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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가장 민폐였던 순간. 내 몸의 에너지를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몸의 에너지가 다 닳자 정신력을 가동하고, 이 정신력마저 다 닳자 육체가 내 것이 아닌 지경에 이르렀던 끔찍한 경험. 이런 적이 있었다.

엔지니어가 되고자 모인 사람들에게 왜 그런 훈련을 시켰는지 모르겠지만, 회사의 지령에 따라 신입사원이었던 우리는 무려 8시간이 넘는 행군을 해야 했다. 평지를 걷다가 산을 타고 또 평지를 걷다가 산을 타고 중간엔 어떤 몸을 쓰는 게임 같은 것을 하기도 하면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게 지령의 내용이었다. 내 평생 그렇게 힘이 들었던 적은 없었다.

걷는 걸 좋아하는 나였지만 두 시간이 지나자 지치기 시작했고, 네 시간이 지나자 '이건 아니다'라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다섯 시간이 지나자 정신이 혼미해졌다. 여섯 시간쯤이 되자 몸뚱아리를 저 산 구석에 처박아버리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이내 나는 내 힘으로는 도저히 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팀의 민폐 덩어리가 된 순간이었다.

팀원들은 번갈아가며 나를 끌고 가야 했다. 누군가가 숲 속에서 주운 막대기를 내 앞에 들이밀었다. '그 끝을 잡아'라는 표정을 하고서. 심청이가 심봉사를 이끌 듯 막대기를 이용해 팀원들은 나를 질질 끌고 갔다. 내 다리로 걸을 수 있을 때는 그래도 이렇게라도 끌려갈 수 있었다.

다리가 풀리고부터는 짐짝처럼 얼마 전까지는 생판 남이었던 남정네들의 등에 업혀가야만 했다(천만다행인 것이 나는 그때 가벼운 몸을 지니고 있었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 남정네 두 명이 나를 거의 들다시피 들고 뛰었다(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우리 팀은 그 미션에서 1등을 차지했다. 지금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은 우리는 왜 1등을 해야만 했을까, 이다.

끔찍했던 이 경험을 뒤로하며 나는 큰 다짐을 했다. 다시는 체력의 한계를 뛰어넘지 않겠다고. 죽어도 민폐는 되지 않겠다고. 민폐가 될 것 같으면, 시작하기도 전에 주저앉겠다고.

정유정 작가에 묻고 싶은 말 "정말 그런가요?"

정유정의 환상방황
 정유정의 환상방황
ⓒ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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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다짐을 하고부터 나는 유독 체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던 것 같다. 특히나 그 위험천만하다는 산을 타는 사람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이 자신의 한계를 초월해 도달한 곳은 단지 에베레스트 정상이거나, K2 정상이거나, 로체봉, 마칼루봉, 초오유봉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보기에 그들이 도달한 곳은 산꼭대기도 아닌, 인생의 목표도 아닌, 신의 경지였다. 물론, 그들은 겸손하게 이렇게 말한다. '육체의 힘이 고갈되면, 정신의 힘을 사용하면 됩니다.' 나는 정말이지 묻고 싶다. '정말 그런가요?'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을 읽기 전부터 내 마음은 이미 정유정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어떻게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해외 여행을 하지 않았다는 여류 소설가가 첫 해외여행지를 히말라야로 삼을 수 있었던 건지. 도대체 얼마나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을 지녔길래 등반에 성공해 책을 펴낸 건지. 그녀는 나와 도대체 무엇이 다른 건지!

책은 <7년의 밤>, <28> 등으로 유명한 소설가 정유정이 근 한 달간 한 히말라야 등반 체험을 시작부터 끝까지 담고 있다. 모든 것을. 가령 그녀의 변비 이야기라든가 그녀의 방광 이야기라든가 하는. 그 과정이 어떠 했든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개라고 일컬어지는 안나푸르나 쏘롱라패스(5416m)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오는 지난한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자기 자신의 발로, (누구한테 업히지도 않고) 기어코 해낸 것이다.

이 힘든 길을 왜 가고 있는지 스스로 물으면, 머릿속 목소리는 입 닥치라고 대꾸했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이며 가지 않으면 끝낼 길이 없다고.

그녀는 왜 히말라야에 올라야 했던 걸까. 그곳에 오르며 무엇을 얻고자 했던 걸까. 아니, 무엇을 털어내고자 했던 걸까. 그녀는 산을 오르며 그녀의 삶을 돌아보았다. 엄마의 삶, 아빠의 삶, 동생 셋의 삶 그리고 그들과 얽혔던 자신의 삶. 과거를 돌아보며 그녀는 그녀 자신이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왜 히말라야에 오를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아내려 애쓴다.

