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글은 현재 86세인 장인어른(송관호)이 옛날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수기를 사위인 제(김종운)가 정리한 후 문장을 다듬어 썼습니다. 앞으로 게재할 내용은 인민군으로 북으로 후퇴하던 기록, 그리고 탈영해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겪은 고초, 그 후 뜻하지 않게 미군 포로가 된 이야기, 부산과 거제도 수용소에서의 반공 포로 생활 이야기, 이승만의 반공 포로 석방 조치로 전남 해남까지 피신한 이야기 그리고 다시 한국군으로 입영해 양구군 원당리 비무장지대 전초소(DMZ GP)에서 군 생활을 한 이야기, 마지막으로 미군 군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 생활에 정착하기까지의 삶의 여정을 25여화 정도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기자말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후, 내 고향(이북 강원도 이천읍 판교면 명덕리)도 전쟁을 피해갈 수 없었다. 북과 가까웠던 우리 마을은 인민군이 점령하게 됐다. 하루는 마을 청년들은 모두 면사무소로 모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인민군은 그렇게 모인 우리를 몽땅 차에 싣고 바로 옆 지역인 강원도 통천군(현재 북한) 통천 야영훈련소로 갔다. 5천여 명이 넘는 청년을 모아 부대를 편성했다. 소년들과 키가 작은 사람들을 모아 별도 부대를 편성했는데 나는 키가 작아 스물한 살의 나이로 소년 부대에 소속됐다.

훈련은 다 똑같이 받았다. 한 보름쯤 있으니 미군 비행기의 폭격이 시작됐다. 우리 훈련소에서 원산이 50리 거리였는데 폭격을 하면 불길이 500~600미터 하늘로 치솟았다. 연기는 구름을 뚫고 올라가 멀리서도 구름 위 꼭대기에 퍼졌다. 미군 폭격기는 30여 분 간격으로 쉴 새 없이 원산을 계속 폭격했다. 우리는 비행기에 들킬까 봐 낮에는 육체 훈련을 하지 못하고, 밤에 사상교육만 받았다.

그러던 중 7월 30일 즈음 훈련소에서 훈련 받던 병력이 모두 전선으로 차출되고 우리 소년 부대만 남았다. 홀로 남은 우리는 한 5일간 밀가루로 반죽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방에서 한 오천여 명쯤 사람이 모이더니 훈련소로 입소했다. 그 때 소년부대를 집합하더니 "너희들은 집으로 가라"며 귀향증을 하나씩 나눠 주었다.

나는 귀향증을 받아 들고 신고산을 넘어 응탄면을 거쳐 사흘 만에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내가 고향으로 돌아오니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우리 애는 어떻게 됐니?"하고 물었다. 나는 솔직히 "모두 전선으로 나가고 나만 소년부대에 남아 있다가 돌아오게 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자마자 "전선에 나갔으면 모두 죽었겠네"하면서 우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 있으면서 마을 인근 산 꼭대기에 만든 항공 감시소에 감시대원으로 나가야 했다. 비행기가 오면 빨간 깃발을 흔들고 비행가가 사라지면 하얀 깃발을 흔드는 것이 내 일이었다. 낮에는 집안 일도 때때로 보았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야 하는 날은 생각보다 빨리 닥쳐왔다. 

1950년 9월 18일, 그렇게 나는 집을 떠났다

1950년 9월 18일, 나는 스물한 살의 나이로 고향을 떠났다. 부엌에서 뭔가를 하고 계시는 어머님께 '어머니, 잠시 면에 다녀올게요'하고 떠난 것이 오늘까지의 이별이 될 줄 몰랐다.

그날은 몹시 더웠고 약간 흐렸다. 나는 동네 청년들과 함께 면 인민위원회 앞에 모여 있었는데 특별한 일이 없어 보였지만 우리를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밤이 되니 내무소원이 우리 모두 군 인민위원회로 가야 한다며 재촉했다. 우리는 그렇게 이천읍으로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이야기하길, 미군이 군함 500척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 작전(1950년 9월 15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미군의 공격이 가세화되자, 소년 부대로 분류됐던 나까지 추가징집 된 것이었다. 머지않아 이곳까지 국군이 들어올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나는 일행들과 걸으며 무르익은 들판의 곡식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걷고 걷다 밤 11시경 이천읍 군사 동원부에 도착했다.

지친 몸으로 잠이 들었다. 잠을 자고 깨어나 보니 날이 밝아 있었다. 우린 조반을 먹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어찌나 공습이 심한지 바깥출입을 할 수가 없었다. 낮에 이천읍 서면 민주당지부에서 일하는 형님이 군 당부에 들렀다가 내가 여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앙꼬빵을 사서 같이 먹으며 얘기를 했다. 형님이 나보고 어찌 된 일이냐고 묻기에 "글쎄요, 철원에 있는 군사 동원부까지 가야 한다는데요"라고 답하니 형님은 가서 알아봐야겠다고 했다. 그때가 형님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누이 동생 셋은 보지도 못했다. 

그날 이천읍은 공습이 심하게 계속돼 종일 꼼짝 못하고 있다가 밤에 트럭을 타고 철원을 향해 길을 떠났다. 철원읍에서 이천읍까지는 140리의 거리. 하지만 공습이 있을 때마다 숨었다 다시 갔다를 반복하며 이튿날 아침 열 시가 다 되어서 철원 군사 동원부에 도착했다. 철원으로 가는 도중 곳곳에는 폭탄이 떨어져 깊은 웅덩이가 패이고, 시퍼런 물이 고여 있었다.

