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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원권이 그려진 부채.
 5만원권이 그려진 부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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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의 본명은 신인선이다. 그는 5월 8일 어버이날에 걸맞은, 우리 사회의 이상적인 어머니다. 신사임당이 그런 이미지를 갖게 된 데는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 특히 셋째아들인 율곡 이이의 역할이 매우 컸다.

만약 이이가 정치적·학문적으로 출세하지 못했다면, 나머지 자녀들만으로는 신사임당이 현모양처의 대명사가 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지위의 고하를 갖고 인간을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신사임당의 자녀 중에서 이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비범보다는 평범에 가까웠다. 물론 그들은 예술적 재능과 훌륭한 인격을 갖고 살았지만, 어버이를 유명하게 만들 정도의 뚜렷한 족적은 남기지 못했다.

첫째 딸 이매창은 충청도 관찰사의 아내가 되었다. 나머지 두 딸의 경우에는 그렇게 특기할 만한 사항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아들 이선은 과거시험 소과에 급제하여 진사가 된 뒤 한성부 남부 참봉으로 관직 생활을 마쳤다. 한성부 남부 참봉은 지금으로 치면 서울시 구청의 9급 공무원에 해당했다.

율곡 이이 빼고 다른 자녀들은 평범

둘째 아들 이번은 특기할 만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고, 넷째아들 이우는 정3품 군자감정(軍資監正)으로 벼슬을 마쳤다. 군자감은 군사 물자를 취급하는 관청이고 군자감정은 이 기구의 책임자였다. 군자감정은 이·호·예·병·형·공조 같은 부서의 국장급에 해당했다.

이들에 비해 이이는 장관급인 판서로 공직 생활을 마친 데에다가 서인당이란 당파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래서 이이가 아니었다면, 신사임당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후세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 점은 맹자 어머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무리 무덤 근처에서 시장 근처으로, 시장 근처에서 학교(사당의 부속기관) 근처로 이사를 하며 삼천지교(三遷之敎)를 했다고 해도, 맹자가 훌륭한 사상가가 안됐다면 그 어머니가 후세의 주목을 받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버이는 자식으로 인해 유명해진다.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의 사직공원에 있는 신사임당 동상.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의 사직공원에 있는 신사임당 동상.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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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버이는 자식으로 인해 유명해진다는 세상 이치를 무색케 만든 인물이 있다. 율곡 이이 못지않게 신사임당의 이미지를 높여준 인물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이이의 사상을 계승한 정치가이자 서인당 당수였던 송시열이 바로 그이다. 송시열은 신사임당보다 103년 늦게 태어났다. 그는 신사임당이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우뚝 서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사람 중 하나다. 오늘날 우리가 신사임당을 존경하도록 만든 인물 중 하나인 것이다.

1504년에 출생한 신사임당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그는 화가들의 그림을 연구하면서 홀로 그림을 배웠다. 그가 모방한 화가는 조선 초기의 안견이다. 안견은 '몽유도원도'로 유명하다. 일곱 살 때부터 안견의 그림을 놓고 혼자 그림을 공부했으니, 신사임당은 가히 천재라고 할 만했다. 

이 때문에 신사임당은 살아 생전에 화가로 유명했다. 종1품 좌찬성을 지낸 고위 공직자이자 조선과 명나라에서 예술가로 유명했던 양곡 소세양도 신사임당의 그림을 높게 평가했다. <양곡집>에 따르면, 소세양은 신사임당의 산수화에 글을 써넣으면서 "신묘한 붓이 하늘의 조화를 빼앗았다"고 평가했다.

이렇게 화가로 세상에 알려진 신사임당이 현모양처의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이이의 정치적 계승자인 서인당 사람들의 공로였다. 서인당 안에서도 송시열의 역할이 가장 컸다.

17세기 초부터 신사임당 적극 평가 움직임

15세기 후반에 중앙 정계에 등장한 사림파(개혁 성향 선비그룹)는 1567년 선조의 등극과 함께 훈구파를 몰아내고 정치권력을 획득했다. 그런 뒤에 사림파는 동인당과 서인당으로 갈라졌다. 동인당은 퇴계 이황을 따랐고, 서인당은 이이를 따랐다. 동인당은 1590년대에 남인당과 북인당으로 갈라졌고, 서인당은 1690년대에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1710년대부터는 노론당의 장기집권이 시작됐다.

