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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글은 현재 87세인 장인어른(송관호)이 옛날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수기를 사위인 제(김종운)가 정리한 후 문장을 다듬어 썼습니다. 앞으로 게재할 내용은 인민군으로 북으로 후퇴하던 기록, 그리고 탈영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겪은 고초, 그 후 뜻하지 않게 미군 포로가 된 이야기, 부산과 거제도 수용소에서의 반공 포로 생활 이야기,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포로 석방 조치로 전남 해남까지 피신한 이야기 그리고 다시 한국군으로 입영해 양구군 원당리 비무장지대 전초소(DMZ GP)에서 군 생활을 한 이야기와 마지막으로 미군 군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 생활에 정착하기까지의 삶의 여정을 25여 편 정도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기자말

미군 노무 장교의 지시에 따라 통역 승씨가 작업을 배치하고 우리는 하루종일 열심히 일하였다. 부대 밖의 사회 일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후 4시 30분이면 일이 끝나고 5시면 부대로 들어와서 저녁 식사를 했다. 

나는 POL(유류부서)에서 며칠 일을 하면서 카투사들이 기름을 몰래 빼먹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동차 기름 탱크에 가득 넣고 나가서 기름을 팔고 빈 탱크로 들어와 또 기름을 넣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돈을 벌어 기름을 넣는 사람과 손을 잡고 분배했다.

그렇다고 거기 일하는 사람들이 돈을 골고루 나누는 것도 아니었다. 먹는 놈만 먹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았다. 나는 뒷구멍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못마땅해서 그러한 일에 욕심을 내지도 않았고 결코 바라지도 않았다.

며칠 지나고 나서 나는 디젤 통을 차에 싣고 부대 담장 감시탑으로 가서 초소 위에서 사용할 유류 탱크마다 기름을 붓는 작업을 했다. 옷이 솜옷이라 춥지는 않았으나 기름이 배어 얼룩이 져 냄새도 나고 더러워졌다. 기름을 다루는 일은 무척 힘들었는데 며칠이 지나니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여러 다른 일도 하게 되어 조금 나아졌다.

부대에 취직한 초기 주일에는 대대교회로 가서 예배를 보곤 하다가 정자말에 있는 벧엘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벧엘교회는 교인이 얼마 되지 않는 개척교회였는데 천막교회였다. 김 집사의 집 마당에 천막을 짓고 거기에서 예배를 보았다. 정 장로가 교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찬송가를 부를 때는 정남이 누이가 풍금으로 반주를 쳤다.

당시 의정부읍에서 고산리까지 운행하는 버스는 없었고, 군용 스리쿼터 한 대가 왕래하여 버스 요금을 받고 있어 교회에 다니기가 쉽지 않았지만 나는 열심히 나갔다.

'펑' 소리와 하얀 연기 내는 사진기... 못 찍게 난리 쳐

한국의 소녀들이 미군 방문 환영의 뜻으로 춤을 춰 보이고 있다(1953. 12.23.).
 한국의 소녀들이 미군 방문 환영의 뜻으로 춤을 춰 보이고 있다(1953. 12.23.).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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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전날 밤 크리스마스이브 예배를 보고 아동극을 보았다. 내가 이 장면을 사진으로 찍으니 한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사진을 찍을 적에 '펑' 하는 소리와 하얀 연기가 나왔는데 그 연기가 사람에게 나쁘다고 사진을 못 찍게 난리를 쳤다. 나는 자녀를 선교극단에 참석시키면서 공연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부대가 있는 송산 지방은 산천이 아름답고 땅도 비옥하여 살기 좋은 곳이었다. 나는 19중대에서 기거하면서 여러 친구를 사귀기 시작하고 다른 소대 동료들도 차츰 알게 되어 내무반 생활이 재미있었다.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청소하고 아침을 먹었다. 소대마다 식사 당번이 취사반에 가서 밥을 타오면 내무반 안에서 배식했다. 먼지가 뽀얀 내무반에서 밥 한 그릇과 국 한 그릇에 식사를 담았다. 모두 자기 밥이 많이 오기를 바랐지만, 국이라곤 국물만 멀겋고 건더기는 별로 없었다. 그나마 그것이라도 먹어야지 먹지 않으면 자기만 손해였다.

쌀은 알량미와 비슷한 수준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산이었는데 몇 해 묵어 풀기라곤 하나도 없었다. 파리가 실컷 빨아먹은 밥 느낌이 났고 질도 떨어졌지만, 달리 먹을 것이 없었다. 우리는 그 쌀밥을 먹으며 다들 우리나라 쌀만 못하다고 한 마디씩 했다.

