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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우리 사회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잊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가 만나고 이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프로젝트입니다.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이야기를 기획하여 인터뷰로 연재하고 있습니다.... 기자 말

[기사 수정 : 16일 오전 1시 9분]

대한민국을 슬픔에 잠기게 한 세월호 참사가 어느덧 1주기를 바라보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을 위로하는 손길이 이어졌다. 어떤 이들은 간절한 마음을 담은 노란 리본을 만들어 나눠주었고, 어떤 이들은 진심이 담긴 편지로 애도의 뜻을 전했다. 문화예술인들도 영화, 그림전, 영상제, 풍물굿 등 다양한 방식으로 추모의 물결에 동참했다.

음악을 통해 세월호를 기억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했다. 특히 김인영 작곡가의 '잊지 않을게'라는 곡은 지난해 8월 발표 이후 아직까지도 광화문에 줄곧 울려 퍼지고 있다. 희생자 학생들을 친동생이라 부르며 끝까지 가족들과 함께 하겠다고 말하는 작곡가 김인영씨를 지난 5일 만났다.

멋쟁이는 잊지 않는다

‘나는 세월호를 기억하는 음악인입니다.’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는 김인영 작곡가
 ‘나는 세월호를 기억하는 음악인입니다.’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는 김인영 작곡가
ⓒ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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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작곡가구요. 주로 영화나 드라마 OST 작업하고요. 'THE FLAME(더 플레임)'이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어요. 저희는 포괄적으로 영상이랑 음악을 같이 작업하는 회사예요."

-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기 위해 '잊지 않을게'라는 뮤직비디오를 제작하셨는데요. 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세월호 참사 후에 '가만히 있으라'를 홍대에서 한다고 해서 갔는데 그 당시에 한 200명쯤 모였어요. 그러다가 집회규모가 점점 커지는 거예요. 그런데 저희는 방송 관련 일하는 친구들이잖아요. 집회로 하는 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걸 기록으로 남길 수 있게 음악으로 영상으로 준비를 하자고 했죠.

'일단은 추모곡 작업을 하자'고 해서 기타 치는 친구, 믹싱하는 친구, 노래하는 친구들을 다 모았어요. 그걸 하기 전에 직접 우리 눈으로 상황을 봐야할 것 같아서 팽목항을 여름에 다녀왔어요. 작업을 다 마치고 영상 하는 친구한테 맡겨서 뮤직비디오를 만들었죠."

- 작업에 들어가기 전 방문했던 팽목항은 어땠나요?
"저희가 팽목항에 갔을 때 느낀 건 마을 사람들이 다 우울하고 다운되어 있다는 거였어요. 자갈밭을 걷는데 저희 발소리밖에 안 들려서 미안함에 도로로 걸었을 정도니까요. 그땐 7월이었는데 구조보다는 시신이 띄엄띄엄 하나씩 나오고 있을 때였어요. 울음소리랑 시신 같은 걸 너무 많이 듣고 봤기 때문에 그 동네 분들한테도 심리치료가 필요해 보였어요. 평생 트라우마일 테니까요."

- 제작 과정에 대해 좀 더 말씀해 주시겠어요?
"노래를 부를 일반인 30명은 페이지에(페이스북 페이지: '멋쟁이는 잊지 않는다') 공지해서 신청을 받았어요. 고등학생들, 선생님들, 미술하는 분들, 동네 알바들, 애들 선생님, 우리 스태프들, 기자님, 음악하는 분들이 왔어요. 노래를 불러준 친구도 그냥 일반인 고등학생이에요. 단원고 학생들, 초등학교 선생님도 오셨는데 우시느라고 녹음도 제대로 못했어요. 죽은 얼굴을 보면 초등학교 때 애기들 얼굴을 길게 늘여 놓은 것 같다고 하셨어요. 그 날이 3개월 만에 첫 외출이셨대요.

촬영한 거는 기록으로 남겨서 유가족 분들께 보내드렸어요. 노래 부르러 오신 분들께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달맞이꽃 그림이 그려진 에코백도 제작해서 드렸어요. 기부도 많이 받았죠. 상영회 할 때 '두번째달'(에스닉 퓨전밴드)이 많이 도와줬어요. 초등학교 선생님들이랑 리본 공작소도 리본 100개를 보내주셔서 오는 사람들한테 다 나눠줬죠.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많이 떠나가고 결국은 남을 사람만 남았어요."

