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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심부에는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가 있다. 동성로는 아주 유명하고, 북성로는 제법 유명하다. 남성로는 다른 이름인 약전골목으로 명성이 높다. 서성로만 이래저래 지명도가 낮다.

대구 서성로 돼지골목 전경
 대구 서성로 돼지골목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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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영광 누렸던 서성로...빛 발하지 못한 까닭은?

서성로가 이름을 떨치지 못하는 데는 까닭이 있다. 남성로는 경상 감영 뒤쪽에 있던 약령시가 옮겨온 덕분에, 동성로는 현대화 과정에서 도심 한복판으로 발전한 덕분에, 북성로는 해방 이후 공구 골목으로 발전한 덕분에 모두 널리 알려졌지만, 서성로는 계기를 갖지 못했다.   

오히려 서성로는 원래 있던 것이 없어지면서 천천히 잊혔다고 표현할 만하다. 대표적인 예가 '역사의 현자들과 벗을 삼는다'는 기치를 내걸었던 '우현서루'다. 대구은행 북성로 지점 자리에 1905년 설립된 우현서루는 교남학교(현 대륜고등학교)의 전신으로 이상화 시인의 큰아버지인 이일우 선생이 운영했던 민족 학교다. <시일야방성대곡>의 장지연, 임시 정부 대통령 박은식, 임시 정부 국무총리 이동휘, 저항 시인 이상화 등 민족 지사 150여 명이 이 학교에서 배웠다. 그러나 우현서루는 일제에 의해 1911년 강제로 폐쇄됐다.

우현서루 터 뒤편엔 넓은 주차장이 있다. 이곳에는 우현서루보다 1년 뒤에 개교한 달서 여학교가 있었다. 낮에 공부할 수 없는 주부를 위해 야학까지 열었던 달서 여학교(설립자 이상악, 이일우 선생의 장남)의 운영 주체는 이상화 시인의 어머니 김신자 여사가 이끈 <부인 교육회>였다.  

우현서루 앞 네거리에는 대구 읍성의 북장대 망경루가 있었다. '서울(임금)을 바라본다'는 의미의 망경루는 1906년 대구 읍성이 파괴된 후 관풍루(경상감영의 정문)와 더불어 달성공원으로 이전 되었다가 1970년 해체돼 자취를 감춘다. (관풍루는 1973년 복원. 서장대는 약령서문, 남장대는 중앙 파출소, 동장대는 대우 빌딩 자리)

망경루 터에서 서성로를 타고 70 미터 가량 올라가면 서소문 터가 나온다. 달서문(구 조흥은행, 현 남영사우나)과 망경루 사이로, 서문로 교회로 들어가는 골목 입구 지점이다. 서문로 교회 자리에는 본래 경상 감영의 감옥이 있었다. 현재 사용되는 교회 건물은 1970년에 지어졌다.

서문로 교회 남쪽의 중앙 교회는 1924년에 설립됐다. (서소문은 서문로교회와 중앙교회 중간쯤 있으므로 옛날에는 많은 사람이 이 골목으로 지나다녔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90년 역사를 자랑하는 중앙 교회는 제일 교회에서 분리돼 독립했다. 대구 경북 최초의 개신교 교회당인 제일 교회는 1896년 야소 교회당으로 출발했고, 현재 건물은 1933년에 지어졌다.

서성로 서문로교회
 서성로 서문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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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터에서 바라본 서성로. 차들이 나아가는 방향 왼쪽에 보이는 대구은행 북성로지점 건물 자리가 우현서루 터.
 서소문 터에서 바라본 서성로. 차들이 나아가는 방향 왼쪽에 보이는 대구은행 북성로지점 건물 자리가 우현서루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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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교회에서 조금 더 남쪽인 서성로 1가 44번지에는 이일우 고택이 있다. 우현서루를 운영했던 바로 그 이일우 선생이 살았던 집이다. 지금도 대문에는 그의 장손 이석희 씨의 문패가 붙어 있다. 하지만 고택은 늘 문이 굳게 잠겨 있어 일반인이 그 내부를 구경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일우 고택 바로 오른쪽에서 남영 사우나 사이에는 <봄은 고양이로다>의 시인 이장희가 살았다)

현재 서성로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돼지고기 골목이다. 이일우 고택에서 서성로를 가운데 두고 마주 보는 이 골목에는 8번 식당, 이모 식당, 밀양 식당 등 1970년대부터 장사한 식당들이 여러 곳에서 손님을 맞고 있다. 서성로에서 보면 언뜻 그 입구도 잘 가늠하기 힘들지만 저녁 무렵이면 빽빽이 주차된 승용차들 사이로 식당 간판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다. 