날씨가 점점 추워져 우리는 방한복을 입은 채 나가서 일하고 들어와 옷을 갈아입지 못하고 그대로 자곤 했다. 나는 POL(유류부서)에서 얼마간 일을 하다 통역 한 명이 우리를 통해 필요한 것을 지원해주는 작업부서로 옮겼다. 영내에서 여러 가지 보수작업이나 돌 깔기 작업 등을 매일같이 계속했다. 

드디어 봄이 되자 날이 따뜻해졌다. 나는 등산도 가서 수락산 정상에 올라 사면을 바라보며 지형을 감상했다. 수락산은 높지 않으나 전망은 매우 넓었다. 남으로 청계산, 동으로 천마산, 동북으론 포천 운천산까지 보였다.

나는 그때 돌을 실으려 사방으로 트럭을 타고 다녔다. 부대 내에 필요한 돌을 줍기 위해 수유리, 우이동까지 가기도 하고 또는 광릉 퇴계원까지 가기도 했다. 나는 그때 광릉에 그렇게 좋은 숲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광릉은 세조의 묘로 숲이 울창하게 우거지고 숲길이 너무좋아 마치 우리 고향에 간 기분이었다.

일요일에는 일을 쉬었기 때문에 고산리 일대를 바라보며 자연을 감상하고 동네 구경도 하면서 정자말에 있는 벧엘교회에 나가 예배도 보고 때로는 대대본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았다. 그러면서 성도들과도 차츰 알게 되었다.   

서울 나들이를 가기도했다. 토요일엔 가끔 서울 신당동 중앙시장 사람들과 사귀게 되었다. 군복을 하고 다니니 나를 군인으로 오인한 사람도 있었다.

하루는 외출증을 끊고 서울에 갔다. 돈암동 종점에서 내려 시장으로 가는데 처녀가 사과를 천막에 깔고 파는 것이 보였다. 나는 사과를 사 먹으며 처녀가 맘에 들어 몇 번 이야기했는데 인물도 좋고 말씨도 좋았다. 낯만 익히고 그냥 돌아온 후 다음 토요일에 또 외출하여 처녀에게 갔다. 서로 사귀어보자는 뜻을 비쳤더니 자기는 아직 어리고 그럴 생각이 없다면서 거절하였다.

그날은 더이상 말을 않고 다음 토요일에 다시 갔다. 나는 용기를 내어 처녀에게 일평생 사랑하며 살고 싶다는 말을 하였으나 부모님이 알면 큰일 난다고 펄쩍 뛰었다. 그다음 토요일에 또 돈암시장에 가보았지만, 처녀는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여름이 되니 정 장로는 송산교회(벧엘교회를 개명)를 떠나고 유 전도사가 새로 부임했다. 나는 송산교회 신도들과 점점 낯을 익히며 송산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간 부대에서 하는 일도 바뀌어 36공병단 본부중대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다. 식당에서 음식 만드는 시중을 들었다. 몇 달을 하니 요리하는 것을 대략 알게 되었고 생전 처음 먹어 보는 양식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

나는 다시 서울로 외출을 나가서 중앙시장에서 빵 도매를 하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밤이 늦으면 집에서 자고 가라고도 하고, 나를 수양 아들로 삼는다며 매우 아껴주었다. 봉급을 타도 딱히 맡길 데가 없어 내가 관리를 부탁했더니 참한 처녀까지 소개시켜 주었다. 처녀를 만나보았는데 인물이 별로 없었다. 그분이 내 명의로 김포비행장 부근에 자그마한 집을 사주었다.

가을이 되어 추수를 끝내고 10월 하순 교회를 새로 짓기로 하고 대지를 닦는 데만 일주일가량 걸렸다. 전 교인이 모두 나와서 공사했고 나도 시간을 내어 열심히 일했다.

11월 초순이 되었다. 나무를 사다 대들보를 올리고 상량식을 하게 되어 의정부 제일교회 유 목사가 와서 기공예배를 집도했다. 교회 대들보를 올리고 서까래를 걸고 나니 건축비가 떨어졌다. 다들 다른 데서 도움을 구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도움을 받을 데가 없었다. 이에 유 전도사가 나서서 우리 부대의 통역 승씨를 만나 미군 부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교섭을 했다. 

통역 승씨는 신의주 출신으로 춘천사범학교를 나왔다는데 교인은 아니었지만, 그의 부인은 교회에 가끔 나오기도 했다. 부대 단장에게 찾아가 교회 사정을 얘기하였더니 다행히 미군 부대에서 자재와 인력까지 다 대어서 교회를 짓도록 도와주겠다는 승낙을 받았다.