- 그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물질적인 어려움이 있었죠. 지방 다녀온 것까지 해서 총 진행하는데 100만 원 넘게 들었어요. 기부를 받으면 뒷말도 나오고 이런저런 문제가 있어서 펀딩은 싫었어요. 그래서 제 사비로 진행했어요. 주변에서는 걱정하더라고요. 그래도 "내가 그만큼 벌 수 있으니까 쓰는 거야, 걱정 마"라고 했죠.

또 그때 너무 더웠어요. 제정신으로 녹음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죠. 일반인들을 녹음실로 인도해야 되는데 스태프들이 다 더위로 쓰러졌어요. 그리고 그때는 감정 컨트롤이 안 됐을 때였어요. 참사 터지고 3~4개월쯤 됐나? 다 시위하고 있을 때였어요. 다들 감정이 컨트롤이 안 되니까 모여서 얘기하다가도 누가 한 명 울음 터뜨리면 다들 울고 그랬어요. 그래서 저는 중간에 몇 번 나갔다 왔어요. 내가 조절이 안 되면 진행이 안 되니까. 지금은 평정심 유지하고 있지만 그때는 감정 추스르기가 힘들었죠."

- '잊지 않을게'에 대한 답가도 있다고 들었는데요.
"영화 <조선명탐정2>의 엔딩 타이틀곡인 '나를 잊지 말아요'가 답가예요. 제가 일을 하느라 세월호 관련 활동을 많이 못하니까 미안하더라고요. 그런 마음을 담아서 만들었어요. 이 노래는 죽은 아이가 부르는 거예요. 나는 하늘의 별이 되었으니 잊지 말아 달라고요. '잊지 않을게'는 우리가 부르는 노래구요."

"세월호 참사는 제 인생을 통째로 갈아엎었어요"

‘잊지 않을게’ 뮤직비디오
 ‘잊지 않을게’ 뮤직비디오
ⓒ 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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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가 김인영씨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듣고 싶습니다.
"어, 그냥 어떻게 보면 완전히 내 인생을 통째로 약간 갈아엎는 그런 거였다고나 할까? 그전까진 사회적인 문제보다는 내 개인에 더 신경을 더 많이 썼어요. 지금도 내 개인이 더 중요하긴 하지만요. 참사 이전에는 뭐 아예 정치에 관심도 없었고, 투표도 30대 돼서 시작했어요. 20대 땐 내 일하느라 신경 쓸 틈도 없었어요.

저는 운동권도 아니었고, 촛불집회 이런 것도 한 번도 안 가봤어요. 그냥 광화문은 차 막히는, 시위하는 동네라고 생각하고 살았죠. 저는 지금 30대들이 몸으로 뼈아프게 와 닿는 게 정치에 무관심했던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요. 30대들이 그걸 치르고 있으니까 지금 20대들이 이렇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작년엔 여러 모로 힘든 한 해였던 것 같아요. 일도 나 개인도. 세상이 갑자기 변해 버린다는 게,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이 날 못 받아들인다는 게 정말 힘들거든요. 다행히 제 친구들은 트여 있어서 세월호 이후에 많이 바뀌었죠. 그래서 친구랑 마음 맞는 것도 중요하겠구나 생각했어요. 제가 관계 맺는 사람들의 유형도 많이 바뀌었어요. 저는 방송을 많이 해서 영화 쪽이랑은 교류가 없었는데 교류하지 않았던 영화 쪽 사람들과도 교류를 많이 하고 서로 일도 돕게 됐죠."

- 세월호 참사 이후 '잊지 않을게'라는 곡 작업 이외에 어떤 활동들을 해왔는지 궁금합니다.
"대안언론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희가 5월엔가 모금을 하기 위해 예술하는 친구들끼리 모였어요. 그림 그리는 친구, 음악하는 친구, 글 쓰는 친구. 친구가 운영하는 문화 대안 공간이 있어요. 거기에서 대안언론을 돕는 '후원의 밤'을 열었어요. 공예하는 친구들은 리본 만들어서 팔고. 그때 처음으로 신주욱 작가가 '진실은 침몰하지 않습니다'라는 제목의 그림을 공개했어요. 공연이랑 추모 낭송해서 그 당시에 많이는 아니어도 백 얼마 모아가지고 간담회를 했어요.