스물두 살은 내 생의 랜드마크였다. 어머니가 투병을 시작한 해였고, 질주하듯 살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내 등에는 세 동생이 업혀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아버지마저 내게 기댔다. 나는 싸움꾼이 돼야 했다. 어머니가 가르친 대로, 죽는 시늉하지 않고 살아남아야 했으므로. 어머니의 유언대로, 어머니를 대신해 엄마의 임무를 수행해야 했으므로.

어머니가 투병하는 사이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어 있었다. 동생 둘은 대학생, 막내는 아직 고등학생이었다. 유난히도 아내를 사랑했던 아버지는 상실감에 빠져 모든 의욕을 잃어버렸다. 나는 혼자 가야 했다. 빚을 갚고, 동생들을 가르치고, 집안살림을 꾸리면서. 운명이 내게 둘 중 하나를 요구한 셈이었다. 달리거나 고꾸라지거나.

히말라야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녀는 고꾸라지지 않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려야만 했다. 그녀에게 삶은 즐기는 무엇이 아닌, 싸워야 할 대상이었다. 놀이터가 아닌 링이었다. 링 위에서 그녀는 태생적으로 겁쟁이인 자신을 숨기고, 살기 위해 싸움닭으로 변신했다. 링 위에선 울면 안 됐다. 죽는 시늉도 하면 안 됐다. 그녀는 엄마가 죽은 후로 엄마여야 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달려야 하는 존재였다.

달려야만 했던 그녀는 어쩌면 조금 억울했는지도 모른다. 이왕이면 삶을 즐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겁쟁이로 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보호받으며, 조금 나약해도 되는 채로 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삶이 놀이터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싸움닭이 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녀는 여행을 통해 싸움닭에서 한 단계 승화할 수 있기를 바랐다. 태생적인 겁쟁이도 아닌, 사회적 자아인 싸움닭도 아닌 그저 조금 더 정유정다운 정유정이 되기를 바랐다. 여행을 앞에 둔 수많은 여행자들처럼, 그녀 역시 여행을 통해 본연의 모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랐던 셈이다.

그녀는 그녀의 본 모습을 찾을 수 있었을까. 여행을 끝낸 소설가 정유정은 의외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동안 자신이 본인의 태생적 자아라고 여겼던 겁쟁이는 그저 모든 인류의 보편적 기질일 뿐이며, 아니라고 우기고 싶지만 결국은 싸움닭이 자기 본연의 모습인 것 같다고. 그러니 새로이 거듭날 필요는 없는 것 같다고.

거듭날 필요 없었던 기질, 삶은 어차피 그런 것

삶의 고단함이 그녀를 싸움닭으로 만들었다. 고단함이 힘에 겨웠던 그녀는 고단함에서 벗어나듯 싸움닭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녀는 알게 된 것이다. 고단했을지라도 그것은 그녀의 삶이었고, 그 삶을 통해 얻게 된 그녀의 기질이 바로 그녀 자신이라는 것을.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 방황은 이렇듯 자기 자신을 긍정하면서 끝이 났다. 방황을 통해 그녀가 얻은 건 달라진 자신의 모습이 아닌, 기존의 모습을 의심 없이 받아들일 용기였다. 진솔한 마무리였다. 어떤 거창한 마무리보다 더 마음을 두드리는 마무리였다.

나는 또 다른 의미로 그녀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그녀의 체력과 정신력은 책을 읽기 전부터 이미 우러러봤으므로, 이번에는 그녀의 용기를 우러러보았다.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고단한 삶이 삶'이라 이해하는 것만큼 초월적인 것도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해서다. 나는 도통 이런 용기를 내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녀와 나의 차이를 알 것 같다. 말 그대로, 용기였다. 나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 민폐가 될 수도 있는 나를 인정하는 용기. 내겐 이런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쪽 팔리고 싶지 않고, 자존심 상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그간 앞섰던 것 같다. 시작하기 전부터 주저앉았던 이유였으리라. 그래서 '쪽 팔린다'. 인류 보편적 기질인 겁쟁이가 내 기질이 된 것만 같아서.

덧붙이는 글 |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정유정/은행나무/2014년 04월 14일/14,000원)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정유정 지음, 은행나무(2014)


태그:#정유정, #히말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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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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