 두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해고되고 지난 6년 동안 일터로 돌아가기 위해 열심히 싸워왔던 그 지난 일들이 문득 후회스러워질까봐 난 늘 두렵습니다.

그러나 싸움을 포기하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것 같은 강박 속에서도 내 삶을 지탱하는 동료들이 내 곁에 있었고, 내 삶을 응원하는 이들 또한 있었습니다. 나에겐 돌아갈 집이 있었고 가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수많았던 두려움 속에서도 진실을 찾기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들이 두렵습니다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사무소 앞에서 세월호특별법제정 촉구 기자회견을 마친 세월호 유가족들이 청와대로 이동하려하자 경찰이 이를 저지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유가족의 사지를 들어 끌어내자 유가족이 부상을 당해 쓰러져 있다.
▲ 강제진압으로 실신한 예지 엄마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사무소 앞에서 세월호특별법제정 촉구 기자회견을 마친 세월호 유가족들이 청와대로 이동하려하자 경찰이 이를 저지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유가족의 사지를 들어 끌어내자 유가족이 부상을 당해 쓰러져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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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들은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버틸 수 있는지, 아니 어떻게 살아가는지 조차 가늠이 안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잃으면 부모를 떠나보내지만, 부모는 자식을 잃으면 자신을 떠나보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난 두렵습니다. 아이들이 왜 죽어갔는지 알고 싶다고 광화문에서, 국회에서 울부짖는 그들이 두렵습니다. 30일 넘게 곡기를 끊고, 120일 가까이 오직 진실규명 하나만을 요구하는 그들이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싸움이라는 것이 늘 이기지 못한 싸움이었기 때문입니다.

쌍용차에서, 강정에서, 용산에서, 밀양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싸워나가고 있지만 또한 끊임없는 패배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한 발걸음은 경찰들의 폭력으로 막히고, 최소한의 상식적인 요구는 늘 거절당합니다.

염치와 정의가 사라진 정치는 피해 당사자에게 막말을 쏟아내고 언론은 그것에 발 맞춰 어쩔 도리가 없음을 강변합니다. 2009년 평택공장에서 파업노동자들이 테러리스트라고 국가에게 낙인찍히고 해고는 어쩔 도리가 없다던 언론보도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지금 세월호 유가족에게 보내는 모든 악다구니들은 지난 강정과 용산과 밀양에서 똑같이 들어야했던 폭력들이기도 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은 지금 '최선'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땡볕과 비바람을 견디며 단식과 노숙농성을 하며 진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전국 각지를 돌며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진실규명을 약속했던 정치인들에게 항의하며 싸워내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한 국가경쟁력 저하라는 말도 안 되는 이데올로기 공세와 '결국은 보상 더해달라는 소리 아니냐'는 이기심을 조장하는 목소리와도 싸우고 있습니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는 이야기, 이 싸움에서 만큼은...

제대로 된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박근혜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는 세월호참사 유가족들이 13일 오후 청와대 입구에서 경찰에 가로막힌 채 앉아 있다.
▲ "박 대통령 언제든 찾아오라더니..." 제대로 된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박근혜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는 세월호참사 유가족들이 13일 오후 청와대 입구에서 경찰에 가로막힌 채 앉아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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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전히 나는 두렵습니다. 6년을 싸우고도 지난 싸움이 내 삶의 후회로 남지 않기를 바라는 두려움처럼 지금 진실규명을 위해 싸워나가는 유가족들의 마음이 꺾일까 두렵습니다.

유가족은 최선을 다했지만 유가족과 함께하는 마음들이 부족해서, 발걸음들이 부족해서 싸움이 길어질까 두렵습니다. 우리가 함께 싸운다고 정치인들이나 대통령의 입장이 바뀌겠냐는 우리 스스로의 자조 섞인 패배감이 두렵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며 내 미래와 연동시켜 두려움을 가질, 내가 진정 두렵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것은 또 좌절과 실망과 어쩔 수 없음인지 스스로 되묻습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비가 올 때까지 기도한다던 인디언 기우제 이야기를 또다시 반복해야 하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는 이야기를 이 싸움에서만큼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이 세월호 참사 진실 규명만큼은 우리가 이겨야 하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안전과 미래는 저 추악한 정치권력들이 이 사회에서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확약했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 빼앗긴 안전과 미래를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국가권력에 맞서 가만있지 않겠다는, 살아남은 우리들의 다짐이기 때문입니다.

절망과 비탄의 사회를 이제 그만 끝냈으면 좋겠습니다. 거짓과 기만의 정치도 이제 바꾸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여야 합니다. 나 혼자는 두렵지만 옆의 누군가가 손을 맞잡는다면 두려움은 가라앉을 것입니다.

함께한 우리가 두렵지 않게 되면 두려워 할 이들은 비로소 우리들이 아닐 것입니다. 섣부른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가족을 잃은 그들에게 이제 가족이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딸을 잃은 엄마에게 딸이 되어주고, 아들을 잃은 아빠에게 아들이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친구가, 삼촌이, 이모가 되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세월호 참사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지만 함께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국가권력은 아마도 우리가 함께 가는 길을 가로막고 우리들의 상식적인 요구를 거절할 것입니다.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두려운 마음을 이겨내고 8월 15일 오후 3시, 광화문에서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수많은 두려움을 딛고 선 용기로, 진실을 찾기 위한 우리 모두의 발걸음이 멈추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광화문에서 만납시다.

덧붙이는 글 | 이글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 광화문광장에서 농성중인 416국민농성단에 참여하고 있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고동민씨의 글입니다.



태그:#세월호, #세월호특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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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복직자. 현재 쌍용차지부 조합원. 훌륭한 옆지기와 살고 있는 세아이의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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