또, 10월에는 '세월호 영화인 모임'에서 주최한 '세월호 추모 영상제'가 있었어요. 그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마침 '잊지 않을게'와 미국에서 시위하는 걸 받아서 음악을 입힌 뮤직비디오 작업해놓은 게 있어서 출품했어요. 물론 그 전에도 '잊지 않을게'를 공유해주신 공인들이 꽤 있었고 처음으로 이상호 기자님이 기사를 써주시기도 했지만, 영상제 이후에 더 관심을 받게 됐어요. 영상제 때 틀고 200일 추모제 때는 시청에서도 틀고, 이렇게 해서 신문에도 조금씩 내보냈어요.

그때부턴 작년 가을 겨울 접어들고 영화인들도 열정적으로 움직였죠. 저희 페이지에서는 광화문에서 공연을 많이 했어요. 총 3번 했네요. 올해는 1월 1일에 안산에만 갔다가 활동을 잘 못하고 있었어요.

그러면 뭘 해야 할까 하다가 <금요일엔 돌아오렴> 책이 나와서 '금요일엔 돌아올게' 릴레이 1인 피케팅을 서울 합정 쪽에서 하기로 했죠. '금요일엔 돌아올게'라는 프로젝트를 만든 거예요. 오는 사람도 많이 없고 해서 주로 제가 많이 했죠. 지금 진행 중인 상황이고, 그 활동 계속하면서 SNS도 하고 페이지도 관리했죠."

- '멋쟁이는 잊지 않는다'라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한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페이지인지, 어떻게 이 페이지를 운영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잊지 않을게'를 부른 소정이가 학교에서 되게 멋있고 대단하다고 소문이 났다는 거예요. 그 얘길 듣고 '아, 이건 대중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겠구나. 젊은 사람들이 쉽게 다가올 수 있게, 일반시민들이 옳은 일 하는 걸 멋있다고 볼 수 있게 만들자' 해서 6명이서 페이스북 페이지 운영을 시작했죠.

처음에는 이름이 촌스럽다고 욕먹었지만, 우리 의도를 듣고 나서 지금은 '젊은 애들이 모여서 이렇게 하는구나'하고 인정해 줘요. 그렇게 프로젝트를 몇 달씩 계속하니까, 사람들이 점점 모이더라고요. 시위에 못 나와도 되니까, 극단적인 것 바라지 않으니까 기억해 달라는 식으로 편안하게 말했어요. 여러 사회적 문제들을 영상과 함께 알기 쉽게 설명하기도 했고요.

팔로우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대학생, 각 지방 고등학생들 등 어린 친구들이 많아요. 그래서 너무 심한 욕설은 아무리 공감 가는 내용이라도 삭제해요. 어린 친구들이 많이 보는 만큼 댓글 문화가 중요하니까요."

- 창원에서 소규모로 '가만히 있으라' 행진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작년 여름에 '가만히 있으라'를 창원에서 계획을 했어요. 저희 동네라서 결혼식 참석하러 내려가는 길에 행진을 하기로 했죠. 제 친구랑 저랑 둘이서 행진을 기획하고 서울에서 공지를 했어요. 그런데 한 명만 온다고 댓글 달고 나머지는 '좋아요'만 백여 개 누르고 응원 댓글만 쓰더라고요. 결국 저희 둘이랑 김해에서 오신 밀양탈핵운동하시는 어머니랑 중고등학생짜리 딸 둘. 다섯 명만 모인 거예요. 엽기적이었죠. '가만히 있으라' 역사상 최소 규모였어요.

그래서 창원에서 우리 다섯 명이서 3시간 정도 행진을 했는데 욕하고 신고하고 난리가 난 거예요. 결국 경찰이 왔어요. 경찰이 우리를 진압하러 온 게 아니라, 우리가 공격 당할까 봐 왔더라고요. 주민들이 우리가 위화감 조성한다고 신고했대요. 주민들한테 신고를 당하고 그만하라는 압력도 받았지만 저희는 계속 행진했어요. 저는 저희 동네가 제일 살기 좋은 동네인 줄 알았는데 제일 잔인한 동네였어요."