철원 군사 동원부는 철원 노동당 당 본부에 있었는데 우리는 거기서도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공습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거기서 처음 제트기를 보았는데 바람개비도 없이 어떻게 저리 빨리 날 수 있을까 감탄했다. 그날은 1950년 9월 20일이었다. 우리는 저녁에 군사 동원부 앞에 모여 출발준비를 하려고 대기 중이었고, 옆에서는 고급 중학교 여학생들이 빨치산 노래와 장백산 노래를 힘차게 부르며 행진하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후 김포비행장에 모습을 드러낸 맥아더 장군(1950. 9. 20.). <박도 시민기자 제공>
 인천상륙작전 후 김포비행장에 모습을 드러낸 맥아더 장군(1950. 9. 20.). <박도 시민기자 제공>
ⓒ 맥아더기념관,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정신없이 터지는 공습

한 청년이 반 실신한 것처럼 웃다가 울다가 했다. 나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는 결코 정신 이상이 아니라 마음에 고통이 있어 부르짖는 것처럼 보였다. 그날 밤 평강군(현재 북한)으로 행군하는데 길가에 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폭격으로 사랑하는 나의 동족이 얼마나 많이 피를 흘리고 비명에 죽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월정을 지나 새벽에 평강의 어느 학교에 도착했는데 조명탄이 터지며 공습이 들어와 우리는 평강 뒷산으로 옮겨 산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그곳은 잠을 자려 해도 추워서 잠이 들 수가 없었다. 평강은 고원 지대였고, 뜰이 매우 넓었다. 옆에는 일본군이 쓰던 병영이 있었는데 그 시설을 인민군이 사용하면서 그곳에서 주는 주먹밥을 받아 먹으며 며칠을 보냈다. 하루는 여군이 고구마를 주기에 맛있게 먹었다. 

9월 23일 저녁, 우리는 출발 준비를 했다. 인민 여군들이 빨치산 노래를 부르며 행군하는 것이 왠지 몹시 처량하게 들렸다. 평강의 아가씨들은 철원과 마찬가지로 살이 맑고 인물이 고왔다. 그날 밤 기차를 타고 삼방(현재 북한 강원도 세포군에 있는 마을)으로 갔다. 삼방은 협곡에 있었는데, 삼이 좋고 물이 맑고, 경치가 아름다웠다. 그곳은 삼방 약수가 유명했고 우리는 거기서 약수를 마셨다. 약수는 조금만 먹어도 확 쐈는데 다른 물보다 훨씬 달았다.

삼방에는 많은 별장이 있었고, 휴양지로 유명한 관광 명소였다. 나는 평강서 같이 떠난 송창도가 없어진 것이 무척 마음에 걸렸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우리는 삼방서 하루를 쉬고 다시 걷기를 시작했다. 그날이 9월 25일이었다. 밤에 걷노라니 용지원 철교가 무너진 것을 노력 동원된 농부들이 철야 작업으로 복구하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신고산서 기차를 타고 아침에 원산 제일 인민학교로 들어갔다. 원산시를 바라보니 폭격으로 처참하게 변한 것이 보였다. 제일인민학교는 원산 동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학교 유리창은 폭격으로 유리가 한 장도 남은 것이 없고, 전부가 빈 창문틀뿐이었다.

원산 도청은 제법 건물이 컸으나 폭격으로 내부는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다. 또 공습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을 바라보니 B29 전투기 아홉 대가 편대를 갖추고 날아오더니 원산 시내를 한 바퀴 돌아 폭탄을 투하했다. 처음에는 까맣게 눈에 보이더니 중간쯤에는 완전히 보이지 않았다. 순간 여기저기서 폭음과 함께 연기가 오르며 폭탄이 터졌다. 나는 시내가 폭격을 당하는 것을 정신없이 바라봤다. 원산 시내에서 완전 무장한 군인들도 많이 보았는데 여군들이 중무장하고 남자들과 같이 행군하는 것이 참 용감해 보였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행렬(1950. 8.) <박도 시민기자 제공>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행렬(1950. 8.) <박도 시민기자 제공>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진인사대천명...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인민학교에서 재미있는 것을 목격했다. 공습으로 사람들이 움직이는데 아래 층 사람들은 3층으로 올라가고 3층 사람들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내가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폭탄이 집에 떨어지면 3층에서 지붕을 뚫고 내려와 땅 아래층에서 터지면 아래층이 박살나 다 죽으니까 3층으로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반면 3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사람이 말하기를 "이 집에 폭탄이 떨어지면 아래층에 있어야 밖으로 뛰어나갈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만일 폭탄이 이 집에 떨어지면 3층이고 1층이고 뛰어나갈 새가 어디 있나' 하고 생각했다. 인명은 재천이라고, 운명은 하늘에 맡기기로 하고 마음을 튼튼히 먹고 나니 오히려 편안했다. 우리는 원산에서 종일 갇힌 생활을 하다가 덕원으로 가게 됐는데 이동하는 도중 공습을 여러 차례 받았다.

가을이 되어 쪽빛 하늘과 맞닿은 동해 바다는 더욱 푸르러 경치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덕원으로 가는 도중 여러 개의 공장을 봤는데 대부분 폭격을 당해 성한 공장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가는 길에 과수원을 지났다. 행군하던 동무들이 배가 고파 길가의 사과를 따 먹는 것을 본 어느 군관 하나가 말하기를 "동무들, 인민의 재산은 우리 인민이 아껴야 될 것이오. 우리는 누구를 위해 싸우시오?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가 아니오. 그러니 누가 인민의 재산을 지키겠소? 바로 우리가 아니오" 하며 사과 따먹는 것을 꾸짖었다. 이 광경을 보고 나는 '참으로 좋은 사람도 있다. 저런 군관이 있다니...'하고 생각했다.


태그:#한국전쟁
댓글12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논어지와 스토리를 만들어 일반인들이 논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