이렇게 사림파 내부의 당쟁이 진행되던 17세기 초부터 서인당에서는 신사임당을 적극 평가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신사임당을 서인당 구심점인 이이의 어머니로서 적극 평가하는 분위기가 나타난 것이다. 서인당 사람들한테는 신사임당이 유명 화가가 아니라 자기네 지도자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한층 더 자극한 인물은 서인당 영수인 송시열(1607~1689년)이다. 그의 시대에는 서인당과 남인당의 당쟁이 심했다. 거기다가 숙종이 임금이 된 뒤에는 서인당의 입지가 약해졌다. 숙종이 당파들의 힘을 억눌렀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적 상황 속에서 송시열이 서인당의 결속력을 높일 목적에서 안출해낸 아이디어 중 하나가 이이를 신성화하는 것이었다. 특정 인물을 신성화하는 방법 중 하나는 그 부모를 신성화하는 것이다. 다행히도 이이의 어머니는 이미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었다. 송시열은 이런 인지도를 발판으로 신사임당의 이미지를 제고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이의 위상을 한층 더 높이고자 했다. 그것을 통해 서인당의 결속력과 이미지를 높이는 게 송시열의 궁극적 의도였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흔적이 묻은 오죽헌.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에 있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흔적이 묻은 오죽헌.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에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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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신사임당을 높일 목적으로 장기간 방치된 신사임당의 묘소를 정비하는 사업을 착안했다. 송시열의 시문집인 <송자대전>에는 1668년에 그가 병조판서 홍중보에게 신사임당 묘소의 정비사업을 제안하는 내용의 서한이 나온다. 이때 송시열은 관직에서 잠시 물러난 상태에 있었다. 이 편지에서 송시열은 이렇게 말했다.

"이 선생(율곡 이이)의 부모님인 감찰공(이원수)과 신 부인(신사임당)의 묘소에는 묘표마저 없으니, 앞으로 백 년이 가기 전에 누구의 묘소인지도 모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송시열은 병조 즉 국방부 예산으로 신사임당 묘소를 정비해줄 수 있겠는지를 문의했다. 서인당의 정신적 지주인 이이뿐만 아니라 그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묘소까지 국가 비용으로 정비하려고 한 것을 보면, 송시열이 신사임당의 이미지 제고를 위해 얼마나 열성을 다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 송시열은 글을 쓰는 방법으로 신사임당의 이미지를 바꾸는 데도 관심을 기울였다. 송시열은 70세 때인 1676년에 신사임당의 산수화에 글을 덧붙이면서 "신 부인의 어진 덕이 큰 명현을 낳으신 것은 중국 송나라 때 후 부인이 정이·정호 선생을 낳은 것에 비길 만하다"고 평가했다.

정이·정호는 주자의 성리학 사상에 영향을 준 학자들이다. 송시열이라는 대학자에 의해 신사임당이 정이·정호 형제의 어머니에 비견됐으니, 신사임당을 바라보는 조선 유학자들의 시선에는 한층 더 존경심이 서릴 수밖에 없었다.

송시열이 현모양처 신사임당 이미지 만들어

또 송시열은 신사임당의 그림에 대한 기존의 비(非)유교적 해석도 배격했다. 그는 소세양이 신사임당의 그림에 대해 "소나무 정자에서 바둑 두는 승려들이 한가롭네"라는 글을 덧붙인 것을 두고 '부인의 그림에 대해 승려 운운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며 배격했다. 신사임당의 그림이 불교와 연관되는 것을 견제한 것이다. 송시열은 그렇게 기존의 평가를 배격하면서 신사임당의 그림을 유교적으로 재해석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신사임당이 화가보다는 대(大)유학자의 어머니라는 위상을 갖도록 만들었다.

송시열은 정치거물이자 대학자였다. 이런 인물이 신사임당에 대해 유교적 현모양처의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부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 뒤로는 신사임당의 그림이 재해석되고 신사임당의 이미지도 현모양처로 고정되게 되었다.

송시열 시대에는 서인당이 시련을 겪었지만, 숙종시대 후반기에는 서인당이 힘을 추슬렀다. 그 뒤에는 서인당의 분파인 노론당이 계속해서 조선을 지배했다. 숙종·경종 다음에 영조·정조가 탕평정치를 통해 당파들을 견제하기는 했지만, 그 시기에도 노론당은 여전히 가장 강력한 정치세력이었다. 노론당의 지배력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계속 유지됐다.

이렇게 서인당과 그 후예인 노론당이 장기집권을 하면서 현모양처 신사임당의 위상은 계속 높아졌고, 이런 분위기의 결과로 신사임당이 대한민국 한국은행의 5만원권 모델로까지 선정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사임당이 어머니의 대명사가 된 데에 정치적 배경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신사임당은 훌륭한 어머니이고 훌륭한 예술가였지만, 그를 이용해서 이익을 챙긴 집단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신사임당이 현모양처의 대명사가 된 데는 아들 이이 못지않게 아들의 계승자인 송시열의 노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저 세상에 있는 송시열의 어머니는, 남의 어머니를 높이고자 열성을 다 쏟은 자기 아들에 대해 서운한 마음을 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자기 아들을 추종하는 후세 사람들이 그 덕분에 지배권을 공고히 했다는 사실로부터 위안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 편집ㅣ손병관 기자



태그:#어버이날, #신사임당, #송시열, #현모양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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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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