- 세월호 이외에도 관심을 갖고 활동하시는 연대가 있으신가요?
"쌍용자동차가 '굴뚝데이'라고 1월11일 날 뭘 했어요. 이창근씨 쪽에서 우리한테 도움을 달라고 해서 인증샷을 올리면 편집해서 뮤직비디오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죠. 그걸 1차, 2차 두 번을 해줬어요. 그리고 '굴뚝송'이라고 노래도 하나 만들어주긴 했어요. 김정호 전 지부장님 따님이 노랠 진짜 잘해요. 그래서 굴뚝에 있는 사람들이 내려왔으면 하는 소망을 담은 노래를 누가 부르는 게 좋을까 고민하다가 따님한테 연락을 했어요.

그랬더니 흔쾌히 하겠다고 해서 노래를 녹음했죠. 저는 광화문에 매주 갔으니까 피케팅도 가끔 도와줬어요. 그 대신 그 얘기는 해줬죠. 지금 밀양, 강정, 쌍차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단 내가 지금 제일 1차적으로 신경을 쓰고 초점을 두는 건 세월호다. 그래서 쌍차엔 어느 정도 적정선을 둔 건 있어요." (관련기사: 굴뚝 농성 100일째...이창근 "고맙고 미안한 마음")

"저는 세월호 유가족당이에요"

- 여러 곡을 발표한 후에 정당 가입 제안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솔직히 저한테 무슨 당으로 와라 그런 제안이 많이 있었어요. 근데 전 정치에는 관심이 없어요. 지지하는 정치인도 없고요. 저는 굳이 말하자면 세월호 유가족당이에요. 새누리당에서 유가족 뜻에 맞는 정책을 펼치면 저는 새누리당을 지지할 수 있어요.

자꾸 정치적인 성향을 묻는 사람들이 많은데 당, 정치성향 그런 건 관심 없어요. 그냥 이렇게 많이 아이들이 죽은 이유를 밝히고 진상규명해서 앞으로 그런 사고를 막자고 하자는 건데. 나도 당할 수 있는 일이고 내 가족이 그렇게 될 수도 있는 건데. 이건 기본적인, 인륜적인 거죠. 사람이 죽었다는 걸 먼저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 최근 세월호 정부시행령 폐지를 요구하며 유가족 분들의 삭발식이 있었는데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삭발 전날에 유가족 몇 분이 노숙하신다는 얘기를 듣고 속이 터져서 밤에 10시쯤 광화문에 갔어요. 아버지들이 세 무리로 나뉘어져서 길바닥에 계시더라고요. 시민들도 몇 명 와서 자고. 아버지 몇 분은 잠이 안 온다고 새벽 3시까지 같이 얘기를 했어요. 근데 내일 삭발할 것 같다는 거예요. 그렇게까지 해야겠냐고 물었더니, 이젠 우리는 잃을 것도 없는데 돈 밝히는 사기꾼이 되어 버렸다고 하시더라고요.

정부가 국민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약속한 건 지켜야지,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다 구출해 주겠다, 진상규명하겠다고 했잖아요. 유가족들이 지쳐서 그냥 배상 받고 끝낼 수도 있는 일이지만, 마지막까지 우리 의견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싸우는 건데…. 언론인들이 정신을 차려서 국민들이 유가족들의 진심을 알 수 있으면 좋겠어요. 다들 돈 더 받으려고 그러는 줄 알아요. 오늘도 삭발하고 걷는 부모들한테 그만 좀 하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방송 관련된 일을 하고 있지만, 저는 언론이 제일 문제라고 봐요. 지금 안산에서 광화문까지 유가족들이 이틀 동안 걷는 거 JTBC 빼곤 보도도 안하잖아요. 뉴스에서 벚꽃은 언제 지는지에 대한 얘기나 하고 있고. 유가족들은 앞으로 대한민국이 안전한 나라가 되기를, 더 이상 이런 고통을 다른 부모들이 받지 않기를 하는 마음에서 애쓰는데 언론에는 그렇게 안 나가니까 답답하죠. (관련기사: 외신 '유가족 삭발' 보도할 때 국내언론은 '배·보상액' 집중)"

- 예술인들이 자신의 재능을 활용해서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활동에 동참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는데요.
"세월호 추모모임 30&40에서는 밴드들이 모여 '열일곱 살의 버킷리스트'라는 공연을 시작했어요. 만화가나 화가 분들도 각자 분야에서 동참했고요. 세월호와 관련된 건 아니지만 강정마을 이야기가 담긴 영화 <미라클여행기>도 개봉했었어요. 문제는 이 영화가 일반인이 강정마을 주민들이랑 같이 생활하는 내용의 치유 영화인데도 정치적인 주제라고 상영 금지를 당했다는 거죠.