그 후 부대의 과장까지 현장에 나와서 시간이 되는 대로 도와주었지만, 매일 하는 것이 아니어서 건축 일정이 자꾸 지연되었다. 재료는 새것이 아니고 부대에서 철거되는 콘센트 막사에서 가져온 자재를 썼다. 부대에서 물품을 공급해주고 현장감독은 내가 일하는 526중대 식당책임자인 써전(미군병장)이라 나름 편리한 점도 있었다.

전도사가 모든 것을 내게 부탁하면 써전에게 일일이 말하거나 때로는 통역 승씨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일이 자꾸 지연되고 보니 안타까운 것은 전도사였다. 무엇보다 지붕이 급했다. 그래서 써전에게 함석 중에서 제일 길고 좋은 것으로 지붕을 올리자고 졸랐지만, 새것을 쓸 수 없고 부대에서 철거되는 콘센트 막사에서 걷어 왔기에 써전도 어려운 모양이었다. 비가 올까 노심초사했는데 별 일없이 지붕을 얹어 조금은 마음이 놓이게 되었다.

겨울 동안은 흙벽인 채로 겨울을 났다. 봄이 되면서 바깥벽에다 함석 조각을 대고 마루를 깔기 시작하였다. 그때까지 19중대 대원들이 틈틈이 나와서 일을 도와주었다.

하루는 마루를 놓게 되었는데 내가 써전보고 마루는 땅바닥과 마루 사이를 높게 해야 바람이 잘 통해서 썩지 않고 마루가 오래 버틸 거라고 설명했다. 써전은 나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며 자신이 깔고 있는 마루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땅에 자갈을 깔고 그 위에 투바이포(방부목)를 간격을 맞춰 깔고 그 위에 종이를 깔고 다시 마루를 깔아서 겨울에는 냉기를 막고 여름에는 습기를 막아 튼튼하고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참으로 과학적이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마루를 놓으니 모두 좋아했다.

그간 교회건설에 여러 가지 애타는 일이 많았고 심적 고통도 적지 않았으나 모두의 노력으로 교회가 무사히 완공되었다. 특히 인력과 자재를 지원해 준 미군부대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남자 나이 서른 넘으면 장가 가기 힘들다...

1958년 내 나이 서른 살이 되었다. 주변에서 남자 나이 서른이 넘으면 장가 가기 힘들다고 중매를 해주었다. 여러 집사들이 내게 좋은 신붓감을 소개해주려고 애를 많이 써주었다.

하루는 교회에 있는데 김 집사가 "요전에 얘기하던 처녀가 친구의 결혼식에 갔다가 지금 저기 오고 있어요. 나이는 스물다섯에 심성은 아직 잘 모르지만 얼마나 잘 생겼는지 몰라요"라고 했다.

얼굴이 잘생겼다는 말에 호기심이 생겨 나가 보니, 키가 나보다 큰 처녀 한 명이 오고 있었다. 바로 보기가 쑥스러워 얼른 부근에 있는 볏집 더미 옆에서 기다렸는데 처녀는 앞만 보며 지나쳤다. 슬쩍 보았더니 얼굴이 눈같이 희고 보름달 같았다. 처녀가 가고 난 다음에 김 집사가 어떠냐고 묻기에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주변에서 결혼은 빨리해야지 놔두면 안 된다고 해서 선을 보고 한 달 뒤인 5월 3일 송산교회에서 식을 올리기로 했다.

사람들이 결혼식 하루 전에 교회에 모여 미리 국수도 만들고 준비를 다 했지만, 결혼식 전날 낮 12시에 오기로 했던 신부는 정작 밤 12시가 되도록 아무 연락도 없이 오지 않았다. 걱정된 나는 이튿날 아침 일찍 길에 나갔다가 신부를 만났다. 화장하고 오겠다고 말을 하여 나는 결혼식이 10시 30분이니 늦어도 10시 전에는 꼭 오라고 당부했다.

결혼식 당일 신부가 예식 시간인 10시 반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진을 찍어준다며 카메라를 들고 와 기다리던 써전은 식당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부대로 복귀해 버렸다. '무슨 일이 생겼나? 신부 맘이 변했나?' 걱정과 초조 속에 11시가 넘었을 때, 신부가 도착하여 결혼식을 올렸다.

연재를 마치며 그간 전쟁포로를 연재해 주신 <오마이뉴스>와 애독해 주신 독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전쟁포로였던 송관호 집사님은 언제나 북에 있는 가족을 만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살아생전 통일이 되어 고향 땅을 다시 밟고 그리운 가족을 만날 수 있는 날이 오길 기원합니다. 아내 이기숙 권사님은 2014년 12월 24일 81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훗날 주님의 은총으로 두 분이 천국에서 다시 만나시길 기도드립니다.


태그:#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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