하지만 서성로에는 돼지고기 식당보다 훨씬 그 이름을 빛내고 있어야 마땅할 역사유적지가 있다. 바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민족시인 이상화의 생가다. 주소는 서문로 2가 11-1번지. 상화 생가는 현재 개방돼 있지 않다. 집도 당시 와가는 아니다. 대문 왼쪽에는 중구청에서 이 집이 상화 생가라는 표식을 붙여 두었다. 만약 상화 생가가 생생하게 살아 있고, 우현서루가 의연한 면모를 유지하고 있다면 서성로는 지금 수준이 아닐 것이다.

1905년 대구역에 기차가 다니고, 1906년 대구 읍성이 북성로, 서성로, 남성로, 동성로 순서로 파괴됐다. 이는 북성로가 가장 번창했고, 서성로가 그 다음 번화가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대구역사는 1913년에 지어졌다) 대구역에서 내린 사람들은 경상 감영 뒤편 약령시와 달서문 앞의 대구 큰시장(서문시장)을 오갔다. 약령시는 경삼 감영과 북성로 사이였고, 대구 큰 시장은 서성로 달서문 앞이었다. 그것이 북성로와 서성로가 번창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사진 오른쪽 건물이 우현서루가 있었던 대구은행 북성로지점 건물이다. 건물 뒤편 넓은 주차장이 이상화 시인의 어머니 김신자 여사가 이끌었던 달서여학교 터.
 사진 오른쪽 건물이 우현서루가 있었던 대구은행 북성로지점 건물이다. 건물 뒤편 넓은 주차장이 이상화 시인의 어머니 김신자 여사가 이끌었던 달서여학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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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화생가 대문에 붙은 입춘대길
 상화생가 대문에 붙은 입춘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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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우 고택과 이장희 고택 남쪽에 대구 읍성의 달서문이 있었다. 달서문에서 동쪽으로 가면 경상 감영에 닿는다. 이 길의 이름은 서문로. 경상감영에서 달서문까지 이어지는 길이라는 뜻이다. 달서문 자리에는 한국인들이 1913년에 설립한 최초의 은행인 대구은행 본점(구 조흥은행, 현 남영사우나)이 1920년 세워졌다. 맞은 편이 대구 큰 시장이었으니 은행이 자리를 잡을 만도 한 위치였다. 역시 서성로는 당시만 해도 북성로 다음가는 번화가였던 것이다.

그래서 1909년 대구를 방문한 순종의 하사금으로 세워진 은사관도 서성로에 지어졌다. 은사관은 공공 집회장이었다. 서문로 2가 12-1번지 은사관 자리 주변에는 국채보상운동 서상돈의 차남 서병조가 운영한 조양무진 주식회사도 있었다. 조양무진은 지금 말로 대략 사채놀이를 한 일제 시대의 신용 협동조합이었다.

금호 호텔 자리에는 본래 금호관이 있었다. 금호관은 일제 당시 유명한 요정이었다. 곽병원 맞은편 국채보상로 대로변 태남 빌딩도 본래는 청수원(주인 김태남)이라는 유명한 요정이었다. 청수원에서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를 모의했다고 한다. 태남 빌딩 동쪽 골목 안의 춘앵각도 대구의 대표적 요정 중 하나였다. 금호 호텔 맞은편은 대구에서 두 번째로 문을 연 예식장인 동원예식장이 들어서 있었다. (1950년대 개관, 최초 예식장은 1952년 교동시장에 자리 잡은 대구예식장) 역시 서성로는 과거 대구의 번화가였다.

이일우 고택 내부. 보통 문이 잠겨 있기 때문에 일반 답사자가 고택 내부를 구경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일우 고택 내부. 보통 문이 잠겨 있기 때문에 일반 답사자가 고택 내부를 구경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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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서성로, #이상화, #우현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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