밴드들도 초반에는 나서지 못했어요. 그런 활동에 동참했다가 찍히면 대기업에서 하는 페스티벌에 초대를 못 받거든요. 다행히 문화예술인들이 자각을 하고 많이 움직이는 편이긴 한데, 문화까지 탄압하려고 하니 문제죠. 개인적으론 좀 더 이름 있는 사람들도 나와서 움직여줬으면 좋겠어요. 영화인 송강호씨, 김혜수씨, 봉준호씨나 가수 이승환씨, 신해철씨처럼요."

- 요즘에는 어떻게 지내나요? 혹시 향후 계획이 있나요?
"요 근래는 시간 나면 광화문에 가서 촛불문화제랑 청와대 가족행진에 참여해요. 일 때문에 오래는 못 있지만 가끔 안부 인사나 하고. 합정 쪽에서 피케팅을 계속 하고 있는데 광화문에도 자주 오라면서 아버님들이 서운해 하세요. 광화문 가면 자기 자식 온 것처럼 반겨 주시고 주머니에 홍삼 찔러 주시고. 그런 모습을 보면 우리 아버지 같기도 해요.

참사 후 100일째 때 7천명이 시청광장에 뛰어나왔던 일이 1년도 안 됐는데, 사람이 팍팍 주는 게 보이니까 '이렇게 잊히는구나' 그게 너무 아쉬워요. 이렇게 꾸준하게 기록으로 남기면서 10년, 20년이 지나 정권이 완전히 바뀌고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최대한 유가족 분들께 친구가 되어드리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국민들이 우리를 배척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옆에 사람들이 없어진다는 건 너무 외로우니까.

5월쯤 따뜻해지면 광화문에서 마켓을 열까 해요. 영화 <다이빙벨>도 상영 금지 논란이 있었고 지금 문화까지 정부에서 탄압을 하는데, 어떻게 해야 일반 국민들이 이걸 알 수 있을까 고민이죠. 분위기 다운되는 것 말고 일반인들도 들어가서 할 수 있을 만한 걸 기획하려는데, 저희도 다들 일을 그만두고 여기에만 온전히 쏟을 수는 없으니까 아직 생각중이에요."

-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싸우고 있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잊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저는 '다 같이 힘냅시다'라고 하고 싶지는 않고, 이런 말을 할 처지도 아니에요. 저도 힘든데 하고 있는 거라서 격려해 줄 여유가 없거든요. 근데 이왕 한 번 시작한 거면 크게 오버 안 해도 되니까 계속했으면 좋겠어요. 자기가 먼저 지치면 끝이니까요. 저는 작년에 분향소를 못 갔어요. 도저히 영정 사진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요. 인천에 한 번 가려고 택시타고 가다가 돌아왔는데 너무 감정소모가 커서 쓰러졌어요. 그러다보니 제 일에 차질 생기고 주변에서 걱정하고 오히려 역효과인 거예요. 완전 감정적이었죠.

대학생들이 많이 활동해 줬으면 좋겠어요. 대학생들이 취업 문제 때문에 두려워하고 힘들어하는 거 아는데, 저는 그게 너무 슬퍼요. 너무 여리고 약해 보이는 거예요. 양심상 안할 순 없어서 하는데 얘들도 한쪽으론 걱정이 되는 거죠. 그런 게 찍히면 취업하는 데 힘들 거고, 그런 사회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목소리를 높이기가 힘든 거예요.

20대랑 30대가 할 수 있는 게 정말 다르거든요. 30대는 사회적인 위치에서 각자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건데, 20대는 아직까지 자유가 있으니까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소신 있게 발언도 하고…. 30대가 세상을 바꾸긴 어려워도 20대는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20대에겐 세상을 바꿀 정도의 희망이 있으니까."
○ 편집ㅣ박순옥 기자

덧붙이는 글 | 김민영, 노서영 기자는 <사람들>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사람들>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 연재됩니다.



태그:#<사람들>, #세월호, #김인영, #잊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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